4당 합당 (90년 체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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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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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당 합당'''(四黨 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90년 체제)|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 (90년 체제)|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90년 체제)|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90년 체제)|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 (90년 체제)|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사건이다. 이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회 (90년 체제)|대한민국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보유한 집권 여당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4당 합당'''(四黨 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90년 체제)|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 (90년 체제)|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90년 체제)|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90년 체제)|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 (90년 체제)|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사건이다. 이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회 (90년 체제)|대한민국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보유한 집권 여당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4당 합당의 여파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롯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여소야대 여소야대]는 약 2년 만에 도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여대야소 여대야소]가 되었고 합당에 반발하여 탈당한 일부 국회의원들이 창당한 [[민주당(1990년) (90년 체제)|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았으며 이전까지 호남 vs PK vs TK vs 충청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지역정치 구도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대한민국 (90년 체제)|대한민국]]에서 지역정치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ref>하지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90년 체제)|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90년 체제)|박정희]]와 [[김대중 (90년 체제)|김대중]]을 대표로 한 [[영호남 지역갈등 (90년 체제)|영호남 지역갈등]]이 20년 간 뿌리깊게 박힌 터라 이 부분은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ref><ref>[[수도권 (90년 체제)|수도권]], [[강원도 (90년 체제)|강원도]], [[제주도 (90년 체제)|제주도]]는 한 지역 정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약했고 특히 강원도와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큰 관심을 못 받고 있다.</ref>
4당 합당의 여파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롯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여소야대 여소야대]는 약 2년 만에 도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여대야소 여대야소]가 되었고 합당에 반발하여 탈당한 일부 국회의원들이 창당한 [[민주당(1990년) (90년 체제)|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았으며 이전까지 호남 vs PK vs TK vs 충청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지역정치 구도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대한민국 (90년 체제)|대한민국]]에서 지역정치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ref>하지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90년 체제)|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 (90년 체제)|박정희]]와 [[김대중 (90년 체제)|김대중]]을 대표로 한 [[영호남 지역갈등 (90년 체제)|영호남 지역갈등]]이 20년 간 뿌리깊게 박힌 터라 이 부분은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ref><ref>[[수도권 (90년 체제)|수도권]], [[강원도 (90년 체제)|강원도]], [[제주도 (90년 체제)|제주도]]는 한 지역 정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약했고 특히 강원도와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큰 관심을 못 받고 있다.</ref> 또한 4당 합당을 통해 설립된 민주자유당은 창당 연도인 [[1990년]]부터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제17대 국회의원 선거]]때까지 '''14년 간 합법적인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ref>[[2004년]]부터 [[2006년]], 그리고 [[2014년]]부터 [[2018년]] 총 6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집권여당으로 군림하였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2025년 기준 총 '''2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권 중인 셈.</ref>


== 배경 ==
== 배경 ==


=== 당시 [[노태우 정부 (90년 체제)|집권 세력]]의 정계 개편에 대한 동기 ===
=== 당시 [[노태우 정부 (90년 체제)|집권 세력]]의 정계 개편에 대한 동기 ===
[[1987년]] [[6월 항쟁 (90년 체제)|6월 항쟁]]의 결과 치러진 동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90년 체제)|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 (90년 체제)|양김]] [[김대중 (90년 체제)|김대중]]과 [[김영삼 (90년 체제)|김영삼]]]]의 분열<ref>둘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김대중과 [[동교동계 (90년 체제)|동교동계]]의 [[평화민주당 (90년 체제)|평화민주당]]과 김영삼과 [[상도동계 (90년 체제)|상도동계]]의 [[통일민주당 (90년 체제)|통일민주당]]으로 나눠진다.</ref> 때문에 [[민주정의당 (90년 체제)|민주정의당]]의 [[노태우 (90년 체제)|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 (90년 체제)|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미약한 지지 기반 속에서 시작한 [[노태우 정부 (90년 체제)|노태우 정부]]는 이듬해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90년 체제)|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90년 체제)|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90년 체제)|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90년 체제)|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90년 체제)|한겨례민주당]] 1석<ref>이것은 [[전라남도 (90년 체제)|전라남도]] [[신안군 (90년 체제)|신안군]]에 출마했던 평화민주당 [[한화갑 (90년 체제)|한화갑]]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90년 체제)|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자 당선 후 평화민주당 입당을 조건으로 한겨레민주당의 [[박형오 (90년 체제)|박형오]]를 밀어준 결과였다. 박형오는 선거 이후 약속대로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ref>, 무소속 9석이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불러오고 말았다.
[[1987년]] [[6월 항쟁 (90년 체제)|6월 항쟁]]의 결과 치러진 동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 (90년 체제)|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 (90년 체제)|양김]] [[김대중 (90년 체제)|김대중]]과 [[김영삼 (90년 체제)|김영삼]]의 분열<ref>둘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김대중과 [[동교동계 (90년 체제)|동교동계]]의 [[평화민주당 (90년 체제)|평화민주당]]과 김영삼과 [[상도동계 (90년 체제)|상도동계]]의 [[통일민주당 (90년 체제)|통일민주당]]으로 나눠진다.</ref> 때문에 [[민주정의당 (90년 체제)|민주정의당]]의 [[노태우 (90년 체제)|노태우]]가 [[대한민국 대통령 (90년 체제)|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미약한 지지 기반 속에서 시작한 [[노태우 정부 (90년 체제)|노태우 정부]]는 이듬해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90년 체제)|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90년 체제)|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90년 체제)|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90년 체제)|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레민주당 (90년 체제)|한겨례민주당]] 1석<ref>이것은 [[전라남도 (90년 체제)|전라남도]] [[신안군 (90년 체제)|신안군]]에 출마했던 평화민주당 [[한화갑 (90년 체제)|한화갑]]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90년 체제)|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자 당선 후 평화민주당 입당을 조건으로 한겨레민주당의 [[박형오 (90년 체제)|박형오]]를 밀어준 결과였다. 박형오는 선거 이후 약속대로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ref>, 무소속 9석이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불러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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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1노3김 회담.jpg|10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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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03990; color:#FFF" | 1988년 5월 28일 원내 4대 정당 총재 회담
! style="background:#003990; color:#FFF" | 1988년 5월 28일 원내 4대 정당 총재 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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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여소야대 상황과 강해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에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원내 제1당 위치의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대한민국 국회부의장 (90년 체제)|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이때 처음 만들어졌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 세력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여소야대 상황과 강해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에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원내 제1당 위치의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대한민국 국회부의장 (90년 체제)|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이때 처음 만들어졌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 세력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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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김대중은 합당 제안을 들었을 때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합당에 동의하게 된다. 김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합당 제안은 시대가 요구하는 통합의 정치에 부응하는 길이었다. 그의 핵심 지지기반인 [[전라도 (90년 체제)|호남]]이 [[5.18 민주화운동 (90년 체제)|5공 시절 억압과 차별]]을 겪은 지역인 것은 분명했지만, [[경상도 (90년 체제)|영남]]과의 끊임없는 지역 갈등 속에 과거에만 머무른다면 나라는 지역갈등으로 쪼개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은 상대가 어떠한 과거를 가지고 있든, 통합의 정치를 실현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민주적 선택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연합을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정치 철학과도 이 결정은 잘 맞아떨어졌다.
처음에 김대중은 합당 제안을 들었을 때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합당에 동의하게 된다. 김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합당 제안은 시대가 요구하는 통합의 정치에 부응하는 길이었다. 그의 핵심 지지기반인 [[전라도 (90년 체제)|호남]]이 [[5.18 민주화운동 (90년 체제)|5공 시절 억압과 차별]]을 겪은 지역인 것은 분명했지만, [[경상도 (90년 체제)|영남]]과의 끊임없는 지역 갈등 속에 과거에만 머무른다면 나라는 지역갈등으로 쪼개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은 상대가 어떠한 과거를 가지고 있든, 통합의 정치를 실현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민주적 선택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연합을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정치 철학과도 이 결정은 잘 맞아떨어졌다.


한편 제2야당으로 전락해 숙명의 라이벌 김대중과의 차기 대권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초기엔 김종필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으로서 점점 부각되면서 노태우 정부에 대한 대립각과 선명성을 부각하던 김영삼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데다, [[1989년]] [[4월]] [[강원도 (90년 체제)|강원도]] [[동해시 (90년 체제)|동해시]] [[[재보궐선거 (90년 체제)| (90년 체제)|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가신인 [[서석재 (90년 체제)|서석재]] 전 의원이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90년 체제)|이홍섭 ]] 후보를 매수하려 한 혐의를 받아 도리어 궁지에 몰리고 말았는데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1989년]] [[6월]]에 노태우 측으로부터 합당 제의가 왔다. 사실 김영삼은 합당 제의가 왔던 시점부터 이미 합당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민주정의당과 합당을 할 명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협상을 질질 끌다가 결국 수락했다.<ref>사실 김영삼이 과거 그렇게 격렬히 대립했던 김대중과 다시 하나의 당으로 합치는 데 큰 이견 없이 동의한 데에는 현실적인 정치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민정계는 차기 지도자로 내세울 만한 뚜렷한 인물이 부족했고, 자연스럽게 외부 인사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영삼은 민정계가 김대중보다는 자신이나 김종필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구군부 출신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는 김종필에 비해 자신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ref> 김종필 역시 이에 합류하여 [[1990년]] [[1월 22일]] [[청와대 (90년 체제)|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당 합당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한편 제2야당으로 전락해 숙명의 라이벌 김대중과의 차기 대권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초기엔 김종필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으로서 점점 부각되면서 노태우 정부에 대한 대립각과 선명성을 부각하던 김영삼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데다, [[1989년]] [[4월]] [[강원도 (90년 체제)|강원도]] [[동해시 (90년 체제)|동해시]] [[재보궐선거 (90년 체제)|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가신인 [[서석재 (90년 체제)|서석재]] 전 의원이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90년 체제)|이홍섭 ]] 후보를 매수하려 한 혐의를 받아 도리어 궁지에 몰리고 말았는데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1989년]] [[6월]]에 노태우 측으로부터 합당 제의가 왔다. 사실 김영삼은 합당 제의가 왔던 시점부터 이미 합당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민주정의당과 합당을 할 명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협상을 질질 끌다가 결국 수락했다.<ref>사실 김영삼이 과거 그렇게 격렬히 대립했던 김대중과 다시 하나의 당으로 합치는 데 큰 이견 없이 동의한 데에는 현실적인 정치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민정계는 차기 지도자로 내세울 만한 뚜렷한 인물이 부족했고, 자연스럽게 외부 인사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영삼은 민정계가 김대중보다는 자신이나 김종필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구군부 출신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는 김종필에 비해 자신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ref> 김종필 역시 이에 합류하여 [[1990년]] [[1월 22일]] [[청와대 (90년 체제)|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당 합당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4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 (90년 체제)|민주자유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슷하게 '''보수 대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 (90년 체제)|일본]]의 [[자유민주당 (90년 체제)|자유민주당]]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은 김종필이 제안했다고 알려졌으며 그 외 다른 당명도 제기되었다. 이들은 합당 당시 개헌 가능 의석수인 200석을 훨씬 넘겼으므로 의원내각제 개헌을 비밀리에 약속했고 각서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것이 시행되며 [[1990년]] 말 [[제7공화국 (90년 체제)|제7공화국]]이 출범한다.
4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 (90년 체제)|민주자유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슷하게 '''보수 대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 (90년 체제)|일본]]의 [[자유민주당 (90년 체제)|자유민주당]]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은 김종필이 제안했다고 알려졌으며 그 외 다른 당명도 제기되었다. 이들은 합당 당시 개헌 가능 의석수인 200석을 훨씬 넘겼으므로 의원내각제 개헌을 비밀리에 약속했고 각서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것이 시행되며 [[1990년]] 말 [[제7공화국 (90년 체제)|제7공화국]]이 출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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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응 세력 ===
=== 불응 세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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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 style="margin:-4.5px -9.0px">[[파일:노무현 3당 합당 거부.jpg|100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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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yle="background:#003990; color:#FFF" | 통일민주당 4당 합당 결의 임시 전당대회에서 항의하는 노무현 의원
! style="background:#003990; color:#FFF" | 통일민주당 4당 합당 결의 임시 전당대회에서 항의하는 노무현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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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 다수 국민이 원했던 것은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대통령제 대통령제]였다. 그러나 4당 합당 이후, 정치권은 빠르게 개헌을 단행해 [[대한민국 제2공화국 (90년 체제)|제2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의원내각제 의원내각제]를 도입하였다. 이 과정은 국민의 의사를 외면한 채 정치인들끼리의 권력 나눠 먹기, 즉 '야합'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고, 이에 대한 비판 여론도 거세게 일었다.
또한, 당시 다수 국민이 원했던 것은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대통령제 대통령제]였다. 그러나 4당 합당 이후, 정치권은 빠르게 개헌을 단행해 [[대한민국 제2공화국 (90년 체제)|제2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span class="plainlinks">[https://namu.wiki/w/의원내각제 의원내각제]를 도입하였다. 이 과정은 국민의 의사를 외면한 채 정치인들끼리의 권력 나눠 먹기, 즉 '야합'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고, 이에 대한 비판 여론도 거세게 일었다.


[[2025년]] 현재까지 [[민주자유당 (90년 체제)|민주자유당]]이 정권을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결정적 변곡점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ref>끝까지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한 [[노무현 (90년 체제)|노무현]]이 창당한 [[열린민주당 (90년 체제)|열린민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총선에서 압승]]하며, 민주화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그러나 레임덕과 각종 정치적 혼란 속에 불과 2년 만에 정권을 상실한다.</ref> 이후 민주자유당은 줄곧 정권을 독점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2025년]] 현재까지 [[민주자유당 (90년 체제)|민주자유당]]이 정권을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결정적 변곡점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의 짧은 기간과<ref>끝까지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한 [[노무현 (90년 체제)|노무현]]이 창당한 [[열린민주당 (90년 체제)|열린민주당]]이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총선에서 승리]]하며 [[민주노동당 (90년 체제)|민주노동당]]과 함께 연립여당 출범으로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그러나 레임덕과 각종 정치적 혼란 속에 불과 2년 만에 정권을 상실한다.</ref> [[2014년]]부터 [[2018년]]까지의 총 4년이라는 기간을 제외하면<ref>[[열린민주당 (90년 체제)|열린민주당]]의 [[문재인 (90년 체제)|문재인]]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이뤄낸 정권 교체. 이는 민주화 이후 민주자유당을 제외한 단일 정당의 최초 정권교체이다. 하지만 수권 능력의 미숙함으로 [[문재인 내각 (90년 체제)|4년 간]] [[이광재 내각 (90년 체제)|내각이]] [[안희정 내각 (90년 체제)|3번이나]] 바뀌면서 여당으로서의 지휘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바로 다음 총선인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90년 체제)|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로 민주자유당에게 여당 지휘를 넘겨주었다.</ref> 민주자유당은 꾸준히 정권을 독점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 여담 ==
== 여담 ==

2025년 11월 15일 (토) 00:16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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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민주당계·제3지대·보수정당
여당 민주정의당
(127석)
민주자유당
(279석)[1]
야당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4당 합당
四黨 合黨
1990년 1월 22일, 4당 합당 발표 만찬 장면.
왼쪽부터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노태우 대통령 (민주정의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원인 제13대 국회여소야대 정국 형성
10차 개헌 논쟁
결과 민주자유당 창당
10차 개헌 및 대한민국 제7공화국 출범
제13대 국회의 여대야소 정국 형성
대한민국일당우위제 형성 및 90년 체제의 성립

개요

당시 대한뉴스 보도
민주정의당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그리고 신민주공화당은 민주 발전과 국민 대화합, 민족 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 오로지 역사와 국민에 봉사한다는 일념으로 아무 조건 없이 정당법의 규정에 따라 새로운 정당으로 합당한다.
노태우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김영삼
그 분이 과연 민주화를 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을 가졌었는데 민주화를 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한 것으로 느꼈읍니다.
김대중

4당 합당(四黨 合黨)은 1990년 1월 22일 발표되어 그해 2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과 야당이었던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사건이다. 이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은 지금까지도 대한민국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 의석을 보유한 집권 여당으로 명맥을 잇고 있다.

4당 합당의 여파로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롯된 여소야대는 약 2년 만에 도로 여대야소가 되었고 합당에 반발하여 탈당한 일부 국회의원들이 창당한 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았으며 이전까지 호남 vs PK vs TK vs 충청 4자 구도로 이어져 왔던 지역정치 구도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대한민국에서 지역정치가 무너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2][3] 또한 4당 합당을 통해 설립된 민주자유당은 창당 연도인 1990년부터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때까지 14년 간 합법적인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4]

배경

당시 집권 세력의 정계 개편에 대한 동기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치러진 동년 12월 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투쟁의 선봉장에 섰던 양김 김대중김영삼의 분열[5] 때문에 민주정의당노태우대통령에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애초부터 미약한 지지 기반 속에서 시작한 노태우 정부는 이듬해 1988년 4월 26일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125석, 평화민주당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 35석, 한겨례민주당 1석[6], 무소속 9석이라는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집권 여당이 과반수 획득에 실패하는 여소야대 국회를 불러오고 말았다.

1988년 5월 28일 원내 4대 정당 총재 회담

그리고 이러한 여소야대 상황과 강해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정치권에도 자연스레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제도권 정치인 국회 운영에서도 항상 과반수를 차지하던 원내 제1당 위치의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배분하는 관례가 이때 처음 만들어졌고 모든 법률/예산 심사와 국회 통과가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되었다. 4개 정당이 의석을 절묘하게 나눠가진 결과 어떤 정치 세력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여당의 날치기와 이를 막기 위한 야당의 국회 점거 농성, 일명 국회폭력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 때가 바로 이 시절이었다. 각자의 원칙과 주장을 목청 높여 외치면서도 서로 대화하고 타협하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민주주의 정치 본연의 모습이 살아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시 여소야대 국면은 대한민국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도 많이 끼쳤다고 볼 수 있다.[7]

여기에 5.18 민주화운동언론통폐합전두환 정부의 권력형 비리 등 과거 군사 정권의 어두운 면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가 TV 생중계로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8] 곧바로 전두환 일가와 측근들의 비리에 대한 검찰의 수사로 전두환의 수하들 수십여 명이 구속되거나 정계에서 강제 퇴출됐으며 전두환은 백담사로 사실상 귀양을 떠나야 했다. 이와 함께 사회 각 분야에 민주화 분위기가 몰아치면서 국민 성금으로 한겨레가 창간되었으며, KBS와 MBC는 그동안 독재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것을 반성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뉴스비전 동서남북과 MBC 리포트 등 본격적인 시사 프로그램들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9]

또 그동안 정권의 탄압 속에서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오던 노동자들이 1987년 6월 항쟁 직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기점으로 봉기하여 경제 성장에 기여한 자신들의 대가를 요구하면서 전투적 노동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 맞물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탄생했고, 프로야구 선수들은 선수 노조 결성을 시도했으며 1989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약칭 경실련)이 등장하면서 시민 운동이 태동했다. 학생운동권과 재야에선 그동안 금기시되던 남북통일 논의에 불씨를 당기면서 1988년 6.10/8.15 남북학생회담 투쟁이 벌어졌고, 1989년 한 해에만 문익환 목사,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임수경정의구현사제단 문규현 신부 등 여러 건의 방북 사건[10]이 일어났다. 즉 군사 독재 정권 시절 억압에 의해서 감춰졌던 열망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일제히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노태우 정부와 민주정의당, 검찰과 군부 등 국가 권력 기관들과 보수 언론 등의 기득권 세력들은 이런 상황을 매우 불안스럽게 보았다. 권력의 정점에 선 대통령을 중심으로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모습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여론을 살피고 야당과 타협하면서 정책을 펼치는 방식은 사뭇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쉬웠다.

사회 곳곳에서 분출되는 다양한 목소리는 각 분야에서 군대식으로 조직되어 있던 기존 질서를 흔들기 시작했으며, 집권 세력은 이것을 자신들의 기득권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보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 내에 마땅한 차기 대권 주자가 없어서 정권 연장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상황이었다.[11] 여기에 노태우 대통령의 지지율도 제5공화국 비리 공개 및 1988년 서울 올림픽과 함께 들이닥친 부동산 가격 폭등과 물가 상승 등의 이유로 지지부진했기 때문에 정부와 여당 입장에선 이만저만 불안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당시 보수 언론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위엄이 사라졌다", "정부가 사회 불만 세력에게 질질 끌려다닌다", "국회가 국가 경제를 발목을 잡고 있다", "공권력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등의 비판 보도가 나오면서 노태우는 물태우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이에 노태우와 민주정의당은 이런 위기 상황을 한 방에 바꿀 만한 해결책을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야당과의 합당을 통한 정계 대개편이었다.

야당들의 정계 개편에 대한 동기

사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여소야대로 끝난 후 1992년 차기 총선과 대선까지 지역 대립 구도에 기초한 4당 체제가 계속 갈 거라고 본 사람은 드물었다. 4당 체제에 만족하는 정치인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독재에 익숙했던 집권 여당 민주정의당은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모든 것을 야당과 협상해야 하는 여소야대 국면을 짜증스러워했다. 거기에 나머지 야 3당도 그렇게 상황이 순탄한 건 아니었다.

우선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13대 총선에서 선전하면서 제1야당으로 부상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지만, 호남과 수도권내 호남 지역민 표 + 개혁적인 성향의 20~30대 친야권표[12]+비판적 지지의 진보표만으로는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한계점을 명확히 깨닫고 있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4자필승론이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했단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고, 확고한 지지층을 지니고 있었지만 동시에 비토층도 적지 않아 확장성에 어려움을 지니고 있었다.[13]

김영삼통일민주당은 제2야당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고,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에게 뒤진 것이 온건하고 보수적인 이미지 때문에 고정 야당표를 놓쳐서라고 판단해 한동안 강경한 대여 선명 투쟁을 외쳤다. 실제로 제13대 대선에서 노태우는 올림픽 이후 국민 투표로 재신임을 묻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중간평가)을 내걸었는데, 김영삼과 통일민주당은 즉각 실시를 끝까지 외쳤다. 그러나 민주정의당이 이에 대해 오락가락한 태도를 보여주던 가운데 오히려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과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중간평가에 반대해 투쟁에 큰 성과가 나지 못했다. 이에 김이 빠진 김영삼은 유신 본당이라 자처하던 김종필에게 접근해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의 합당 냄새를 피우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한편 상당 기간을 권력 핵심층[14]으로 살았던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은 야당 생활이 달갑지 않았고, 박쥐 같다는 평을 많이 들어서 대중 호감도 역시 좋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거기에 박정희 정부전두환 정부를 거치면서 의원내각제가 옳다는 신념을 가지게 돼 내각제를 외치고 있었지만 대중들의 확고부동한 대통령 직선제 지지 여론을 넘을 수가 없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면서 수백만 명이 거리로 뛰쳐나온 지 불과 2~3년 정도 지난 시점이라 이때까지는 대통령 직선제가 곧 민주주의고, 의원내각제는 그들만의 야합이란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서 팽배했다.[15]

전개

이러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정치권에는 온갖 정계 개편 시나리오가 떠돌았고, 언론에서도 이를 수시로 기사화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는 4당 합당이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일처럼 묘사되곤 하지만, 실제로는 1989년 들어 정계 개편과 관련된 보도가 끊이지 않았다.[16] 당시 물밑에서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오갔으며, 그중 현실화된 것이 바로 원내 4당이 모두 하나의 정당으로 합당한, 가장 크고 충격적인 방식이었다. 다시 말해, 논의는 이미 이전부터 이어져 왔고, 발표가 갑작스러웠을 뿐이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여소야대로 끝나고 난 뒤 정권 핵심부에서 나온 첫 번째 정계 개편 방안은 민주정의당(125석)과 신민주공화당(35석)의 합당이었다. 이러면 160석으로 국회 과반수이며, 두 당 모두 군사 정권 출신으로 정치 노선이나 정책상에 큰 차이가 없어[17] 합당 후에도 별다른 잡음이 나오지 않고 TK충청권을 중심으로 보수층을 확실하게 끌어모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연히 권력의 단맛을 아는 김종필과 신민주공화당 정치인들이 합당에 적극적일 것이란 점도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김종필은 합당 제안을 듣자마자 OK를 외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 군사 정권 출신자들의 재결합에 반발해 김대중김영삼이 다시 손을 잡아 거대 단일 야당을 만들 위험성이 있었으며, 사실상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에서 이어지는 두 당이 합치면 당시 국민들이 염증을 내던 군사 정권 색채가 오히려 진해진다는 점에서 다음 선거에서 중도 표를 잃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때문에 민주정의당과 신민주공화당 일대일 합당 시나리오는 유야무야 묻혔다.

그렇게 시간만 계속 흐르면서 여소야대 상황에 시달리던 노태우 정부 핵심부에선 더 이상은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1989년 봄을 기점으로 보수 대연합을 명분으로 하는 정계개편론이 불거졌다.[18] 이때 노태우 정부는 사실 김대중이 이끌던 평화민주당과의 합당을 먼저 구상했다. 이 합당이 성공하면 무엇보다도 망국적인 지역감정을 해소하는 국민 대통합이란 걸출한 명분을 내걸 수 있고, 일거에 군사 정권의 색채를 지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며 의석 수도 민주정의당 125석과 평화민주당 71석, 총 196석으로 단독 개헌선을 아슬아슬하게 남겨두는 초거대 여당을 만들 수 있었다. 물론 평화민주당 내에서 뚜렷하게 진보적 목소리를 내고 있던 재야 출신들은 당연히 이탈했을 것이지만, 호남에 기반한 당 주류 세력들은 재야 진 출신과는 꽤 거리가 있었던 사람들이 다수였다.

그리고 당시 평화민주당과 김대중은 제1야당으로 책임감 있는 정치 세력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상당히 온건한 노선으로 선회한 상태였다. 김대중은 평화민주당이 온건 중도 정당이라고 주장하면서[19][20] 급진적인 학생 운동이나 전투적인 노동 운동과는 선을 긋고 있었다. 참고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강하던 시절에는 독재 정권에 반하는 좌우 세력들이 모두 대동단결하여 소위 민주 세력을 형성해서 민주 vs 군부 독재 구도를 형성했지만, 실제로 군사 정권 시기 민주 진영의 다수는 반공주의, 민족주의, 사회적으론 진보적이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신뢰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으며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 자체를 회의적으로 여기는 사회주의 세력과는 확실히 구분된다.

여하튼 이러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던 평화민주당은 노태우와의 영수회담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의 중간평가 공약 철회를 촉구하였다. 당사자인 민주정의당이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오히려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이 중간평가가 실시될 경우 정국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실상 중간평가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당시 평화민주당 원내총무였던 김원기의 회고에 따르면, 김대중을 비롯한 당 지도부는 노태우 정권이 5공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보면서도, 직선제를 통해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중간평가를 실시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더불어 1989년 10월에는 12.12 군사반란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진실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보상, 의문사 진상 규명, 5공 비리에 대한 사법 처리, 방송 민주화 등 수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두환의 국회 증언 단 한 가지만을 조건으로 5공 청산 완료에 합의해 주었다. 그 증언이라는 것도, 사실 전두환은 사전에 서면 통보된 질문에 대한 답변만 하고 개별적인 질의 응답은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89년 12월 31일 국회 본회의에 나온 것이며, 전국에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정작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변명조의 연설만 하면서 야당 의원들이 명패를 던지면서 야유를 하는 소동이 일어나는 등 만족스럽지 못했다.

아무튼 이런 일관된 김대중의 온건 행보를 보고 노태우 정부는 충분히 합당도 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노태우 정부의 실세였던 박철언 정무장관이 평화민주당 김원기 원내총무를 통해서 합당을 처음 제안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제안이 들어갔다. 1989년 겨울 청와대 영수회담에서도 노태우가 직접 김대중에게 합당을 다시 제의하기도 했는데, 그 대가로 김대중에게 신당의 최고위원직은 물론이거니와 5.18 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에 대한 전권까지 넘겨줄 것을 제의할 만큼 노태우 정부는 합당을 통한 정계 개편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처음에 김대중은 합당 제안을 들었을 때 이를 거절했다. 그러나 머지않아 합당에 동의하게 된다. 김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번 합당 제안은 시대가 요구하는 통합의 정치에 부응하는 길이었다. 그의 핵심 지지기반인 호남5공 시절 억압과 차별을 겪은 지역인 것은 분명했지만, 영남과의 끊임없는 지역 갈등 속에 과거에만 머무른다면 나라는 지역갈등으로 쪼개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김대중은 상대가 어떠한 과거를 가지고 있든, 통합의 정치를 실현할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민의 민주적 선택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연합을 통해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정치 철학과도 이 결정은 잘 맞아떨어졌다.

한편 제2야당으로 전락해 숙명의 라이벌 김대중과의 차기 대권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생각한 김영삼은 초기엔 김종필과의 연대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중과 평화민주당이 제1야당으로서 점점 부각되면서 노태우 정부에 대한 대립각과 선명성을 부각하던 김영삼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간데다, 1989년 4월 강원도 동해시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가신인 서석재 전 의원이 신민주공화당 이홍섭 후보를 매수하려 한 혐의를 받아 도리어 궁지에 몰리고 말았는데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 1989년 6월에 노태우 측으로부터 합당 제의가 왔다. 사실 김영삼은 합당 제의가 왔던 시점부터 이미 합당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민주정의당과 합당을 할 명분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협상을 질질 끌다가 결국 수락했다.[21] 김종필 역시 이에 합류하여 1990년 1월 22일 청와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4당 합당을 공식적으로 발표한다.

4당 합당으로 만들어진 당의 이름을 민주자유당이라고 했는데, 이는 비슷하게 보수 대연합으로 만들어진 일본자유민주당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된다.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은 김종필이 제안했다고 알려졌으며 그 외 다른 당명도 제기되었다. 이들은 합당 당시 개헌 가능 의석수인 200석을 훨씬 넘겼으므로 의원내각제 개헌을 비밀리에 약속했고 각서까지 만들어 두었다. 그리고 이것이 시행되며 1990년제7공화국이 출범한다.

초기 당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이 맡았고, 대통령을 대신하여 당 운영을 책임지는 대표최고위원은 김대중이 맡았다. 그리고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과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박태준은 각각 최고위원을 맡았다. 이로써 노태우 정부는 일단 표면적으로는 절대 의석을 확보한 강력한 여당을 기반으로 안정적 국정 운영을 할 수 있게 됐고, 합당을 거부한 일부 국회의원들만 유일한 야당[22]으로 남게 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면서 정치권의 판세가 호남 vs PK vs TK vs 충청도의 4자 지역 대결 구도에서 거대 여당과 소수의 야당인 일당우위제로 재편되었다. 또한 1960년 4.19 혁명 이후 30년 간 격동의 현대사를 이끌어 온 대한민국의 주요 정치 세력과 인물들이, 1990년 4당 합당을 통해 모두 하나의 정당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는 역사상 유례없는 정치적 대통합이 이루어졌다.

불응 세력

통일민주당 4당 합당 결의 임시 전당대회에서 항의하는 노무현 의원
무효입니다! 이것이 어찌 회의입니까? 이의가 있습니다. 이의가 있으면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도 있습니까?
노무현 당시 통일민주당 국회의원[23]

4당 합당 발표 직후에는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의 거의 모든 의원들과 원외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심지어 명실상부 동교동계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권노갑상도동계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최형우 모두 공개적으로 "나는 절대 안 간다"라면서 합당 거부를 선언한 뒤 다른 합당 거부파 인사들과 함께 새로운 야당 창당을 준비했을 정도. 이를 보면 협상이 진짜 극비리에 이루어지기는 한 모양이다.[24]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이 직접 1:1 설득에 나서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는데, 양김의 간곡한 설득에 이 두 인물 모두 결국 마음을 바꿔 합당 동참을 선언했고 그 뒤를 이어 시간이 갈수록 설득에 넘어가는 인사들이 하나 둘씩 늘어나더니 결국 통일민주당의 거의 절대 다수가 합당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김의 설득에도 민주정의당과의 합당은 야합이라면서 끝까지 이를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은 평화민주당의 김길곤, 김근태, 노승환, 박종태, 신기하, 이교성, 이찬구, 이철용, 장종태와 통일민주당의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이기택, 장석화였는데, 이들은 합당 발표 직후부터 격렬하게 반발했고 끝까지 소신을 지켰다. 이때 김영삼은 노무현, 김정길은 어차피 동참 안 할 사람이라면서 아예 만나지도 않았다고 한다. 다만 노무현은 훗날 "솔직히 나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으며, 이때의 김영삼을 회상하며 훗날 자서전에 나의 일그러진 영웅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노무현은 자신을 정치에 입문시킨 김영삼을 떠나 독립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 험난한 탈 보스 정치, 지역주의 타파 노선을 걷게 되었다.

한편 당시 야당에서 김영삼, 김대중 바로 다음 급의 거물 정치인이었던 이기택 통일민주당 부총재는 오랜 시간을 고민하다가 결국 합당 거부로 마음을 정하고 앞에 언급된 통일민주당 내의 합당 거부파 의원들과 당시 무소속이었던 이철, 박찬종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했다. 당시 민주당은 소속 국회의원이 김광일, 김정길, 김현, 노무현, 박찬종, 박종태, 신기하, 이기택, 이교성, 이철, 이철용, 이찬구, 장석화, 장종태, 허탁[25] 딱 15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속칭 꼬마민주당이라고 불렀다.

김종필이 이끌던 신민주공화당에서도 대전 동구 갑 선거구의 초선 김현 국회의원이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하였다. 그는 무소속으로 있었다가 상술한 꼬마민주당에 합류했다. 한편 뜬금없지만 무소속이었던 정몽준, 유한열[26] 의원도 당시 4당 합당에 동참해 민주자유당에 합류했다.

평가

4당 합당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을 결정한 민주화 이후 최대의 정계 개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정치는 민주 vs 군부 독재에서, 거대 여당 vs 극소수 야당 구도로 재편되었다.

국민이 투표로 의사를 표현하는 민주주의의 본질을 깨뜨렸다는 부분에서 크게 비판받는다. 민주공화당민주정의당으로부터 이어진 군부 정권의 역사에 면죄부를 주고 국민의 투표로 처음으로 쟁취한 여소야대 정국을 인위적으로 여대야소로 바꿔 놓아 정치 권력을 위해 국민의 열망을 부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다수 국민이 원했던 것은 대통령제였다. 그러나 4당 합당 이후, 정치권은 빠르게 개헌을 단행해 제2공화국 이후 처음으로 의원내각제를 도입하였다. 이 과정은 국민의 의사를 외면한 채 정치인들끼리의 권력 나눠 먹기, 즉 '야합'이라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었고, 이에 대한 비판 여론도 거세게 일었다.

2025년 현재까지 민주자유당이 정권을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결정적 변곡점이 바로 이 시점이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의 짧은 기간과[27] 2014년부터 2018년까지의 총 4년이라는 기간을 제외하면[28] 민주자유당은 꾸준히 정권을 독점하며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여담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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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27+70+59+35=291석이지만 평화민주당김길곤, 김근태, 노승환, 박종태, 신기하, 이교성, 이찬구, 이철용, 장종태 전 국회의원과 통일민주당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이기택, 장석화 전 국회의원, 신민주공화당 김현 전 국회의원이 참여하지 않았고 무소속 유한열, 정몽준 전 국회의원이 입당하며 최종적으로 291-14+2=279석이 되었다.
  2. 하지만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김대중을 대표로 한 영호남 지역갈등이 20년 간 뿌리깊게 박힌 터라 이 부분은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했다.
  3. 수도권, 강원도, 제주도는 한 지역 정당에게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약했고 특히 강원도와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정치권에서 큰 관심을 못 받고 있다.
  4. 2004년부터 2006년, 그리고 2014년부터 2018년 총 6년을 제외하면 꾸준히 집권여당으로 군림하였고 이는 현재 진행형이다. 2025년 기준 총 2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집권 중인 셈.
  5. 둘은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극심한 갈등을 겪고 김대중과 동교동계평화민주당과 김영삼과 상도동계통일민주당으로 나눠진다.
  6. 이것은 전라남도 신안군에 출마했던 평화민주당 한화갑 후보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하자 당선 후 평화민주당 입당을 조건으로 한겨레민주당의 박형오를 밀어준 결과였다. 박형오는 선거 이후 약속대로 평화민주당에 입당했다.
  7. 실제로 김대중은 훗날 자서전에서 4당 합당 이전까지의 국회 운영과 노태우 정부의 국정 운영을 협상과 타협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의 모습을 보여줬다며 굉장히 고평가했다.
  8. 당시 청문회에 출석한 군부 정권 인사들은 변명조로 일관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TV 중계를 시청하던 국민들의 혈압을 올렸는데, 질문자로 나선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그저 호통만 치는 게 다여서 사람들의 한숨을 자아냈다. 하지만 풍부한 자료 조사와 구체적인 심문 전략을 준비해 온 몇몇 의원들은 예리한 질문으로 증인들을 숨도 못 쉬게 만들어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이들은 바로 노무현이인제이해찬박찬종이상수김광일이철 등으로, 이들은 청문회 후에도 활발한 의정 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들 중 박찬종만 당시 기준으로 4선의 중진(이후 한 번 더 당선되어 5선 의원을 지냈다.)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초/재선이었지만 이때의 인기와 의정 활동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 한국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9. 전두환 정부 시절에 추적 60분과 레이다 11, MBC 리포트 같은 시사 프로그램이 있기는 했지만, 검열이 강했던 시절인지라 시시콜콜한(?) 사회 문제점을 다루거나 정권 계몽성 아이템을 다루는 수준이었고 정치나 경제 문제 같은 것은 감히 다룰 생각을 하지 못했다.
  10. 지금도 여전하지만 허락 없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11. 당시 차기 대권 주자 여론조사를 보면 야권의 김영삼과 김대중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던 상황이었다.
  12. 이 20~30대 친야 지지자들이 바로 2020년대의 86세대와 상당수 겹친다.
  13.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김영삼통일민주당과 민주화 세력의 표도 나눠가지게 되니 평화민주당 입장에선 다음 선거를 이대로 진행하기엔 불편한 상황이였다.
  14. 이미 35세에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권력의 실세가 되었고 최연소인 백두진 전 국무총리의 뒤를 이어 45세에 두 번째로 젊은 총리를 지냈으며, 국회의원도 역대 최다선인 9선을 했다.
  15. 5공 말 전두환의 셈법이 민주화 요구는 지방자치제로 달래고 본인은 의원내각제 하에서 집권당 총재와 국무총리로 실권을 쥐는 블라디미르 푸틴 2.5기식 장기 집권 방안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 의원내각제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나빴다. 현재 일본 자유민주당이 지지율이 높을 때마다 해산을 해서 계속 원내 다수당 자리를 유지하고 자민당 총재를 무한정 총리로 하는 방식으로 과거에 55년 체제가 호소카와 모리히로에게 깨질 때까지 38년 동안 지속되었고 아베 신조가 8년 간 장기 집권한 것을 보면 당시 국민들의 걱정과 반발을 이해할 수 있다.
  16. 兩黨(양당)체제로 政界(정계)재편, 政界(정계) 멀지않아 改編(개편)될것, 노대통령 보수대연합 시사
  17. 물론 박정희구군부 출신의 신민주공화당과, 전두환·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출신의 민주정의당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러나 결국 두 세력 모두 군 출신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18. 여기서 보수 대연합은 원내 4당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당시 원내 4당 가운데 명확한 진보 정당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두 보수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19. 평화민주당은 진보 정당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당시 한국 정계는 이념보다 지역 기반과 총재 중심으로 돌아가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평화민주당에는 중도 보수에 해당하는 인사들도 섞여있었으며, 해외에서도 보수 야당으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20.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다면 자신들이 진보라고 불리기도 거부했지만 보수라고 불리기도 거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독재 정권과 구분짓는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수라 주장하며 온건 보수층에게 호소했고, 실제 득표도 소득과 자산 수준이 높은 중산층 지역에서 많았다. 반면 시민 생활을 기반으로 설정한 평화민주당에서 본다면 노동을 기반으로 한 진보 세력과도 차이가 있으나 통일민주당과도 지지 기반에서 차이가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21. 사실 김영삼이 과거 그렇게 격렬히 대립했던 김대중과 다시 하나의 당으로 합치는 데 큰 이견 없이 동의한 데에는 현실적인 정치 판단이 작용했다. 당시 민정계는 차기 지도자로 내세울 만한 뚜렷한 인물이 부족했고, 자연스럽게 외부 인사에게 힘이 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영삼은 민정계가 김대중보다는 자신이나 김종필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구군부 출신이라는 부담을 안고 있는 김종필에 비해 자신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22. 평화민주당의 김길곤, 김근태, 노승환, 박종태, 신기하, 이교성, 이찬구, 이철용, 장종태 전 국회의원과 통일민주당 김광일, 김정길, 노무현, 이기택, 장석화 전 국회의원, 신민주공화당 김현 전 국회의원이 합당 과정에서 이탈했다. 이들은 민주자유당에 대항해 선명 야당 민주당을 창당한다. 하지만 후에 노무현을 제외한 대부분 정치인은 민주자유당에 합류한다.
  23. 위 사진 중앙에서 팔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인물. 그는 당시 초선 국회의원이었다. 지역구는 부산 동구. 훗날 민주화 이후 최초의 정권 교체를 달성한 국무총리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24. 권노갑과 최형우 모두 유신 체제5공화국 시절 민주화 운동의 행동대장으로서 모진 고문과 탄압을 당해왔다.
  25. 1990년 4월 3일 보궐선거로 당선.
  26. 유진산 전 의원의 장남.
  27. 끝까지 민주자유당 합류를 거부한 노무현이 창당한 열린민주당총선에서 승리하며 민주노동당과 함께 연립여당 출범으로 민주화 이후 처음으로 정권 교체를 이뤄냈다. 그러나 레임덕과 각종 정치적 혼란 속에 불과 2년 만에 정권을 상실한다.
  28. 열린민주당문재인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며 이뤄낸 정권 교체. 이는 민주화 이후 민주자유당을 제외한 단일 정당의 최초 정권교체이다. 하지만 수권 능력의 미숙함으로 4년 간 내각이 3번이나 바뀌면서 여당으로서의 지휘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바로 다음 총선인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도로 민주자유당에게 여당 지휘를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