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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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윈은 진화론을 통해 생물에는 어떠한 태생적 목적도 없음을 드러내보였고, 인간이 동물과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진화해왔음을 천명했다. 자연계와 사회세계는 별개의 것이 아니며, 인간은 세계에 우뚝 솟은 존재가 아니라 그중 하나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목적이 진보라고 하더라도 과정은 투쟁일 수 밖에 없다. 자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피흘리며 싸우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간주된다. 이로서 무한 경쟁에 근거를 둔 근대 자본주의 세계는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이냠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에서도 투쟁이라고 하는 방법론을 받아들였다.

 

인간은 더이상 도덕의 겉옷을 걸칠 필요가 없게 되었고, 그가 자본주의자건 사회주의자건 맨몸으로 살갗을 찢어가며 쓰라린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 기반 위에서는 어떠한 처방도 한낱 도덕주의적 대중요법밖에 되지 못한다. 먼 옛날의 서사시들은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인식 없이도 세계가 쓸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수많은 세월이 지난 다음에도 또다시 같은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너무나도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20세기는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극단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 극단은 어느날 갑자기 솟아난 것이 아니다. 15세기 이래 면면히 준비되어온 것들이 표피를 뚫고 터져나온 것이다. 개념적 파악은 불가능해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파악불가능을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듯 하다.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모든 이론은 잿빛이어서 현실에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이론적 파악을 포기해야할까? 그리고 이론적 파악의 출발점인 읽기를 포기해야할까? 그것이 극단의 현실에 대한 올바른 대응일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고전이 보여주는 자아를 자기 몸에 넣어보고, 다시 빠져나와보고, 다시 또 다른 것을 넣어보고, 또 다시 빠져나와본 다음에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질 자아가 과연 진정한 것인지 확인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예 텍스트를 손에 잡지 말아야 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사실.

- 강유원, <책과 세계> p. 9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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