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전

§§ 올리비안...

§§ 올리비안 왕국 §§

. Kingdom of Olivian

. Reino de Olivian

 

2018년 8월, MCAC에서 '오이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가상국가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현재 국명은 '올리비안'으로 개칭되었다.

본래 전제군주국으로 기획되었지만 역사가 개정됨에 따라 입헌군주국으로 변화하였고, 위치도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옮겨졌다.

제 3차 개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으며 모든 역사 및 이를 기초로 하는 세계관에 대한 저작권은 본인(게재자)에게 있다.

(1차: 2019년 초, 2차: 2019년 말, 3차: 2024년)

 

지금의 올리비안 왕국이 있게한 옛 동료이자 스텔라공화국의 지도자, Whitefield님,

그리고 지금의 올리비안 왕국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신 MCAC의 원로들과 특히 Sir G. Milland님에게 감사드린다.

마지막으로 글을 PC, 모바일 상관없이 자유로이 쓸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게시판 및 에디터를 업데이트해주신 은혜누나 님 및 운영협회의 관계자들에게 감사드린다.
 

 


1.  제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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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리 제도는 지각판 변동으로 갈라진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중간인 중앙 아틀란티스 해령과 가까워 이로부터 카보베르데 등처럼 많은 지질학적 영향을 받았다. 지리학자들에 의하면 오이리 제도는 기원전 6000년경에 해저화산의 거대한 폭발로 형성되었다고 보는데 화산이 6회에 걸쳐 폭발하면서 자연적으로 봉우리가 소실되었다. 오이리 국립공원 지하로 봉우리가 소실된 화산이 묻혀있으며 현재 그 근처로 왕궁과 정부건물이 들어섰다. 마뮤트 화산이 사화산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불행히도 여전히 제도와 가까운 노시아산이나 메레니치 해저화산대 등은 활발히 분화 중이거나 휴화산으로 잠들어있다.

 

오이리 제도로 원주민들이 유입된 때는 500년 즈음으로 보인다. 가뭄의 심화로 바다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이 중 몇몇이 바다를 건너 오이리 제도로 들어왔다고 인류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지만, 토착민은 유전학적으로 서아프리카의 니제르 콩고어족에 속한다. 이후 유입된 포르투갈인과 영국인은 서로 뒤섞여 올리비안인(유럽계 올리비안인)을 형성하였고 토착민의 4%(현재 니제르계 올리비안인)만 살아남아 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2.  1502년 ~ 1712년; 포르투갈령 올리비안

 

AC 1502년, 이전까지 부족 문화를 줄곧 유지해왔던 원주민들이 살던 오이리 제도에 포르투갈인들이 처음으로 발을 들이면서 오이리 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본래 스페인 함대가 이곳을 발견했지만 포르투갈과의 마찰을 우려해 상륙하지 않았고 이를 알게 된 포르투갈 탐사대가 먼저 상륙한 것이었다. 이는 카보베르데 등 서아프리카와 브라질을 식민지로 삼고 있던 포르투갈 왕국과 대비해 카리브해와 중남미를 거점으로 하는 스페인 제국의 이해관계 충돌 방지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카보베르데는 전형적인 화산 활동으로 생겨난 열도 지형으로 크기는 가장 큰 섬이 횡성군과 비슷하며 전체로 보면 전라남도의 크기에 불과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절하지는 않았다. 자원도 다량의 현무암 뿐이므로 이익이 크지 않은 곳이었지만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동시에 연결하는 남대서양 가운데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 덕에 포르투갈은 카보베르데를 식민지로써 유지하되 흑인 노예들을 정착시켜 촌을 유지하였다.

 

반면 오이리 제도는 비록 카보베르데처럼 화산 활동으로 생겨났지만 가장 큰 섬인 '그란데 오이리일라'의 크기가 19,195㎢로 이는 경기도 2배의 크기보다 살짝 작은 수준이고 화산 폭발로 솟아오른 카보베르데 열도와 다르게 오이리 제도는 여러 개의 화산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하여 땅이 천천히 융기함과 동시에 분출한 마그마가 식은 것이므로 화강암과 현무암이 적절히 섞여있다. 또한 기후도 카보베르데와 비슷한데 농사 지을 땅, 자원 모든 부분에서 넉넉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절히 쾌적한 섬이다.

 

유럽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를 동시에 연결하는 남대서양 가운데에 위치한 오이리제도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포르투갈은 본격적으로 섬을 개척했는데, 의외로 이곳의 토착민(원주민)들은 노예로 팔려나가지 않고 되려 우대받았다. 일단 포르투갈령 서아프리카와 먼 곳에 있었고 섬의 사람 수도 적었으며 이 섬을 개척하고 포르투갈인의 정착촌을 건설할 만한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포르투갈 당시 정부는 따라서 이 섬에 대한 현황을 보고받은 후 당장 가까운 최초의 해외 식민지인 기니비사우에서 생필품 및 자원을 보급하면서 원주민을 활용하여 정박지 및 요새 성채를 건설하도록 지시하였다.

 

원주민들은 포르투갈 정부에서 식량과 옷을 제공하였고 그 대가로 노동력을 지불하였다. 물론 당시 흑인에 대한 인식은 지배받아야할 인종 자체였기 때문에 인권이 백인과 대등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아프리카 대륙의 흑인들보다는 상황이 나았고 심지어 원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집을 짓고 살아갈 수 있도록 구역까지 지정해주었다. 포르투갈인이 정착한 곳은 오이리와 모뷔멘토였고, 원주민들의 구역은 하빌리다드였다. 흥미로운 것이 어원인데, 모뷔뭰토는 포르투갈어로 '동작', '동적'을 의미하고, 하빌리다드는 포르투갈-스페인어로 '능력'을 의미한다. 생산적인 일을 주로 했던 포르투갈인의 도시와 능력있는 원주민들의 구역을 의미하며 따라서 각각 지칭해서 부르는 말이 된 것이다. 

 

포르투갈인은 200여년에 걸쳐 이곳을 지배했고 혼혈인의 수가 늘어났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오지에 불과하던 섬 서부가 개척되면서 인구가 더더욱 늘어났고 오이리 제도는 포르투갈 상선의 휴식처이자 포르투갈인의 휴양지로 변모하였다. 그러나 포르투갈인의 수가 원주민의 수를 넘어선 이후부터 원주민에 대한 인식은 점차 노예 취급받는 흑인과 다를바 없게 되었고 생태계는 파괴되어 농사만으로 식량을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마저도 포르투갈인이 올리브 나무를 섬 곳곳에 심어 올리브 생산기지로 섬을 이용하고자 했으며 올리브가 많은 나라라고 하여 국호 또한 올리비안이 된 것이다.

 

 

 

3.  1712년~ 1714년; 영국 강점기 (포테데르 독립투쟁)

 

1711년의 어느날, 갑작스럽게 제도에 불어닥친 천연두 바람에 오이리 제도에는 봉쇄령이 내려졌다. 유입된 경로는 알지 못하지만 천연두에 대부분 면역이었던 포르투갈인과 달리 원주민들은 천연두에 매우 취약했고 포르투갈인의 노인과 어린이 등 면역취약계층이 잇따라 감염되면서 순식간에 섬이 쑥대밭이 되었다. 농사와 어업에 종사하던 원주민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자 포르투갈인은 결국 제도를 봉쇄하고 기니비사우 또는 본국으로 철수하기로 했다.

 

이후 1712년, 포르투갈에서는 스페인 왕위 전쟁의 경과에 따라 오이리 제도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이를 방치하다가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인과 다르게 영국인은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영국군은 포르투갈군이 건설해놓았던 군사기지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을 강제로 노동시켰고 섬에 쓰레기가 넘쳐났으며 부족한 식수 제공으로 인해 매년 평균 5000명이 넘는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이는 2년간 지속되었고 결국 원주민들은 혼혈인(유럽계 올리비안인)들과 힘을 합쳐 자체 포르투갈인으로부터 배워온 군사 기술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독립군을 조직했다. 영국인에 대항하기 위한 합동 노력의 과정에서 결과가 어떻든 원주민들과 혼혈인들의 정체성 간극이 이에 따라 해소되었으며 훗날 다른 나라와 다르게 올리비안은 원주민들에 대한 존경심과 동질감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은 영국이 무단으로 자국의 땅을 앗아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이 불만을 품고 독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내었다. 이에 포르투갈은 몰래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을 지원하게 되는데 포르투갈인에 비교적 우호적이던 오이리 제도의 원주민들이 영국군을 성공적으로 몰아낼 경우 포르투갈군을 다시 환영하고 포르투갈에 충성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4년 5월, 영국군의 일부가 해적소탕을 위해 카르보니아 제도로 출발했을때 당시 혼혈인이자 독립군의 대장이던 '알 포테데르'는 섬에 남아있는 절반의 영국군을 기습공격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국군은 독립군의 예상보다 훨씬 강력했고 그는 결국 포르투갈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청했다. 포르투갈은 그들에게 몰래 대포와 포탄을 지원했고, 영국군의 강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끝내 항복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강한 분노를 느끼고 즉시 프리깃함 6척을 출격시켰으나 앤 여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아프리카 해역에 들어섰을 때에 회군하였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1714년 8월, 상륙했는데 '알 포테데르'의 독립군으로부터는 환영받았지만 오히려 일반 오이리 제도의 사람들은 포르투갈을 환영하지 않았다. 포르투갈도 영국과 다름없는 제국주의 국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715년 2월, 포르투갈은 결국 '알 포테데르'를 총독으로 하여 충분한 자치권이 보장된 '오이리일라 자치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의무 군량도 절반으로 줄였다. 이는 '포르투갈령 앙골라'와 비교되었으며, 이가 가능했던 이유는 자치정부가 혼혈인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고 친포르투갈 인사들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다. 즉, 정말 잘만 관리한다면 안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포르투갈의 해외식민지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4.  1714년~ 1861년; 오이리일라 자치정부기

 

이후로 146년간 오이리 제도는 사실상 유럽과 다른 지역 국가들로부터 포르투갈령임을 인정받았다. 독립군은 경비대로 변화하여 치안을 담당했고 사람들은 더 이상 원주민이 아닌 포르투갈인과 자유로이 무역할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자유권을 가진 오이리 자치시민으로써 살게 된다. 오이리 제도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포르투갈풍 주택이 즐비했고 길은 깨끗한 조약돌길로 깔렸으며 2개의 항구가 새로 들어서면서 남대서양 인근 국가 및 아프리카의 여다른 식민지들 중에서 가장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문해율이 10% 미만이었던 포르투갈령 앙골라 등 가까운 해외식민지와는 다르게 교육적인 부분도 개선되어 혼혈인과 원주민 모두 포르투갈어를 의무적으로 교육받을 수 있도록 하는 기초 교육이 제공되었고 비록 가톨릭교를 기반으로 했으나 종교 교육도 의무화되었다.

 

 

 

5.  1861년~ 1862년; 독립요구와 승인

 

그러던 1861년, 유럽의 정세가 날로 복잡해져만가는 가운데 브라질이 독립을 앞두고 미국이 남북전쟁을 시작하면서 오이리 제도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포르투갈군의 보호를 받던 오이리 제도의 시민들은 포르투갈이 철수하게 될 때 민족의 존속이 위태해질 것을 염려하여 당시 오이리 원주민(오이리 족)의 전통을 고수하는 동시에 신문물을 꾸준히 받아들이면서 자주적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력(온건적 근대화파)의 지도자인 '엘니치 하파시'의 주도 아래 오이리 자치의회 설립을 추진했으며 포르투갈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새로운 국가를 결성하고자 하는 독립의 열망, 의지가 넘쳐났다.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를 어떻게 해서든지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였지만 브라질과 올리비안은 포르투갈인들이 다수 거주하며 포르투갈인에 의한 영향력이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곳이므로 사실상 식민지로 인식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에서는 당장 오이리 제도의 존속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는데 브라질을 잃어버린 포르투갈은 본토와 아프리카로부터 비교적 멀면서 브라질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올리비안의 지리적 이점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카보베르데는 그나마 본토와 기니비사우 중간길에 있으며 노예무역의 거점이면서 노예들에 의해 관리되지만, 올리비안은 사실상 거주인이 포르투갈인과 동등한 지위로 취급받으면서 포르투갈에 의해 직접적으로 관리되고 포르투갈의 재정도 투입된다는 것이었다. 1862년, 포르투갈은 오이리일라의 독립을 승인했으며 4월 14일, 오이리 의회가 개원, 헌법이 제정, 의회가 '엘니치 하파시'를 1대 총리로 선출하면서 오이리일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6.  1862년~ 1868년; 오이리일라 공화국

 

그러나 1868년, 포르투갈의 영향력 아래 왕당파가 힘을 받았고, 오스트리아가 헝가리 합병 및 제국을 선포,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등 제국주의가 국제적으로 만연하자 자국내에서 세계적으로 지위 및 위상을 높이기 위해 유럽과 같이 왕정을 선포해야 하지 않느냐하는 의견이 등장했다. '엘니치 하파시' 총리와 '알 포테데르'의 후손인 '카를로 포테데르' 사이를 두고 누가 올리비안의 왕이 될지 결정해야 했는데, 결국 이는 내전으로 번졌다. 엘니치 하파시는 다만 입헌군주제와 올리비안 민족주의에 따른 정부를 주장했고, 카를로 포테데르는 전제군주제와 포르투갈식 왕정 정부 구성을 주장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중과 군부의 지지를 받은 엘니치는 내전 시작 이틀만에 승리하였는데, 알 포테데르와 다르게 '카를로 포테데르'는 술 의존증이 있었고 대중적 인기도 없었던 데다가 매우 보수적이었기에 자유주의에 환희를 막 느끼기 시작한 올리비안의 정세와 매우 대치되었다.

 

따라서 엘니치 하파시는 내전 종전 직후 카를로 포테데르를 노시아 섬으로 유배 보내고 스스로 왕좌에 올랐으며 이로써 올리비안 왕정이 들어섰다. 이때 총리가 국왕으로 즉위, 새로운 총리가 재선출되어 왕과 총리가 동시에 존재하는 입헌군주국으로 발전한다. 당시 국왕은 행정부 수반, 총리는 입법부 수반으로써 서로 견제하면서 통치하는 형태였다. 즉 해당 시대의 다른 왕정에 비해서 훨씬(?) 진보적인 형태였고, 이는 식민지에서 공화정이 되었다가 왕정이 된 유래없는 배경에 따른 불가피함 때문이었다. 이로써 '엘니치 하파시'는 초대 총리이자 초대 국왕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바로 뒤를 이은 2대 총리로 '카를로 포테데르'의 사촌지간이지만 입헌군주제와 올리비안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창당된 독립당의 대표였던 '알렉상드르 마르코스'가 선출되었다.

 

 

 

7.  사우스조지아 혁명 (1872년)

 

오이리 공화국이 입헌군주국 체제로 변화하면서 섬 중서부의 마을인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은 이에 매우 불만적이었다. 당시 시장이었던 '제임스 화이트필드(James Whitefield)'는 이 지역의 사람들이 영국의 군주를 섬기고 있었기 때문에 오이리 왕국의 새로운 왕을 섬길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를 매우 불쾌했기 때문이다. 사우스조지아는 1712년에 들어온 영국인이 섬 동부에서 원주민들과 포르투갈인들을 강제로 몰아내고 정착하여 살다가 영국과 포르투갈 간 외교적 마찰(당시 영국과 포르투갈은 전통적 우방국이었다)을 피하기 위해 합의하에 남고자 하는 영국인만 따로 이동하여 정착촌을 건설한 곳이었다. 이곳은 포르투갈의 지배를 받지 아니하고 영국의 군주를 섬기면서 영국의 행정관 파견으로 독자적인 영국식 법률이 적용된 곳이었다.

 

제임스 화이트필드 시장은 사우스조지아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1872년 3월, 혁명을 일으켰다. 이를 '사우스조지아 혁명'이라고 한다. 엘니치 하파시와 알렉상드르 마르코스는 즉각 시장을 체포하고 혁명 정부의 해산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미국과 영국이 사우스조지아 지원을 선언하면서 상황이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미국은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 중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을 두둔한 것이며 오이리일라 왕국의 정통성 문제 또한 제기하여 엘니치 하파시 왕 자체를 부정하였다. 또한 브라질이 나서서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였는데 이때부터 브라질은 같은 민족과 같은 문화 그리고 같은 언어를 쓰지만 약소 신흥국가인 오이리일라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엘니치 국왕은 열강의 잇따른 간섭에 6일만에 신속하게 사우스조지아의 영국화를 승인했다. 사우스조지아에 영국인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애초에 약간의 이질감이 작용했기도 했다. 사우스조지아 사람들은 시장을 대통령(행정수반)으로 하여 1872년 6월, '브리티시 올리비안'을 수립하였는데, 이때 신 왕정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거주하던 벤타나 시(市)의 일부와 북 메레니치 시(市)가 참여하였고 1873년, '스텔라 공화국(영국령)'이 결성되었다.

 

여담으로 스텔라 국호의 어원은 당시 제임스 화이트필드의 아내의 이름인 스텔라 화이트필드로부터 따왔다. 그 당시 스텔라를 이름으로 하는 성씨 유행이 있었다.

 

 

 

8.  1868년~ 1882년; 오이리일라 왕국 (엘니치 하파시 시대)

 

1868년부터는 연표 중점으로 작성된다.

 

1868년 - 엘니치 국왕은 비록 스텔라 공화국의 분리로 한 섬에 두 나라가 들어서고 주변 열강의 간섭으로 왕국이 불안정한 정세에 놓여있었음에도 적극적으로 외교를 펼쳤고, 이에 미국이 먼저 오이리일라 왕국과의 수교를 제안하였다. 따라서 미국과 수교를 맺었지만 그 이후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

이어서 영국과도 수교를 맺었고 브라질과도 잇따라 수교하였다. 특히 스텔라 공화국에 대해서는 적대적 행위를 중단하고 제임스 화이트필드와의 독자회담도 서슴치 않고 추진했다. 이는 제임스 대통령이 회담을 최종 거부하면서 무산되었지만, 적어도 양국 간의 자유로운 통행 및 시장거래는 허용되었다.

 

1869년 - 엘니치 국왕이 '원주민 보호법'을 외치며 의회를 소집하였다. 민족주의의 대두로 오이리 족의 토착언어와 문화가 존중, 보호받아야하며 정체성을 따라가야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이었는데, 이 법은 독립당-통일왕국당 협치로 통과되었다.

 

1870년 - 2월, 알렉상드르 마르코스가 심근경색으로 사망하였고, 엘니치 국왕은 마뮤트 국립묘지를 건설하여 그를 안장시켰다.

독립당-통일왕국당 협치로 선거없이 곧바로 차기 총리가 결정되었는데, 3대 총리는 '조지아 가르시아'였다. 이때 평화당이 격렬히 반대하였고, 독립당과 평화당의 경쟁 구도는 이때부터 지금까지 이르게 된다.

12월, 오이리일라 왕정 수립후 첫 선거가 열렸는데 통일왕국당이 근소한 차이로 독립당을 누르면서 다수당이 되었다.

 

1871년 - 1월, 신년에 따라 다수당인 통일왕국당의 당수가 총리가 되어야했지만, 독립당과 통일왕국당이 지속적으로 연대함과 동시에 통일왕국당이 '조지아 가르시아'를 인정하면서 그는 총리로 계속 남을 수 있었다. 조지아 총리는 수도법을 통과시켰는데, 이때 오이리일라 왕국의 수도가 공식적으로 오이리 시가 되었고 왕궁, 의사당 등 행정/의정 건물 건설을 위한 예산도 편성되었다. 처음에는 이 모든 정부 건물들을 그라나 시에 건설하려 했다.

 

1872년 - 포르투갈과 수교하였다. 포르투갈과의 수교가 늦어진 것은 포르투갈이 엘니치 국왕과 오이리일라 왕정을 뒤늦게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1873년 - 스텔라 화이트필드가 사망했다. 총리는 장례식에 참석했고 이참에 우호를 다지는 의미에서 양국의 경제 활성화 및 경제통합을 위해 시장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경제 활성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과의 교역이 중단되었고, 어획량마저 감소하면서 경제적으로 위기를 겪었다.

 

1874년 - 경제 위기로 재정이 고갈되가는 가운데 선거가 열렸다.

12월, 두 번째 선거에서 통일왕국당은 경제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지율이 급락했고, 독립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독립당의 '안토나 니치 토바스'가 4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당시 평화당과 새로 창당된 경제제일당은 안토나가 경제를 살릴 수 없는 이라고 총리로써 선출되는 것에 반대했다. 한편 통일왕국당은 조지아 전 총리의 직위를 유지시켜주었는데 이번에는 자신의 당수가 총리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한 적이 있다. 이 해에 독립당은 모든 당으로부터 적대 당했으나 엘니치 국왕이 독립당을 옹호하여 민심을 온전히 잃지는 않았다.

 

1875년 - 1월, '안토나 니치 토바스'가 총리가 되었고, 지금의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는 영국식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제안하였는데, 엘니치 국왕은 안토나 총리의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하였다. 속설에는 국왕이 불쾌감을 대놓고 들어냈다고 한다. 

3월, 안토나 총리는 그라나, 벤타나, 모뷔뭰토, 노시아, 오이리 총 5개의 도시 경계를 확정하고 각각 개발계획을 수립하였다. 이후 스텔라 공화국과 회담을 가져 경제 발전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6월, 하빌리다드가 도시 개발 계획에 빠지자 원주민들과 이를 지지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안토나 총리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하빌리다드가 빠진 것이 아니라 하빌리다드의 인구가 제일 적고 애초에 도시가 아닌 하나의 원주민 거주 구역이었음으로 인근 그라나 개발계획에 포함된 것이었다. 안토나 총리는 하빌리다드를 그라나로부터 분리시킬 것을 고려하겠다고 했으나, 통일왕국당이 이를 반대했다.

11월, 경제적으로 위기가 계속되며 오이리일라산 제품의 경쟁력이 떨어졌고 수출량은 급감하였다. 안토나 총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율리시스 S. 그랜트 대통령을 예방하였고 경제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미국은 조선 통상 조약을 위해 신미양요를 진행 중에 있었다.) 그랜트 대통령은 오이리일라를 잘 알지 못했으므로 미국의 대사와 국무부 차관을 보내 국가 조사 및 경제 협력을 위한 논의를 할 것을 지시했다. 또한 안토나 총리는 그랜트 대통령에게 국왕 국서를 전달하였는데, 국서의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 오이리일라는 예로부터 포르투갈과 가까웠으나, 머나먼 이웃국가인 미합중국과도 인연이 닿아 수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께서는 오이리일라에 앞으로도 많은 관심을 바라주시며 우호를 다지기 위한 오이리일라의 화합적 노력에 화답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1876년 - 2월, 미국의 대사와 국무부 차관이 총리와 함께 귀국하였다. 안토나 총리는 미국 대사가 지낼 수 있도록 총리 공관 뒤의 작은 주택을 마련해주었는데, 이 주택은 후에 개조되어 미국 대사관으로 쓰이게 되었다. 미국 대사관은 다른 국가의 대사관보다는 작은 규모지만 전통적이며 관례적으로 계속 이용되오고 있다.

한편, 미국은 그란데오이리 섬을 둘러보면서 꽤 규모가 크고 인구도 크기에 비해 적당하며 아프리카 대륙과 가까이 있음에도 유럽에 온 것마냥 근대화된 이상적인 국가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올리브 나무가 가는 길마다 있어 올리브 나무의 나라 같다고 평했다.

 

1877년 - 2년동안의 논의를 거쳐 하빌리다드가 그라나로부터 분리됨이 옳다는 의견이 모였고 통일왕국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당은 하빌리다드를 그라나로부터 분리시키기로 했다. 엘니치 국왕은 이를 승인하였다.

한편, 재무 부분은 본래 국왕이 담당하였으나 왕실 유지금을 제외하고 모든 재무 행정을 의회에 넘기도록 하는 개헌안이 검토되었다.

 

1878년 - 미국이 오이리일라에 대해 경제 지원을 승인하면서 본격적으로 지원받은 재원을 바탕으로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다. 엘니치 국왕은 재원의 일부를 활용하여 오이리일라 국립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는 포르투갈 리스본 대학교 출신으로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이때 미국은 '오이리일라' 국호의 발음이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여 '올리브 나무의 나라'라고 평했던 대사의 말을 통해 '올리비아(라틴어로 '올리브 나무')라는 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미국의 외교 공문서에는 '오이리일라'를 기재하였지만 일부 혼용되어 '올리비아'가 기재된 공문서도 있었다. 이는 외교적으로 무례한 것이었지만 엘니치 국왕은 '에스파냐/스페인', '잉글랜드/브리튼' 처럼 국명이 여러 개일 수 있다고 생각하여 항의하지 않았다.

12월, 독립당이 다수당을 유지하면서 '안토나 니치 토바스'가 재선에 성공(5대 총리)하였다.

 

1879년 -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안토나 총리가 계속해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로써 개헌안은 급물살을 탔고 1년 8개월에 걸쳐 개헌안 논의가 계속되었다.

 

1880년 - 브라질이 '올리비안'이라는 국호를 사용한 외교문서를 전달하였다. 대사 상호파견의 내용이 담겼는데, 브라질은 사실 오이리일라 왕정을 인정하지 않았고 국호 또한 적대적인 의미로 공식 국호인 '오이리일라'를 사용하지 않고 다르게 보낸 것이었다. 특히 '올리비아'도 아니고 '올리비안'으로 보냈다는 것은 '올리브 나무의 나라'가 아니라 '올리브 나무의 사람들'로 깔본 의미가 담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국이 '올리비아' 국호를 사용한 적이 있었고, 브라질의 적대적 행위를 파악하지 못했던 엘니치 국왕과 안토나 총리는 이 국호가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고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4월, 엘니치 국왕은 브라질과의 수교 및 상호 대사 파견안을 승인하였다.

 

1881년 - 엘니치 국왕의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상황에서도 개헌안 논의가 막바지에 이르렀고, 재무를 포함해 외무 등 다양한 행정적 업무를 의회가 구성한 내각이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골자의 '1차 개헌안'이 국왕의 승인 아래 통과되었다. 이로써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 형식을 유지하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식 입헌군주제로 가는 개헌이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1882년 - 2월, 엘니치 국왕이 84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엘니치 하파시'는 초대 총리이자 초대 국왕으로써 눈을 감았고 왕위 계승을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또한 미국식 화폐개혁법이 이루어지면서 화폐 단위가 '이스쿠두'에서 '올리비안 달러'로 바뀌었고, 10 올리비안 달러 화폐권에 엘니치 하파시 초상화가 담겼다.

5월, 올리비안 달러가 통용되기 시작했는데, 미국 1달러가 당시 올리비안 15.2달러였다. 당시 화폐 단위는 '오이리일라 달러'였다.

12월, 경제 회복과 민심 안정 그리고 엘니치 국왕이 신임하였던 총리라는 이미지가 강하여 3선을 도전한 '안토나 니치 토바스'는 독립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6대 총리로써 3선에 성공하였다.

 

 

 

9.  1882년~ 1896년; 오이리일라 왕국 (리바이 하파시 시대)

 

1883년 - 1월, 준 살리카 법을 기초로 한 왕실법이 인정되어 엘니치 하파시의 아들 장자인 '리바이 하파시'가 즉위하였다. '라파엘 하파시'는 장자가 아니므로 왕위를 상속받지 못하게 되었다. 안토나 총리는 즉위 즉시 리바이 국왕을 예방하였고 총리직을 승인받았다.

2월, 안토나 총리를 기반으로 한 내각이 1881년에 통과된 개헌안을 토대로 최초로 수립되었다. 그전에는 엘니치 국왕의 건강 악화 문제와 왕실법 논의에 따라 개헌안의 실행이 늦춰졌고 왕실이 모든 행정적 업무를 담당하였으므로 내각의 주인은 국왕이었다. 내각의 기능이 의회로 이전되면서 총리가 행정, 입법기구의 수반이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내각에 대한 국왕의 입김이 강하였다.

6월, 영국과 포르투갈이 대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1884년 - 리바이 국왕이 환갑을 맞았다. 안토나 총리 또한 70대에 접어들었다.

카보베르데와 기니비사우는 전형적인 아프리카 국가 취급을 받았지만, 오이리일라 왕국은 포르투갈로부터 일찍이 근대화를 이루었고 혼혈인인 유럽계 올리비안인의 수와 포르투갈인 및 영국인의 수가 섬의 90% 이상을 차지하면서 유럽화한 국가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열강들은 그동안 오이리일라에 대한 주권 침해 또는 보호령화를 위한 외교적 압박을 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그리고 브라질은 호시탐탐 오이리일라를 노리고 있었다. 영국은 스텔라 공화국을 해산하고 지브롤터처럼 총독을 둘 것을 고려하였고, 브라질은 무력침략을 통해 스텔라 공화국이고 자시고 싹 다 자국의 영토로 편입할 것을 고려하였다. 영국과 브라질의 대사는 이해관계 충돌을 벌였고, 대사관의 위치 등 사소한 부분에서 경쟁하기도 했다.

 

1885년 - 오이리일라 무관학교가 설립되었다. 또한 항만이 확장되어 오이리 만은 모두 항만화되었다.

 

1886년 - 3월, 안토나 총리가 건강 악화로 4선을 포기하였다. 또한 3선 제한제 논의를 시작하였다. 리바이 국왕은 그에게 왕국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치하하며 황금을 수여하였다.

9월, 황금 광산이 발견되었다. 미국의 지질학자가 발견하였고, 미국은 황금 광산 개발권을 구매하고자 했지만, 리바이 국왕이 이를 거절하였다.
11월, 선거를 앞두고 안토나 총리가 사망하였다. 이로써 1개월동안 '에스밀다 크루스(독립당의 당수)'가 7대 총리가 되었고, 부총리는 '모르가니 앨레모아(에스밀다의 사촌이자 당시 벤타나 출신 의원)'가 되었다.

12월, 갑작스럽게 부총리가 된 모르가니였지만, 연설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순식간에 인기를 휩쓸었는데, 그는 올리비안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독립당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리일라로 이민 온 스페인계 포르투갈인이었다. 또한 독립당이 다시 한 번 다수당이 되며 에스밀다 총리를 꺾고 8대 총리로서 취임하였다.

 

1887년 - 리바이 국왕에 의해 총리직이 승인되었다. 그 즉시 3선 제한제에 대한 논의를 종결시켜버렸고, 외국의 문헌의 유입을 제한하고 검열하였다. 대신 오이리일라 신문사 및 자국 문학에 대한 대대적 투자를 실시했다. 이에 경제당, 평화당 등 야당에서 격렬히 반대했으나 억압하였다.

 

1888년 - 오이리일라 전기공사가 설립되었다. 최초로 수력 발전을 통한 전력 수급이 이루어졌고, 철도 계획 또한 수립되었다.

7월, 오이리시부터 메레니치시까지 연결하는 중앙철도 건설에 대한 예산안이 통과되었다.

12월, 왕실법이 개정되었다. 근위대가 창설되었지만, 근위대는 왕실 보호 뿐만 아니라 반국가세력 억압 목적도 있었다.

 

1889년 - 리바이 국왕의 하나 밖에 없는 딸인 '카타리나 하파시'가 프랑스에서 유학 중에 사망하였다. 이때부터 리바이 국왕은 폭력적으로 변하였지만, 더 이상 국정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한편, 프랑스는 이번 사고가 본국과 관련이 없음을 밝혔다. 대신 외교적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대사관 설치와 경제적 지원을 약속했다.

 

1890년 - 1월, '라파엘 하파시'의 아들인 '코스타 하파시(당시 9세)'가 왕실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왕세자가 되었다. 그러나 리바이 국왕은 코스타 하파시 왕자를 왕세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내각은 왕자의 왕위 상속에 문제가 없도록 라파엘 왕자와 힘을 합쳐 상속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때부터 어떠한 입헌군주국에도 없던 원활한 왕위 상속을 위한 의회의 기관이 운영되었다. 이는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만이 가지는 특징이 되었다.

3월, 오이리일라 무역공사가 설립되었고, 모뷔뭰토에 무역 전용 항구가 건설되었다. 이는 모뷔뭰토가 훗날 그란데오이리 섬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산업기지를 보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4월, 프랑스가 대사관을 설립하였는데, 프랑스 대사관만 다른 대사관과 다르게 그라나에 위치하게 되었다.

12월, 독립당은 여전히 다수당이 되었고, '모르가니 앨러모스'는 9대 총리로써 재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야당을 탄압하는 총리라는 인식이 강력하여 독립당 내부에서도 우려가 있었고, 통일왕국당은 아예 총리 신임안 투표에 보이콧했다.

 

1891년 - 의사당이 확장되었고, 근위대 시설이 완공되었다.

6월, 중앙철도 완공식이 열렸으며 최초로 기차가 섬 중앙부, 특히 스텔라 공화국까지 가로질러 운행하게 되었다. 철도역은 메레니치 행 기준 순서대로 '오이리', '아루', '가남', '아르앙', '그랑시아', '스텔라', '사살라', '헤빌스', '메레니치'이다. 그러나 스텔라 공화국이 철도를 통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우려 속에 지선 건설이 추진되었고, 이로 인해 벤타나 지선 건설안이 예산 편성 및 추진되었다.

 

1892년 - 영국식으로 군대가 개편되었다.

독립 30주년을 맞았으며, 30주년 축하파티로 30명의 오이리족 원주민 아이들이 왕세자와 총리를 중심에 두고 둥글게 원을 그려 횃불을 원의 중심 쪽으로 들어 빠르게 도는 오이리 족 전통의식인 '바로도르니카'를 했다. 이때 영국, 미국, 포르투갈, 브라질 등 여러 외교관들이 참석하였는데, 이는 오이리일라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기록되었다.

※ 바로도르니카: 오이리 족장의 안녕과 부족의 번영을 위해 부족의 대표인 족장을 중심에 두고 불을 쬐어 악적인 존재를 내쫓고 빛과 족장을 가르켜 천신이 바라봐주기를 비는 의식

 

1893년 - 1월, 대원수로 최초로 원주민 출신인 '미나미르 조유'가 임명되었다.

2월, 영미권에서 '오이리일라' 발음이 어려워 국호를 '올리비아'로 통일하기로 했다. 미국과 영국의 대사는 '올리비아' 국호 사용의 승인을 요청했고, 모르가니 총리는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국왕은 이를 보류하였다. 또한 의회에서는 국호에 대한 의견이 엇갈렸는데, 아래와 같다.

* '오이리일라' 국호유지 측(독립당 일부, 통일왕국당): "오이리 족의 이름 그 자체이며, 근본적, 전통적, 정통적이다. "

* '올리비아' 국호변경 측(독립당 일부, 경제당, 평화당 등): " '오이리일라'는 오이리어에 포르투갈어를 얹은 괴이한 국호에 불과하며, 또한 선왕이 지은 국호도 아닌 그저 포르투갈이 쓰던 명칭을 그대로 같다붙인 것이므로 근본, 전통, 정통을 논할 수 없다. "

그러나 웃긴 것은 영미권 국가에서는 요청은 해놓고 공적이나 사적이나 계속해서 '올리비아'와 '올리비안'을 혼용하여 왕국을 멋대로 통칭하고 있었다.

8월, 벤타나 지선이 완공되었고 후에 이 지선은 올리비안 광역도시전철 2호선의 일부가 된다.

 

1894년 - 2월, 미나미르 조유 대원수가 리바이 국왕으로부터 근위대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받았고, 이에 오이리일라 근위대장 및 수도수비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근위대장과 수도수비대장은 관례상 겸임하게 되었고, 육군 최고지도자인 대원수보다도 근위대장의 권위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5월, 리바이 국왕과 모르가니 총리가 독대하면서, 국호, 왕실법, 개헌안 등을 논의하였다. 비밀리에 독대하였고 통일왕국당 등 야권과 극한으로 대치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야당은 격렬히 항의했다.

6월, 쿠테타 논의를 했다는 의심에 통일왕국당 및 야당연합은 독립당에 반기를 들고 총리 사퇴를 촉구하였다. 리바이 국왕은 통일왕국당 해산령을 내렸으나 미나미르 조유 근위대장은 재고를 요청했다. 이에 리바이 국왕이 의사당에서 직접 야당을 달래며 겨우 파행을 막을 수 있었다.

7월, 미나미르 조유는 야당의 압력으로 결국 근위대장직을 사임했다. 이에 분노한 국왕이 의회강제해산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8월에 선거를 다시 치루어지기로 했다. 이때 미국은 의회민주주의의 위기를 겪은 오이리일라 왕국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8월, 선거가 불안 속에서 치루어졌지만 독립당이 다시 한번 다수당을 차지했고 모르가니 총리가 다시 한번 임기를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3선/10대 총리). 이는 총리의 능통한 연설 능력 덕도 있었지만 국왕의 신임을 받은 덕도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이로 인해 왕국통일당은 큰 타격을 입었고 분당하였는데, 각각 왕국제일당과 통일민주당으로 쪼개졌다. 반대로 평화당은 경제혁신당과 힘을 합쳐 경제평화당으로 합당하였다.

10월, 모르가니 총리가 개헌안을 꺼내들었고 이로써 상속위원회가 내각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12월, 모르가니 총리가 의회강제해산령으로 인해 어지러워진 정국을 타계하기 위해 야당과의 협치에 나섰다. 또한 선거일자를 12월 12일(12월 12일은 의사당 완공일자기도 하다.)로 법적으로 고정하면서 이때의 의원들은 임기가 4개월 이상 연장되었다. 물론 총리의 임기도 그만큼 연장되었다.

 

1895년 - 문화 융성을 위해 문화부가 설립되었다. 모르가니 내각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문학과 영상에 집중적으로 투자하였고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그러나 독립당의 업적을 과장하여 그린 부분이 있어 논란이 있었다.

한편, 스텔라 공화국이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편입당하려하자 미국과 오이리일라에 도움을 요청했으며 모르가니 총리는 스텔라 공화국의 3대 대통령인 윌리엄 포트를 예방하여 영국 대사를 초치하고 공동항의서를 만들어 대사관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영국과의 관계 훼손을 우려하여 합의하고도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10.  1896년~ 1898년; 오이리일라 왕국 (코스타 하파시 시대)

 

1896년 - 3월, 영국이 스텔라 공화국을 해산하기로 했고, 이에 따라 스텔라 공화국은 영국령 올리비아로, 대통령 직위도 총독 직위로 격하되었다. 또한 영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은 또한 포르투갈이 식민지를 강탈하였으므로 영국이 오이리 제도를 관할하여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포르투갈 왕국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월 - 리바이 국왕이 서거하였고 사인은 위궤양이었다. 이에 따라 코스타 하파시가 3대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당시 나이는 15세였으므로 오이리 족의 전통(관습법)에 따라 성인으로 간주되었기에 섭정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마터면 모르가니 총리가 섭정직을 수행할뻔 하였는데, 왕국의 헌법에 따르면 시민은 18세부터 성인으로 규정하지만 왕족은 관습법에 따르는 것을 야당이 반대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부왕인 라파엘 하파시는 건강 문제로 섭정직을 수행할 수 없었던 터였다.

5월, 미국 재무장관이 오이리일라 왕국을 방문해 즉위를 축하하였다. 이때 "God bless your people of Olivian kingdom."이라는 말을 꺼냈고, 다시 한번 국호에 대한 논쟁이 일었다. 또한 "Kingdom of Olivia"가 아닌 "Olivian Kingdom"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올리비아인의 왕국, 즉 왕국의 법이 민주주의를 기초로 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6월, 코스타 국왕은 왕국의 공식 국호를 2개로 두도록 했다. '오이리일라'와 '올리비안'이었다. 이때부터 올리비안이라는 국호는 영미권 국가와의 교역과 외교 등 공적과 사적으로 모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올리비아가 아닌 올리비안인 이유는 포르투갈과 브라질에서 '올리비안'을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11월, 왕궁이 확장하면서 근위대의 규모도 커졌고, 원주민을 우선적으로 선발하여 훈련하였다.

12월, 전화국이 완공되었다. 이로써 모든 도시에서 전화가 가능해졌다.

 

1897년 - 4월, 노시아 산이 분화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노시아 군(County)의 1100여명이 섬을 빠져나와 사살라 군으로 피신했다. 노시아 산의 분화로 약 1주일간 재가 섬 서부에 날렸다.

5월, 노시아 섬이 임시로 봉쇄되었다.

7월, 오이리-벤타나 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이때부터 벤타나는 포화된 수도의 인구와 기능을 분산하는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12월, 인구가 200만명을 넘어섰다.

 

 

 

11.  1898년~ 1912년; 올리비안 왕국 (코스타 하파시 시대)

 

1898년 - 3월, 노시아 섬의 봉쇄가 해제되었다. 

5월, 코스타 국왕과 모르가니 총리는 여러 차례 논의를 통해 국호 변경 및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의 개선을 골자로 하는 2차 개헌안 통과에 합의하였다. 야당은 개헌안 통과를 위해 의원의 2/3이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를 개헌안에 포함시킬 것을 제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 독립당 단독으로 의회가 개원하였고 2차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이로써 공식 국호는 '올리비안 하파시 왕국'이 되었고, '올리비아'와 '올리비안' 중에서 최종으로 올리비안이 채택되었다. 이는 미국의 재무장관의 발언의 영향 덕도 있었다. 또한 계엄령 등 비상상황에 따른 군대 소집 및 전쟁 수행 기능을 왕실에서 내각으로 이전하였다. 단, 근위대 및 수도수비대는 여전히 왕실의 권한 안에 있었다.

7월, 수도수비대가 수도방위사령부로 개명되었다. 또한 수도방위사령관으로 '미나미르 조유'에서 '가르시아 밀랑'으로 교체되었다.

10월, 올리비안 왕국이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을 옹호하는 외교적 발언을 하여 스페인은 통상 금지령을 내렸다.

12월, 파리 조약에 스페인의 통상 금지령은 올리비안에 부당하다고 하였고 이에 통상 금지령이 해제 조치되었다. 또한 선거가 열렸는데, 파리 조약에서 스페인을 상대로 외교적으로 성과를 보이면서 독립당이 다수당이 되었고 모르가니 총리가 다시 한 번 연임에 성공한다. 이로써 4선에 성공한 최초의 총리(11대 총리)가 되었다.

 

1899년 - 2월, 미국-필리핀 전쟁이 발발하자 올리비안 왕국은 바짝 긴장했다. 미국의 영향력이 강력히 작용하던 약소국의 입지였기 때문에 코스타 국왕은 미국-필리핀 전쟁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보임과 동시에 영국과 포르투갈에게 친선적인 입장을 보였다.

10월,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진 식민지 쟁탈전과 보어 전쟁에 대해 모르가니 총리가 영국의 제국주의적 행보를 비난하였다.

11월, 오이리 어, 포르투갈어 그리고 영어가 공용어로 지정되었다. 그전에는 영어가 공문서에 쓰이지 않았는데, 이로써 무려 3개 국어가 공용어로 지정된 당대에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1900년 - 1월, 영국의 철갑함이 그란데오이리 섬 주변 해역을 무단으로 측량하는 일이 벌어졌고, 올리비안 해군은 즉각 경고사격을 했다. 영국의 대사는 이 사태에 대해 사과했지만, 동시에 영국령 올리비안(2년 전에 올리비아에서 올리비안으로 개칭됨)에 그나마 남아있던 모든 자치권을 없애고 완전한 병합을 형식상 요청, 실질적으로 강요하였다.

2월, 영국은 올리비안 왕국에 최후통첩을 했다. 올리비안 왕국이 영국령 올리비안에 대해 간섭할 경우에 올리비안도 적국으로 간주하겠다는 일방적 통보를 했다. 코스타 국왕은 이에 영국에 1년의 시간을 달라고 답했고, 영국은 1년 안에 올리비안이 영국령 올리비안의 총독과의 비밀 회담으로 추진한 모든 협력 사항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5월, 파리에서 1900 파리 올림픽이 열렸으나 내외적으로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 참가하지 못했다. 대신 FC 올리비안이 창단되었다.

6월,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에서도 올리비안 왕국은 경제 성장률 부문에서 역대 최고치인 14.3%를 기록했다. 또한 이때부터 섬 전역에서 전기 이용이 가능해졌다.

9월, 모르가니 총리는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적 조언을 구했으나, 미국은 무시했다.

10월, 상하수도 시설이 모두 깔리면서 섬 전역에서 깨끗한 물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포르투갈에서 공화파 시위가 연일 일어나면서 전국에서 혼란이 일었다. 왕정 유지에 대한 불안감이 생긴 포르투갈의 카를루스 1세 국왕은 망명길을 마련하기로 하였고 가장 문화가 비슷하고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은 민족이 두루 살고 있는 올리비안을 점지하였다. 그리고 망명계획안을 극비에 붙여 올리비안 대사관에 발송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는 망명길을 면하였는데......

 

1901년 - 1월, 코스타 국왕이 포르투갈과의 왕실결혼을 추진하였다. 200년간 우정을 서로 쌓아온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굳건히 하여 외세를 견제하고자 함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포르투갈은 왕당파와 공화파 간 격렬한 대치가 이어지던 시기였고 섣불리 포르투갈은 왕실결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한편, 때가 된 영국은 올리비안 침공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되었는데, 정말 공교롭게도 빅토리아 여왕이 향년 8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로 인해 올리비안 침공 계획안은 무기한으로 연기되었다.

2월, 영국은 예정대로 주올리비안 대사관을 폐쇄하고 대사를 귀국시켰지만, 1년동안 새 왕의 즉위를 앞에 두고 침공안이 유보되면서 올리비안의 생명줄이 연장되었다.

3월, 미국은 영국이 침공할 줄 알고 주올리비안 미국 대사관에 철수 지시를 내렸지만, 5개월만에 다시 정상화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철수 지시에 올리비안 내 모든 외국 대사관이 일제히 철수하면서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고 사람들은 동요하였다. 이는 모르가니 총리가 사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4월, 모르가니 총리가 외교적 문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그럼에도 무려 15년동안 4선 총리직을 연임하면서 최장 임기 수행 총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모르가니 총리의 후임으로 '안토니아 마르코스'가 12대 총리로써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인기가 좋지 못했다.

8월, 미국은 대사관을 정상화하였고, 프랑스, 브라질 등 각국의 대사관이 잇따라 정상화되었다.

12월, 카를루스 1세가 올리비안 왕국 방문을 계획하였는데, 만약 실행되었다면 강대국의 군주(지도자)가 최초로 올리비안 왕국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자유 개혁당 결성과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의회의 분열이 지속되면서 국내에 남아 정사를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편, 독립당을 꺾고 통일왕국당이 다수당이 되었는데, 이때 야당이 적극적으로 통일왕국당을 밀어주며 독립당을 타도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 이후 최초로 독립당이 아닌 다른 당에서 총리를 배출할 수 있었고, 통일왕국당의 '카를로스 꼬레아'가 13대 총리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포르투갈의 왕의 이름도 카를로스였다.

 

1902년 - 1월, 통일왕국당은 영국과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친선해야 한다며 영국의 새로운 국왕 즉위식에 직접 참여하였고 에드워드 7세 국왕을 예방하였다. 카를로스 총리는 또한 영국에 가는 김에 프랑스와 포르투갈에 들러 각각 에밀 루베 대통령과 카를루스 1세 국왕을 각각 예방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포르투갈의 불안정한 국정 운영을 각각 대비적으로 바라보면서 올리비안 왕국이 외교적으로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한 '올리비안 외교백서'를 편찬함과 동시에 여야협치의 중요성을 연설하였다.

5월, 뒤늦게 에드워드 7세 국왕이 즉위식 참여에 대한 감사장을 전달하였다. 이로 인해 영국의 대사관이 다시 정상화되었고 영국과의 전쟁 위기는 일시적으로 해소되었다.

6월, 인구가 250만명을 넘어섰다. 포르투갈, 미국의 이민자들이 계속해서 유입되었고 합계출산율이 3.2명으로 최고를 기록했다.

12월, 내각이 개편되었는데, '국무부', '외무부', '법무부', '문화부', '상무부', '산업노동부', '농림축수산부', 총 7개의 부처가 되었다.

 

1903년 - 4월, 코스타 국왕의 장이 꼬이면서 사망할 뻔하였다.

7월, 포드의 탄생으로 카를로스 총리는 자동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도로망을 확충할 것을 지시했다.

8월, 영국의 올리비안 침공 위기가 다시 불거졌지만 영국의 티베트 침공으로 일단락되었다.

10월, 올리비안 정보원이 설립되었다.

 

1904년 - 1월, 올리비안의 식품회사인 길버트 식품 주식회사가 탄생하였다. 올리비안의 대기업 중 하나인 길버트 그룹의 시초였다.

2월, 올리비안 기상관측소가 개소하였다.

3월, 일본 제국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는 러일전쟁의 국제적 영향 때문이었다. 미국의 유대인 네트워크에 대해서도 인지하였다.

5월, FIFA가 설립되자 외교적으로 적극적이었던 카를로스 총리는 FC 올리비안을 내세우며 FIFA 가입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FIFA는 신청을 확인하고도 무려 2년동안 유보하다가 가입을 승인하였다. 영국의 입김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이 있을 뿐이었다.

6월,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해양사고에 미국 대사를 통해 위로금을 전달하였다.

7월, 미국의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왕국은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올리비안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무려 당시 국가 예산의 2배에 달하는올림픽 참가 예산과 홍보 예산이 책정되었는데, 러일 전쟁의 영향과 만국 박람회 공동 개최로 인한 올림픽 흥행 실패와 적은 국가의 참여로 올리비안은 막대한 손해만 입고 말았다. 또한 올리비안은 올림픽 내내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무관심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했으며 단일 팀으로서 출전하지 못하고 다국적 팀으로 묶이고 말았다.

12월, 경제성장률과 무역수지는 계속해서 순항하였지만 무리한 올림픽 참가로 재정은 파탄나고 말았다. 따라서 1905년 국가 예산이 기존의 2/3으로 줄었고 이로 인해 부처 몇 개가 아예 운영을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였다.

 

1905년 - 3월, 예산이 추가 편성되면서 겨우 문화부와 산업노동부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또한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재선을 축하하는 축사를 보냈으나 이마저도 묵살당했다.

5월, 코스타(당시 24세) 국왕이 모든 업무를 두 번째 남동생인 '페르난디트 하파시'에 맡기고 외국으로 나가 국제정세를 살피고 정치와 예술을 동시에 공부할 수 있을만한 곳으로 이탈리아 로마로 향했다. 이탈리아와는 수교하지 않았던 것도 이탈리아로 향하게 된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한편, 바로 밑의 남동생(첫 번째 남동생)이었던 '파타나샤 하파시'는 이를 질투하였고 결국 왕좌에 대한 권력욕을 키웠다.

8월, 올리비안 왕국에 최초로 자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9월, 올리비안 종합보건소가 개소하였다.

10월, 올리비안 주식거래소가 개소하였다.

12월, 통일왕국당과 독립당이 동일한 의석을 얻었으나, 통일왕국당에 대한 경제평화당을 제외한 모든 야당의 협조에 따라 겨우 카를로스 꼬레아 총리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었다(14대 총리).

 

1906년 - 2월, 영국령 올리비안의 9대 총독인 '윌리엄 스미스'가 추방당하였고, 주둔 영국군의 수가 늘어났다.

3월, 코스타 국왕이 이탈리아 로마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을 예방하였다. 그는 결혼을 추진하고자 했으나 적임자를 찾지 못했고 피에몬테로 향하였다. 대신 이탈리아 대사관 설치 및 올리비안산 공업품의 수입 허용 약속을 받아냈다.

4월, 미국이 레스타올바나 제도에서 가장 큰 섬인 올바나 섬에 대해 미 해군의 정박권을 요구하였고 올리비안 왕국은 이를 승인하였다.

7월, 은광 지대가 발견되었고, 미국은 채굴권 확보를 위해 로비를 시작했다.

11월, 올리비안 금광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미국은 그러나 금광주식회사의 51% 이상을 올리비안 왕국이 보유하는 것을 강제로 정하자 자유로운 주식 거래 보장권을 요구하며 항의하였다.

 

1907년 - 1월, 코스타 국왕이 피에몬테에서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잘츠부르크로 향하였다.

2월, 최초로 올리비안의 자연을 담은 사진들을 전시하는 사진 전시회가 열렸다. 이때부터 의회에서는 자연보호법이 추진되었다.

3월, 올리비안 국립대학교에 이어 두 번째 민간 대학교인 '그라나 종합대학'이 개교하였다.

5월, 길버트 식품이 포르투갈에 진출하였다.

8월, 자유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올리비안 왕정을 무너뜨리기 위한 점진적인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이 정보원에 발각되면서 카를로스 총리가 색출, 체포, 구금 및 강력 처벌 지시를 내렸다. 이때 잠시 공화당 및 혁명본부가 창당 및 설립되었으나 왕실의 강력한 탄압에 모조리 숙청당하였다. 이 사건을 공화당 사태라고 한다. 공화당 사태는 22일동안 진행되었는데, 무려 11,000여명이 넘는 군인들이 도시 간 이동을 통제하고 도시를 전면적으로 수색하여 공화당 또는 공화주의와 관련한 자들은 전부 잡아들였다. 정부는 부인하고 있지만 이들을 위한 강제수용소를 건설하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잡아들인 인원만 1,200여명으로 여기에는 영국인과 포르투갈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영국 대사관은 격렬히 항의하였으며 이 사실을 본국에 전했다.

9월, 코스타 국왕이 잘츠부르크에서 바이에른의 힐데가르트 폰 루트비히 공주를 만나게 되었고 바이에른에 대해 알게 되었다.

11월, 공화당 사태에 대해 영국이 대사관을 폐쇄하려하자 카를로스 총리는 영국인을 풀어주되 올리비안 왕국에서 본국으로 추방하되 안전히 갈 수 있도록 선박을 마련해주었다.

 

1908년 - 2월, 포르투갈 왕국 리스본에서 카를로스 1세와 왕실 일가족이 마차를 타고 행차하는 도중 총격 사건 발생으로 마누엘 제2왕자와 카를로스 왕대비를 제외하고 모두 사망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코스타 국왕은 서둘러 귀국길을 준비하면서 힐데가르트 바이에른 공주와 약혼하였다. 또한 그녀와 함께 가자고 제의했지만 거절하자 귀국길을 2개월 가량 늦추었다.

3월, 카를로스 총리는 카를로스 1세가 피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르투갈 대사를 통해 애도를 표했으며 이때 포르투갈 왕실의 올리비안 망명계획에 대해 전해듣게 되었다.

4월, 공화당 사태를 유발한 공화주의자들 122명(대표주동자인 '벨 아나스' 포함)에 대해 사형이 선고되었다. 힐데가르트 공주는 코스타 국왕과 바이에른 왕국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나 바이에른의 오톤 왕과 루트비히 3세 일가는 안면식도 없고 족보도 없는 괴이한 왕가와 결혼하였다며 힐데가르트 공주를 바이에른에서 추방하였다. 결혼식 또한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이에 충격먹은 코스타 국왕은 최초의 외국인이자 외국의 왕가 출신의 힐데가르트 폰 하파시 왕비를 데리고 제노바에서 귀국길을 선택하였다.

한편, 런던 올림픽이 진행되었으나 영국과의 악화된 관계와 동맹국 포르투갈에서 발생한 일말의 사고 등을 이유로 올림픽에 출전하지 않았다.

5월, 코스타 국왕은 올리비안 왕국으로부터 공화당 사태의 전말을 보고받았다. 또한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하여 마누엘 2세 국왕과 마리아 아멜리아 왕후를 예방하였다. 그는 진심으로 애도하였고 이때 최초로 올리비안 왕국으로의 포르투갈 왕가 망명 계획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마리아 아멜리아 왕후는 혁명이 발생할 때를 대비하여 영국 망명을 계획하였고, 올리비안 왕국에 대한 관심이 극히 적었다.

7월, 코스타 국왕이 4년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공화당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총리를 독대하였다.

10월, 코스타 국왕이 힐데가르트 왕비와 함께 오이리 시에서 행차하였다. 그는 행차 중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근위대를 총동원하였다(카를로스 1세처럼 피살당하고 싶지 않던 그였다.). 또한 국왕은 올리비안 예술대학, 올리비안 철도공사 등 공공시설을 확충하고 여러 방면으로 무역을 개선할 것을 내각에 촉구하였다.

 

1909년 - 2월, 경제평화당이 당헌을 개정하였다. 

4월, 포르투갈인의 노예가 올리비안을 탈출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수도에서는 노예 유입이 금지되었고, 이에 반발한 포르투갈인이 소원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친노예 성향 포르투갈인은 하빌리다드로 이동하였지만 이번에는 이곳에 집중하여 사는 원주민과의 불화 발생으로 노예제 금지 청원 운동이 일었다. 물론 헌법상 올리비안 왕국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입각하여 미국의 헌법을 바탕으로 노예제 금지를 못박았지만 외국인의 노예에 대해서는 용인하는 태도를 보여왔다.

5월, 힐데가르트 왕비가 출산하였고, 올리비안 왕족 중 최초로 독일식 이름이 지어졌다. '엠머 하파시' 공주 탄신을 축하하는 축제가 열렸다.

6월, 왕실은 축제 분위기였지만, 정작 내각에서는 비상이 걸렸다.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대통령이 당선되었는데 시오도어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친분에 집중하던 올리비안 왕국의 내각은 당연히 태프트 대통령과의 친분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태프트 대통령의 당선 이후 루즈벨트 전 대통령과의 사이가 급속도로 나빠졌고 설상가상 제국주의 성향의 상원 의원들에 의해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 태프트 대통령은 평화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올리비안 왕국을 두둔하던 포르투갈 왕국이 붕괴 위기에 놓이자 올리비안에 대한 야욕을 일부 의원들이 드러내면서 외교적으로 위기를 겪었다.

12월, 외교적 위기가 대두되면서 통일왕국당의 지지율이 감소하였고, 독립당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15대 총리로 포르투갈계 올리비안인인 '디오고 사모라'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의 인기는 대중적이지 못했고, 이는 재선 실패의 원인이 된다.

 

1910년 - 1월, 상속위원회는 코스타 국왕이 아들이 낳지 못하자 형제(남동생)인 '파타나샤 하파시'를 왕세자로 지목하였다. 준 살리카 법에 의해 여자도 왕위를 상속받을 수 있었으나 남자 상속자가 아예 없을 때의 이야기였다. 코스타 국왕이 디오고 총리직을 승인하였다.

2월, 코스타 국왕이 바이에른 왕국 방문을 희망하였지만 거절당하였다. 대신 포르투갈 왕국의 초청을 받았고 마누엘 2세의 생월인 11월에 방문키로 하였다.

3월, 디오고 총리가 국무부와 외무부를 통합하였다. 그러나 국무부를 모두 독립당 인사로 채우면서 내무와 외무 모두 독립당이 장악하였다. 이에 야당은 코스타 국왕에 청원하였고, 최초로 코스타 국왕이 내각에 개입하였는데 국왕이 일부 외무를 담당하는 입장에서 내각의 일방적인 통합은 왕실을 무시하는 모욕적 태도이나 처벌하고자 하지 않으니 외무부를 복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5월, 에드워드 7세 영국 국왕이 서거하였고, 형식상 애도문을 보내었다. 

8월, 몬테네그로 공국이 왕국으로 승격되자 이를 축하하는 서한을 보냈다. 동시에 바이에른 왕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또한 올리비안 예술대학에서 독일인 교수를 채용하여 극진히 우대하였다. 

10월, 코스타 국왕이 포르투갈 왕국으로의 채비를 마치고 출발하였으나 카보베르데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포르투갈의 왕정 붕괴 소식을 들었다. 포르투갈에서는 카네이션 혁명이 발생하였고 공화정이 들어섰다. 이에 급히 회항하여 올리비안으로 돌아갔다.

한편, 마누엘 2세와 마리아 아멜리아 왕비가 스페인으로 망명을 가던 중 습격을 받아 찢어졌으며 마누엘 2세는 급히 4명의 호위병만 데리고 추적을 피해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 올라탔다. 마누엘 2세는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당도했으며 영국으로 향하는 배를 찾던 도중 그곳에 장사하던 올리비안 향신료 상인들을 목격하고 올리비안 왕국을 기억해내었다. 그는 영국, 미국, 프랑스 등 각국의 대사관을 설치한 상태이면서 가장 문화가 비슷하고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은 민족이 두루 살고 있는 올리비안 왕국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영국으로 돌아가기를 그가 주저했던 이유는 영국이 포르투갈의 왕정 유지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도와주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1911년 - 2월, 마누엘 2세가 올리비안 왕국으로 건너와 망명을 요청하였다. 이에 코스타 국왕은 그에게 별궁 전체를 내어주며 지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마누엘 2세는 영국과 미국에 전보하여 그가 무사히 살아있음을 전했다.

4월, 미국의 신무기(M1911 자동권총)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에 이를 수입하여 경찰대에 보급할 수 있도록 예산을 편성했지만 정작 미국은 거절했다. 이에 올리비안 기업인 DH는 군수산업에 직접 뛰어들었고, 이는 (주)DH방위산업의 시작이었다. 

5월, 마누엘 2세(23)가 엠머 하파시 공주(3)를 매우 귀여워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누엘 2세는 오이리 시의 포르투갈인을 만나 이곳의 생활에 대해 물었고 대체로 만족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올리비안 왕국은 그러나 본국과 너무 멀었으므로 이곳을 왕정복고 운동의 근거지로 삼을 수는 없었고, 이에 친모가 있는 영국으로 건너갈 채비를 했다.

8월, 디오고 총리가 뇌물을 받았다는 의문의 제보가 공개되면서 파문이 일었다. 이를 1911 사태(폭동)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파급적이었냐면 독립당이 쪼개졌으며 디오고 총리 집권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의사당을 불태우려는 난동까지 벌어졌다.

9월, 의사당을 불태우려한 시민들을 잡아 경찰대에 넘겼지만 증거의 불충분으로 대부분 형무소 행을 피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왕국혁명당을 창당하였는데, '혁명'에 몸서리를 쳤던 코스타 국왕과 마누엘 2세는 창당 자체를 반역적 행위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군대가 직접 왕국혁명당사를 쳐들어가 해산 명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한 이들이 권총을 발사하여 소요사태가 벌어졌다.

10월, 마누엘 2세가 영국으로 출발하였다. 

11월, 코스타 국왕이 혈변 등의 건강 문제로 정기적으로 진행해오던 왕실 행사에 불참하였다. 이때 '파타나샤 하파시' 왕세자가 처음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는 훤칠한 키와 외모를 보유하였으며 대중적 인기가 컸다.

12월, 디오고 총리가 결국 사임하였다. 그런데 독립당이 분당하여 '독립당'과 '자유당'이 되었고 따라서 가장 의석이 많은 통일왕국당과 자유당이 연대하여 통일왕국당 당수인 '레오나르도 실바'가 16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총리가 새로 집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11 사태의 여파가 계속되어 국가가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또한 왕국혁명당 사건에 따라 공화파 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조금씩 얻으면서 커져갔다. 

 

 

 

12.  9.15 군사쿠테타 (1912년 ; 파타나샤 하파시 시대)

 

1912년 - 1월, 코스타 국왕이 의회를 해산할 것을 주문하려 했으나 갑작스러운 장 파열로 인해 끝내 사망했다. 그의 나이는 겨우 31세였고 따라서 암살당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파타나샤 하파시'는 암살설을 받아들였고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이때 상속위원회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졌고 국왕의 월권이 의심되었다.

2월, 4대 국왕으로 즉위한 '파타나샤 하파시'는 강력하고 안정된 왕국을 위해서는 왕권이 훨씬 막강해야 한다고 시민들에게 호소했으며 '하느님이 보우하는 왕권 아래 능통한 의회'를 국가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당연 의회는 이러한 전제군주적 발상에 헌법에 위반하며 의회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그런데 당시 군부는 왕실의 편을 들었는데, 상대적으로 권력이 없던 군부가 외교적으로 제국주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의회세력에 반항적이었기 때문이다.

4월, 근위대와 수도방위사령부는 파타나샤 국왕의 지휘 아래 쿠테타를 계획했고, 실행 일시는 9월로 결정되었다.

한편, 총리는 타이타닉 참사에 대해 영국에 애도를 표했다.

5월, 레오나르도 총리가 총리 중 최초로 영국령 올리비안을 방문하였다. 영국 대사관이 스텔리아(영국령 올리비안의 또다른 이름으로 불리었다.)로 옮겨졌는데 대사를 예방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었다.

6월, 마누엘 2세의 소식이 들려왔고, 영국이 조지 5세의 딸과의 혼인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자 영국과의 인연을 완전히 단절하고 독일로 건너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7월, 통일왕국당과 자유당이 합당하였고, 이로써 2/3의 의석을 차지, 따라서 3차 개헌안이 추진되었으나, 통과되지는 못하였다.

8월, 레오나르도 총리가 의회에서 최초로 1911 사태를 언급했고, 따라서 사태의 명칭이 '1911 사태'로 굳어졌다. 그러나 총리의 온건적 개혁과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의 우수성을 연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안 국립대학교와 지방병원들은 사태의 여파로 문을 수시로 닫았고 교수들과 의사들이 파업을 주기적으로 실시하였다. 또한 왕궁에서는 수상한 기류가 포착되었다.

9월, '9.15 군사쿠테타'가 발생한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는 올리비안으로 파견된 독일 장교였는데, 파타나샤 국왕의 신임을 받았고 수도방위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즉시 이전부터 국왕과 함께 계획하였던 쿠테타를 실행에 옮겼고 그 즉시 의회는 해산되었다. 또한 파타나샤 국왕의 칙서에 따라 계엄령 선포에 따른 충성법이 반포되었다. 국왕과 국왕의 충성스러운 군대에 충성하지 않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하겠다는 것이었다. 군부는 단숨에 국왕 바로 아래의 절대권력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 영국 등 대사관을 둔 열강들은 이에 반발했다. 그리고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훼손, 의회, 헌법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규정하고 미국은 올리비안 왕국을 압박해나갔고 영국은 이전부터 미루었던 전쟁의 시작을 예고하였다.

레오나르도 총리는 해임되지 않았지만 사실상 국왕의 꼭두각시로 전락했고 의원들 전원이 주택감금에 처해졌다.

10월, 전제군주제를 기초로 한 새로운 헌법이 쓰여졌다(3차 개헌). 이때 미국과 영국이 대사관 철수를 명령했다. 파타나샤 국왕은 탄약을 보충하고 방비를 철저히 하라고 지시했으며, 군부와 밀접한 독일을 통하여 무기와 전쟁 자금을 수급하였다.

11월, 영국령 올리비안과 올리비안 왕국 사이에 11.2km의 장벽이 세워졌다.

12월, 충성법에 따라 간접선거가 실시되었고, 군부에 의해 세워진 왕국신민당이 의석수 120석 전체를 차지하였고, 야당은 계속해서 존재하였으나 원외정당으로 전락해버렸고 사실상 일당제가 되었다. 간접선거의 실시에 대해 일부 진보주의적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 반발이 있었지만 군대를 동원해 진압하였다. 1911 사태가 정리되지 않았다면 내전이 일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운이 좋았다.

 

 

 

13. 2년 전쟁 (1913년 - 1914년 ; 파타나샤 하파시 시대)

 

1913년 - 1월, 영국의 아이언 듀크급 전함 2척이 오이리만에 등장했다. 올리비안군은 해안포로 경고 발포했으나 오히려 영국 전함은 오이리만을 폭격해 9명의 민간인이 사망하는 '오이리만 사건'이 발생한다. 영국의 올리비안 왕국 폭격에 파타나샤 국왕은 영국에 강력히 항의했고 국제사회에 영국의 부당함을 알렸으나 묵살당했다. 이후 영국은 포르투갈 정부와 외교적 갈등을 빚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리(올리비안) 제도가 영국령임을 골자로 하는 강제편입안을 의회에 통과시켰고 군사를 동원하여 오이리(올리비안) 제도를 침략한다. 이때 미국은 영국과 사전에 조율하여 올리비안의 이권을 챙기기로 하였다. 이는 미국 국무부장관과 영국 총리와의 회담에서 결정된 사안이었다.

 

+ 영국은 오이리(올리비안) 제도의 전략적, 교통적 이점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충분한 명분까지 보유하여 더더욱 갈구했다. 당시 영국의 총리인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는 오이리 제도에 대해 "영국의 전성기를 10년 앞당길 땅"으로 표현하고 의회에 오이리 제도의 무력편입을 강력히 설득했다. 영국령 올리비안에 더하여 제도 전역을 차지하였을 경우 대서양의 재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아프리카 식민지의 효율적인 관리가 가능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올리비안 왕국은 당시 군부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고 무기를 최대로 적재해두고 있었다. 외세의 침략은 1901년부터 코스피 국왕과 의회로부터 예고되었다. 이를 대비하고 있던 것은 당연했다. 영국은 오이리 만을 군함을 통해 사전 측량했고 오이리 만을 통해 상륙하고자 했다.

 

2월, 파타나샤 국왕이 직계 왕족만이 왕위를 상속받을 수 있음을 천명하였다.

3월, 파타나샤 국왕이 오이리만 사건을 일으킨 것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인 추방령 및 재산 몰수령을 내렸다. 한편,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취임을 축하하며 외무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하였지만, 정작 워싱턴 D.C.에는 발도 못 붙이고 뉴욕 시장만 만나고 귀국하여 모욕당했다.

5월, 경제가 역성장하기 시작했다. 모든 외국의 투자자들은 올리비안에서 철수하기로 하였고, 올리비안 기업 또한 부랴부랴 본사를 포르투갈 또는 스페인으로 이전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남은 기업은 DH였는데, 이 때문에 국왕으로부터 헌신적인 지원을 받았고 단숨에 몸을 불릴 수 있었다.

7월, 중앙철도의 전 구간 운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대신 가남-오이리 구간은 정상 운영되었다. 영국령 올리비안으로 더 이상 어떠한 올리비안인도 통행할 수 없게 되었다.

8월, 파타나샤 국왕이 영국식 군대를 미국식 군대로 개편하기 위한 군제개혁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이때 군부의 중심 세력이었던 독일 장교들이 독일식 군제를 제안했지만 독일 장교들의 힘이 커질 것을 우려한 국왕은 거절하였다.

9월, 파타나샤 국왕이 국호를 '올리비안'에서 '오이리일라'로 변경 공포하였다. 영미권 국가에서 사용되어오던 국호를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는 취지였으나 올리비안의 많은 시민들은 이미 국호에 익숙해진 터였다. 또한 왕국신민당에 의해 4차 개헌이 추진되었는데, 내용은 '신앙의 자유 폐지와 대법원 철폐'였다. 즉 전제군주제에 더불어 완전한 보수 제국주의적 국가로 변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10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의 대사관이 철수하였다. 영국으로 가는 유일한 항로가 끊어졌고 이제 전쟁은 불가피해보였다. 또한 10월 30일, 영국은 선전포고문을 올리비안 왕국에 영국령 올리비안의 주올리비안 영국 대사를 통해 전달하였다. 미국, 포르투갈, 프랑스 등 올리비안 왕국에 이해관계가 있는 나라들이 일제히 중립을 선언하였다. 또한 대다수의 포르투갈인 및 극소수의 외국인들은 카보베르데로 피난갔다.

 

11월, 영국은 8000여명의 군사들과 군함 4척을 끌고 오이리 만에 들어섰다. 최초로 올리비안 해군과 영국 해군 간 해전이 발생했는데, 올리비안의 작은 해안경비정과 몇 척의 구축함으로 영국 해군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영국군은 1시간 만의 해전 끝에 성공적으로 오이리 만에 상륙했다. 오이리 만의 해안포는 포격으로 박살났고 영국의 군함들은 왕국을 해안봉쇄하여 스스로 항복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파타나샤 국왕은 영국군에 결코 굴하지 않았고 시민들은 국왕에 대한 지지도가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렬하게 저항했다. 상륙한 영국군은 12월에 모뷔뭰토시와 수도인 오이리시를 점령했으나 수차례 게릴라 전투의 발생으로 수많은 영국군이 부상을 당하거나 전사했으며 결과적으로 식량지대를 점령하지 못해 본국으로부터 식량지원이 올때까지 군사들이 굶는 처지에 놓여 8천명의 군사들중 5천여명이 전투를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1914년 - 1월, 영국군은 증원계획을 세워 1만2천여명으로 수를 늘림과 동시에 메레니치 시를 장악하고 남아있는 벤타나 시, 하빌리다드 군, 그라나 군, 레스타 올바나 군 등 올리비안 군부가 장악한 지역에 대해 포격을 지속하였다. 또한 수도를 무력으로 7개월 이상 점령, 식민지화하는 계획을 세워 실제 실행에 옮겼으나 본국과 너무 멀고 해적의 잦은 출몰로 지원로가 매번 끊기는 일이 발생했다.

2월, 벤타나 시에 진입하기 위해 2,700여명의 영국군이 싸웠지만 이때 '가르시아 밀랑'의 후계자 격이었던 '아폰소 산투스 주니어'가 1,900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시가전에서 승전하였다. 이후 영국군이 계속해서 벤타나 시 진입에 애를 썼지만 언덕 능선을 따라 파놓은 1인 참호에 기관총을 숨겨놓고 영국군에 타격을 주면서 벤타나 시는 커녕 메레니치 시 동부 지역까지 빼앗길 뻔하였다.

4월, 레스타 올바나 제도를 지켜내지 못했고 영국군의 상륙이 허용되었다. 이때 그라나 군에 숨어있던 왕실은 벤타나 시의 '아폰소 산투스 주니어' 장군의 활약을 믿고 벤타나 시를 임시 수도로 지정하고 옮겨갔다.

5월, 오이리 시에서 영국의 대사가 "조지 5세 폐하께서 올리비안 제도의 왕으로 즉위하시었다."고 발표하였지만, 정작 파타나샤 국왕이 버젓이 버티고 있었다. 또한 영국군은 군사 증원 및 아예 섬 남부에 집중 포격하여 불바다로 만드는 일명 초토화 작전을 계획하였다.

6월, 영국의 의회가 초토화 작전을 승인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이 되는 사라예보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영국은 증원된 초토화 목적 부대 및 함대의 출격을 일시 중단시켰고 올리비안에 대한 모든 군사작전이 중단되었다.

7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 왕국에 선전포고하고 독일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에 잇따라 선전포고하면서 영국은 올리비안에 대한 작전을 완전히 중단했다. 이때 마지막으로 벌어진 벤타나 철수중인 영국군과 압박해가는 올리비안군 간의 전투인 '1천 전투(1,042명의 정예군이 철수중인 영국군을 추격하여 무찔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8월, 영국군은 8월 18일, 올리비안 왕국에 평화조약 채결을 요구했고, 파타나샤 국왕은 이를 승인하였다. 여기에는 영국령 올리비안의 경계 확정(면적이 12% 더욱 커졌다) 및 영국과의 관계 정상화, 올리비안 왕국 승인, 상호불가침조약, 영국령 올리비안 내 영국군 주둔 금지 등의 내용이 담겼다. 파타나샤 국왕은 이를 승리로 규정하며 자축했으나 수도부가 영국군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고 영국군이 철수하면서 오이리 항만을 완전히 파괴하는 등 경제적 손실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며 의도했든 안했든 전쟁을 가져온 국왕은 정치적으로도 외면당했다.

한편,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파타나샤 국왕은 성 비오 10세 교황이 서거하자 눈물을 흘리며 로마로 가서 시성식(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보존하는 의식)을 보겠다고 하였지만 근위대가 이를 말렸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정작 시성식은 없었다.

10월, 4차 개헌이 강제로 통과되었고, 이로써 가톨릭교가 국교로 지정되었다. 또한 대법원이 철폐되고 왕국신민당 외 모든 정당은 불법 정당으로 규정되었다. 다만 군제의 개편으로 효율이 개선되었고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개편하되 청년을 대상으로 기초 군사 교육이 의무화되었다. 마지막으로 국군이 방위군으로 명칭이 바뀌고 방위군이 상비군과 지원군(사실상 예비군)으로 나뉘어졌다. 이때 상비군 총사령관으로 큰 공을 세운 '아폰소 산투스 주니어'가 임명되었다.

한편, 4차 개헌에 따라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이 완전 박살난 왕국의 실정에 대해 파타나샤 국왕의 폭정을 비판하고 혁명을 준비하는 '반왕정국가혁명단'이 조직되었다. 이때 좌초된 야당 정치인들 중 일부가 이를 지지, 후원하였고 대중의 지지를 조금씩 얻어가며 세력을 키워나갔다.

12월, 영국령 올리비안에 남아있던 모든 영국군이 철수하였고, 군부는 지금이 영국령 올리비안에 대해 무력편입할 기회라고 국왕을 부추겼지만, 파타나샤 국왕은 오이리일라 왕국이 신임받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여 거절했다.
 

 

 

14. 1915년; 파타나샤 하파시 시대

 

1915년 - 1월, 갈리폴리 전투에서 영국군이 참패를 거두자 파타나샤 국왕은 영국령 올리비안 상공을 향해 축포를 터트리도록 지시했다.

한편, 수도와 벤타나 시가 우선적으로 복구되면서 모뷔뭰토 시의 인구가 벤타나 시로 급격히 옮겨갔고 제2의 도시의 타이틀 또한 벤타나 시로 옮겨갔다.

2월, 인구가 2백 2십만명으로 집계되었다. 약 28만명이 제도를 빠져나갔고 6만여명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는데, 피난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4월, 근위대가 근위부와 경찰부로 승격됨과 동시에 분리되었다. 또한 정보원이 정보부로 승격되었는데 이때 경찰부와 정보부의 기능이 겹치면서 혼란이 빚어졌다.

5월, 이탈리아 왕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이탈리아를 흠모하던 파타나샤 국왕은 이참에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자 했는데, 이때 영국과 척을 지다가 갑자기 손을 잡는 올리비안의 몰골을 볼 수 없다고 하여 군부가 뜯어말렸다.

7월, '반왕정국가혁명단'의 존재가 알려져 거주지로부터 2km 반경 밖 통행금지령이 내려졌고 대대적으로 수색에 나섰지만 주동자 및 관련자는 발견하지 못했다.

8월, 반왕정국가혁명단이 승전기념식 1주년에 참석하는 파타나샤 국왕에 대해 암살 계획을 세웠으나 연락원이 응답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한편, 파타나샤 국왕은 오이리 시에서 벤타나 시까지 행차하여 승전 기념식을 열었는데,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많은 예산이 사용되었으며 승전 기념식 하나로 경제적으로 더욱 왕국은 궁핍해졌다.

9월, 엠머 하파시가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왕립 학교의 입학을 거부당했다. 파타나샤 국왕은 직계 왕족만 입학할 수 있다고 하여 그녀를 오이리 신민학교(현 오이리 국립초등학교)로 보냈다. 따라서 최초로 평민과 함께 학교를 다닌 왕족이 되었다.

11월, 반왕정국가혁명단이 미국으로부터 지원받기 시작했으며, 공화제와 민주주의를 기초로 한 임시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 세력과 보수주의 세력 간 갈등으로 완전히 통일된 방향을 가지지는 못했다.

12월, 마뮤트 국립묘지가 올리비안 국립 현충원으로 확장되었고 왕족은 새로 건립한 아틀란타궁 지하로 이장되었다.

또한, 파타나샤 국왕은 자신의 칭호를 직접 써 반포하였는데 그의 칭호는 아래와 같다.

" 올리비안 왕국의 수호자이자 오이리 족의 선구자이자 아틀란티스의 후예자이자 포르투갈의 보호자이신 파타나샤 대왕 폐하 "

 

 

 

15. 행진 혁명 (1916년)

 

1916년 - 1월, 파타나샤 국왕이 신년을 맞이하여 금화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러나 정작 식량이 부족하여 아사자가 속출했으며 이 시기를 '굶주린 겨울'이라고 불렀다.

2월, 마침내 가장 복구가 늦은 메레니치 시에서 시민들이 봉기하기 시작했다. 파타나샤 국왕은 이들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으나 벤타나 시의 군대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또한 '아폰소 산투스 주니어' 상비군 총사령관은 근위대의 진입을 저지하고 국왕께 진압 명령을 재고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그러나 파타나샤 국왕은 이를 반역이라고 규정하고 그의 공적을 고려하여 직위를 해제하되 처벌하지는 않았다.

3월, 메레니치 봉기에서 4천여명의 시민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으며 여기에는 무고한 포르투갈인도 있었기에 포르투갈이 복구 지원을 중단하고 단교하였다.

4월, 파타나샤 국왕이 부활절 봉기를 일으킨 아일랜드를 응원하였고, 영국은 국왕에 대해 원색적인 비난을 담은 문구를 인쇄하여 전역에 뿌려 대응하였다.

5월, 메레니치 시의 나미차 거리에서 군부의 무력 진압으로 40여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중 절반이 6살 이하 어린이들이었다. 이에 분노한 메레니치 시민들은 경찰대를 습격하여 무기를 챙기고 반군을 조직하였다. 반왕정국가혁명단은 메레니치 시에서 '혁명5조'를 외쳤다. 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파타나샤 하파시는 스스로 하야할 것

2. 4차 개헌안을 무효화할 것

3. 공화정을 왕국신민당은 수용할 것

4. 민주헌법에 기초하여 보통선거를 실시할 것

5. 군부는 정계로부터 분리할 것

6월, 벤타나 시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반군에 가담, 군부에 대항하였다. 아폰소 산투스 주니어는 국왕 알현 중에 왕정의 붕괴를 염려하므로 스스로 하야할 것을 청원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참수당했고, 이 사실이 뒷소문을 통해 시민들에게 알려지자 도시의 대부분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왕궁으로의 행진에 동참했다. 20만여명이 참여한 '행진 혁명'이 끝내 발생하였다.

6월 말, 수도방위군이 시민들을 향해 사격하여 행진을 막으려 했으나 혁명은 더욱 열정적으로 변하였다.

7월 22일, 파타나샤 국왕이 '그레이트 엘비스'에 의해 피살당했다. 이로써 혁명은 끝났으며 반왕정국가혁명단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직후 공화파와 왕당파 간 내전이 발발('1개월 내전(한 달만에 끝난 내전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하였다.

7월 23일, 이 틈에 군부 중심 인물이자 친파타나샤 세력이었던 '파울 뮐러'는 쿠테타를 시도했지만, 독일인 장군에 의한 쿠테타는 지지를 얻지 못했고, 수도 장악을 시도했지만 그마저도 벤타나의 아폰소 산하 부대 중 하나였던 '제29사단'이 8월 2일, 파울 뮐러를 체포하면서 무산되었다. 

8월 3일, 파울 뮐러는 군법에 의해 처형당했다.

8월 5일, 공화파와 왕당파 간 내전 중에 근위대와 왕당파가 보호하던 왕족 중 힐데가르트 대비는 마누엘 2세에 전보를 보내어 즉시 올리비안 왕국으로 와주실 것을 요청했다. 포르투갈인과 포르투갈계 올리비안인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었다. 또한 부랴부랴 왕위 계승자를 결정하였는데, 파타나샤 하파시의 직계 가족을 제외해 '페르난디트 하파시'(코스타 선왕의 두 번째 남동생)를 지목하고자 했으나 힐데가르트 대비가 만류하였고, 결국 코스타 선왕의 막내 동생인 '알고레이 하파시(당시 29세)'에게 즉위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승낙했으며 그에게는 자녀가 없으므로 따라서 코스타 선왕과 힐데가르트 대비의 딸인 '엠마 하파시'를 왕세녀로 책봉하였다.

8월 12일, 잠시 승기를 쥔 공화파가 수도의 오이리 시청을 점령하고 올리비안 제2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세게르 고메스'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8월 14일, 파타나샤 국왕의 장례식이 생략되었고 유해는 왕궁 대신 독실한 가톨릭 신자임을 고려하여 그라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가 피살당했을 때의 나이는 고작 33세였다.

8월 18일, 왕당파가 오이리 시청을 공격하여 탈환하였고 세게르 대통령에 총격을 가하여 중상을 입혔다. 따라서 그의 아들이자 정치적 후원자였던 '크리스티아누 고메스'가 2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는데 이는 공화파가 분열되는 결정적 계기를 한다.

8월 25일, 공화파 내에서 "부자세습 공화정으로 고메스 집안이 이 나라를 다 헤쳐먹을 심보라면 차라리 왕정을 하라"는 구호가 연일 일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 게이트(세게르 대통령이 공화국을 인정받기 위해 영국 대사에 뇌물을 주었다는 의혹)가 터지자 공화파는 자멸하였다. 왕당파는 내전의 종료를 알림과 동시에 입헌군주제를 기초로 하는 헌법 제정을 서둘렀다.

8월 26일, 왕당파 4인이었던 '호드리구 코스타', '파비우 호날두', '조르즈 마르코스', '조안 페레로'는 왕궁으로 이동하여 힐데가르트 대비와 회담을 가졌고, 다음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4인은 총리, 장관 등 요직을 맡아 약 반 세기 동안 국정을 주도하였다.

1. 올리비안 왕국은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단원제 정부를 수립할 것

2. 국교를 폐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보장할 것

3. 상속위원회를 복원할 것

4. 방위군을 국방군으로 개편하고 이를 내각의 국방부가 관할할 것

5. 근위대와 수도방위군의 규모를 축소하고 국방군과 수평적 체계를 가질 것

9월, 올리비안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파타나샤 국왕 피살 사태와 아폰소 산투스 주니어의 죽음 그리고 1개월 내전 사태의 경과 등을 조사하였다.

한편, 왕국신민당이 완전히 해산되었고 군부 세력은 와해되었다.

10월, 미국이 대사관을 가장 먼저 복구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개선되었다.

11월, 마누엘 2세가 올리비안 왕국에 도착하였다. 그는 힐데가르트 대비를 만나 근황을 이야기하였고 올리비안 내 포르투갈인들을 만났으며 간이의료시설을 위한 자금을 전달하였다.

12월, 올리비안 민주헌법(5차 개헌)이 제정되었다. 힐데가르트 대비가 섭정 자격으로 이를 반포하였고 12월에 선거를 실시하던 관례에 따라 즉시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개혁당의 '샤드리아 베니츠 엘랑(혼혈인이자 법조인)'이 17대 총리로써 선출되었다. 시민당, 독립당, 경제평화당, 올리바민주당이 각각 창당되었거나 계승되었다.

 

+ 파타나샤 국왕 피살 사태에 대한 논란이 있다.

당시 그를 죽이려던 수많은 혁명 세력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하필 피살 사태 당시 이들 중 주력자들이 상당수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메리 왓슨(Merry Watson)'(영국인)이었다. 영국이 올리비안 왕국을 흡수하는데 실패하자 국가적 자존심을 크게 훼손당한 영국의 정보원(그러나 영국은 이를 부인하였다.)이었던 메리 왓슨이 그를 죽이고 영국령 올리비안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려다가 붙잡혔다는 이야기인데, 이는 지어낸 이야기라며 현재까지도 논란이 분분하다.

특별조사위원회에서 지목된 피살자는 '그레이드 엘반', 오이리 국립대학의 평범한 학생이었다. 실제로 그의 노트에서 피살 계획이 적혀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이를 근거로 이같이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파타나샤 국왕의 살인자가 메리 왓슨으로 오판된 것일까? 직후 즉위한 알고레이 국왕은 메리 왓슨이 범인이라고 직접 밝혔는데, 특별조사위원회에서는 알고레이 국왕은 왕족이었지만 파타나샤 국왕을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친파타나샤 세력이기 때문에 시민이 죽인 것이 아니라 영국인으로 바꿔치기 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의 안위가 걱정되었던 알고레이 국왕이 일반시민이 살해했다고 발표하면 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고 민중들이 왕정을 무너트릴 것을 염려하여 영국을 교묘하게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고 보여진다고 했다. 실제로 알고레이 국왕의 시종관이었던 '모토나 엘레모아'는 그가 민중을 두려워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러나 이를 증명할 다른 근거는 전무한 상태고 결국 여태까지 논란으로 남는다.

 

 

 

16. 1917년~ 1924년; 알고레이 하파시 시대

 

1917년 - 1월, 알고레이 하파시(당시 31세)가 5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인 마누엘 2세, 미국의 대사가 즉위식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정 운영에 관심이 없었고 지식도 적었으므로 대부분 힐데가르트 대비가 대신 도맡았다. 마누엘 2세는 잠시 올리비안 왕국에 머물면서 포르투갈인의 삶을 보살피겠다 하였다.

샤드리아 베니츠 엘랑 제17대 올리비안 총리는 경제개발계획과 경제원조를 위한 외교적 관계 재정립을 추진하여 경제 성장 동력을 복원하는 것을 국정 우선 과제로 선택하였다.

2월, 힐데가르트 대비(35세)의 제안에 따라 마누엘 2세(28세)가 엠마 하파시(8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5월, 샤드리아 총리가 미국을 방문하였고, 미국에 금광 채굴권 및 철도 부설권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파격적인 경제 지원 및 우방 조약을 승인받았다. 이로써 미국과 올리비안 간 상호방위조약이 채결되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미국, 올리비안, 남아프리카 간 중개무역권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또한 광업을 총괄하는 자원개발부가 새로 신설되었다.

8월, 모뷔뭰토 산업철도 착공식을 가졌다. 모뷔뭰토 산업항과 산업기지를 수도와 연결하기 위함이었다.

11월, 경제성장률이 다시 정상 궤도에 올랐다.

12월, 그라나 군의 인구 증가로 그라나 군이 시로 승격되었다. 또한 주 제도가 도입되어 몰레바 주, 레스타 올바나 주, 사살라 주, 오이리 수도부, 4주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로써 섬의 북부와 남부 그리고 동부가 완전히 구분되었고 관리에 대해 효율성이 개선되었다.

 

1918년 - 1월, 영국이 대사관을 오이리 시로 이전, 개관하였다.

2월, 경제평화당의 뜻을 받아들여 법인세율과 관세가 하향 조정되었다. 그러나 외국을 대상으로 하는 세금은 50% 덜 하향 조정되어 외국 기업인들의 불만을 샀다. 다만 이에 대해서 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항의한 적은 없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인세율이 미국보다 2% 낮은 수준인 11.5%였다.

5월, 근위대 창설 30주년을 맞아 알고레이 국왕의 생일에 맞추어 행사를 가졌다.

8월, 마누엘 2세가 힐데가르트 대비의 조언에 따라 바이에른에 전보를 보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경과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빌헬름 2세와 루트비히 3세가 포르투갈 왕정 복고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힐데가르트 대비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당연히 독일은 전보를 무시하였다. 내 코가 석자였기 때문이었다.

9월, 몰레바 섬(당시 무인도)의 몰레바 화산이 분화하였다. 분화의 정도가 커서 유럽으로 향하는 항로 길목에 재구름이 발생하여 한동안 선박이 운행하지 못하였다.

10월, 공군이 창설되었다. 그러나 본래 목적은 기상 및 해안 탐사였다.

11월, 독일의 항복 및 빌헬름 2세의 퇴위 소식을 들은 마누엘 2세는 충격받았고 더 이상 아무도 포르투갈 왕정의 복고를 도울 수 없겠다 판단한 그는 올리비안 경제 복구 및 이곳 그리고 포르투갈 주아프리카 식민지의 포르투갈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민생 살피기에 주력하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올리비안 왕국의 마누엘 2세 활동 보장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였지만 묵살되었다. 이때부터 잠시동안 포르투갈과 적대적 관계에 놓였다.

 

1919년 - 대영제국이 식민지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와중에 영국령 올리비안과 올리비안 왕국 간 통합 논의가 급속도로 물살을 탔다. 알고레이 국왕은 샤드리아 총리를 통해 미국이 이 문제에 대해 도움을 줄 경우 미군의 자유로운 주둔과 영국이 현재 사용하는 사살라 항만에 대해 100년 무상임대 약속 뜻을 미국 대사에 전달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와 뉴 프리덤 주의를 주장하며 올리비안 왕국의 자유무역국가화를 추가 조건으로 내세우고 영국과 긴밀히 협의하여 영국령 올리비안의 완전한 통합을 지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5월, 미국의 재무장관이 올리비안 왕국을 방문하였다. 미국-올리비안 관계가 증진되었다.

6월, 경제가 완전히 복구되었음을 샤드리아 총리가 선언하였고 이듬해 개혁당의 지지율은 역대 최고치인 81%를 기록했다.

8월, 포르투갈 정부가 마누엘 2세의 지원을 멈추라고 경고했으나 올리비안 왕국은 무시했고 포르투갈은 주포르투갈 올리비안 대사를 추방하는 초강수를 두었다. 그러자 샤드리아 총리는 주올리비안 포르투갈 대사를 추방하여 똑같이 대응하였다.

10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되자 알고레이 국왕이 미국 대통령을 직접 만나고자 미국으로 향했다.

11월, 뉴욕에서 미국-올리비안 정상회담이 열렸으며, 미국의 수많은 기업들이 올리비안 왕국에 진출하고 양국 간 문화 교류를 위한 문화교류원 설치, 그리고 미국 교수를 초빙하여 올리비안 교육과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12월, 윌슨 대통령의 제의에 따라 올리비안 왕국은 국제연맹에 가입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가입 비준이 늦어지면서 창립 회원국에 포함되지는 않았다.

 

1920년 - 1월, PF 운수산업주식회사가 출범하였다.

2월, 모토나 엘레모아(알고레이 국왕의 아내의 동생이자 시종관)에 의해 올리비안 국립보건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보건대학은 훗날 올리비안 국립대학교와 합쳐져 올리비안의 보건에 큰 공을 세운다. 

4월, 샤드리아 총리가 관광국가화를 위한 본토 개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의회는 올리비안의 난개발을 우려하였으나 개혁당과 경제평화당의 연대로 거액의 예산안을 통과시켰다.

5월, 올리비안 비행장이 착공되었고, 이 비행장은 '그란데오이리 호 사태' 이후 공군사관학교로 탈바꿈한다. 비행장의 목적은 관광 및 여객이었는데 불행히도 개장 바로 다음 해에 발생한 산불로 대기중이던 비행선이 폭발, 이후 버려졌다.

7월, 올리비안 왕국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였고, 이를 위해 샤드리아 총리가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및 '조지 5세'를 만났다. 이때 영국-올리비안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큰 성과는 없었지만 이의 영향으로 현대 복지국가의 청사진이 제시되었고 최저임금제 등 노동 환경 개선을 위한 입법 논의와 내각 개편이 이루어졌다.

8월, 올리비안 왕국이 벨기에 주최 1920 안트베르펜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였고, 이때부터 유럽의 국가들은 올리비안 왕국에 대한 인지 및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별도의 홍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리비안 왕국의 국제연맹 가입과 영국-올리비안 정상회담의 보도 이후에 올리비안 왕국이 '아프리카의 유럽', '대서양의 진주', '영국을 이겨낸 유일한 아프리카 국가', '대서양의 마지막 낙원' 등으로 각국에 소개되며 샤드리아 총리의 관광국가화 계획과 맞물려 최고의 시너지를 발휘하였다.

9월, 올리비안 왕국이 수영 부문에서 동메달을 차지하였고 최초의 메달 획득이었다. '이얀 에드리아'는 올리비안 스포츠의 영웅으로 기록되었다.

11월, 샤드리아 총리가 스포츠 인재 육성을 위해 올리비안 국립체육학교 건립을 주도했으며 대경기장 건설 또한 추진했다.

12월, 마누엘 2세가 모잠비크의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피살당할 뻔하였다. 그는 가장 가까운 영국령 이집트에서 잠시 체류하였다.

한편, 경제 복구와 대대적인 발전으로 인기를 얻은 샤드리아 총리는 18대 총리 재선에 성공하였다.

 

1921년 - 1월, 알고레이 국왕이 샤드리아 총리직을 승인하였고, 신년사에서 총리에게 더 많은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시민들은 올리비안식 입헌군주제의 시대가 끝나고 총리의 권한이 국왕의 권한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와 우려가 한 번에 터져나왔다. 그러나 힐데가르트 대비는 "진정 그 말씀이 맞으시다면......"으로 말을 흐리며 논의가 없을 것임을 시사하였다.

2월, 마누엘 2세가 올리비안 왕국으로 돌아왔다. 힐데가르트 대비는 마누엘 2세의 혼기가 다 되기 전에 서둘러 혼인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거절하였으며 그는 영국과 독일로부터 전부 배신당한 그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환멸을 느꼈으므로 동질감을 느끼는 올리비안 왕국에서 계속해서 지낼 것이라고 밝혔다.

5월, 힐데가르트 대비의 동생인 헬름트루드 폰 루트비히 바이에른 공주가 알고레이 국왕을 예방하였다. 이때 마누엘 2세(32)와 헬름트루드 공주(34)와의 혼인을 서두르고자 힐데가르트 대비가 주선하였고 마지못해 이들이 결혼하기로 하였고 알고레이 국왕이 축하해주었다.

6월,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인 마누엘 2세와 바이에른의 헬름트루드 공주가 혼인하였고, 곧 공주가 아이를 가졌다. 헬름트루드 공주의 나이가 많기에 올리비안 왕립대병원이 주도하여 정성을 다해 살폈다.

8월, 근위대와 수도방위군을 분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알고레이 국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9월, 올리비안 공산당이 비밀리에 조직되었다.

10월, 힐데가르트 대비가 그녀의 친부인 루트비히 3세의 장례식에 참여하기 위해 헝가리로 향했다.

11월, 올리비안의 사법체계가 일부 개편되었다. 모뷔뭰토 시에 드록가드 주택단지가 착공하였다. 이는 산업단지의 근무자들을 위한 거주지역이었다.

12월, 올리비안 관광공사가 설립되었고 최초로 관광 전용 여객선 런던-오이리 항로가 개설, 운영되었다.

 

1922년 - 3월, 페드루 6세(페드루 ...... 드 사셰코부르구고다 이브라간사)가 태어났다.

4월, 올리비안을 동서로 가르지르는 제1고속도로가 완공되었다. 최초의 고속도로였다.

5월, 관광열차가 주 2회 운영제를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운용되기 시작했다. 누적관광객이 1만명을 넘어섰다.

6월, 알고레이 국왕이 파타나샤 왕의 자녀들에 대해 사면하였다. 단, 파타나샤와 그의 아내였던 '안나 다디오누스'에 대해서는 직위 및 칭호를 되돌려주지 않았다.

8월, 산토스 파냐 하파시(파타나샤 하파시의 유일한 아들)가 사면받음과 동시에 결혼이 가능해지면서 허마이오니 조나단과 혼인하였다.

10월, 공산당과 일부 강경파들이 지지하는 '벨기오 브라이언'가 문화부 장관으로 임명될 수 있도록 다양한 로비 및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샤드리아 총리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이는 '12.05 폭탄 테러' 사태를 유발한다.

한편, 미군 주둔이 허용되었고 아프리카 해적들이 미군에 의해 소탕되면서 미국의 경제지원까지 들어오자 투자자들이 올리비안 왕국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면서 본격적으로 급성장을 이룩하였다.

11월, 엠마 하파시가 왕세녀 신분으로 처음으로 국내 행사에 참여했다.

12월, '벨기오 브라이언'이 만류하였지만 공산당의 '게일 슐츠(독일계 올리비안인)'이 "올리비안의 공화정 전환 기회는 지금 뿐이다."라며 폭탄 테러를 기획했다. 그는 알고레이 국왕의 생일과 즉위 6주년을 동시에 기념하기 위한 '오이리 오세아노 광장'에서 열리는 축제에 1.2kg의 화약이 들은 가방을 매고 테러('12.05 폭탄 테러')를 강행했다. 그러나 축제장 출입을 관할하던 근위대의 병사가 그의 가방 수색을 위해 다가가자 가방의 줄을 잡아당겼고 도망가던 도중 총에 맞아 즉사했고, 약 9초후 가방 안의 화약이 일제히 폭발하면서 근위대 소속 4명의 병사가 즉사, 9명이 중상을 입었고 그 중 2명이 치료중 사망하였다. 또한 민간인 11명 중 6명이 사망하여 총 12명의 사망자, 24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축제는 취소되었고, 샤드리아 총리는 철저한 조사를 지시했으나 공산당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1923년 - 1월, 샤드리아 총리가 내각의 장관을 전면적으로 교체하였고, '벨기오 브라이언'은 농림축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한편 올리비안 왕국 건국 55주년 행사가 있을 예정이었지만 폭탄 테러의 여파로 취소되었다. 여기서 숫자 '5'는 오이리 족이 신성시하는 숫자이므로 굉장히 의미있는 것이었다.

3월, 내각이 다시 한번 개편되었고, 이때부터 주요 5부처의 조직도는 지금까지 유지되오고 있다.

+ 주요 5부처: 국무부 / 외무부 / 재무부 / 상무부 / 개발부

또한 법무부는 의회의 법제도사무위원회와 왕립법무원 등 여러 기관과 겹쳐 기능이 분산되어있기 때문에 국무부에 법무부 기능을 통합하여 삭제되었다. 다만, 훗날 국왕이 왕실법을 포함한 모든 법무권을 내각에 이양하면서 법무부는 다시 부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개발부가 산업, 도시, 에너지 등 모든 부분을 총괄하면서 개발부가 주요 5부처로 승격될 수 있었으며 상무부와 함께 재무부급의 막강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6월, 산토스 파냐 하파시와 허마이오니 조나단 사이 엘게나스 하파시 왕자가 태어났다.

7월, 올리비안산 올리브가 이상적인 기후에서 재배되고 맛과 가격 모두 훌륭하여 각국에서 수입하였으며 따라서 올리비안 올리브무역공사가 설립되었다.

10월, 헤빌스에 석탄발전소가 건설되었고, 이때부터 메레니치 시의 낙후되었던 헤빌스에 모뷔뭰토 산업기지(단지)처럼 발전기지('헤빌스 전기발전기지')가 설립, 이 지역 인근의 상권이 살아나고 주택단지가 들어서 벤타나 시 못지않은 성장을 보였다.

11월, 정보원이 정보국으로 승격되었으며 파타나샤 왕대에 날치기로 통과되었던 충성법의 일부인 반사상적 인물에 대한 즉결처벌 등 규정이 다시 한 번 통과되었다. 그러나 반사상적 인물의 정의가 모호하고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위험한 법안이었고, 샤드리아 총리는 퇴임 직전 "나는 이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고 가장 후회하는 일이었다."고 회고하였다. 다만, 이 법안 덕분에 공산당 비밀조직이자 공화파 세력인 '올리비안 인민공화국 정부' 관계자에 대한 색출 및 처벌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17. 12.30 쿠테타  마누엘 2세의 죽음 (1924년; 엘게나스 하파시(힐데가르트 섭정) 시대)

 

1924년 - 1월, 알고레이 국왕이 엠마 하파시가 15세 성인이 된 해인 올해 중에 양위할 것을 알렸다. 이로써 최초의 여왕이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월, 상속위원회는 산토스 파냐 하파시가 제1 상속자임을 선언하였다. 이는 최근의 사면에 따른 왕자 신분 복구 및 준 살리카법을 기초로 한 왕실법 중 상속우선순위에 따른 것이었다.

힐데가르트 대비는 상속위원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내각과의 신경전 끝에 합의안을 내놓았다. 산토스 파냐 하파시의 아들인 엘게나스 하파시가 상속함이 옳으며 섭정은 대비가 이어서 하고 후견인 또한 맡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산토스 파냐 하파시가 힐데가르트 대비 섭정연장에 반발하면서 내분이 일었고 이에 국민투표가 제안되었다. 한편 영국의 대사는 이 사건(제1차 왕위분쟁)을 두고 "왕의 양위 선언을 묵살하여 자기들의 왕을 수치스럽게 하여놓고도 의회와 대비 마음대로 상속자를 결정하고 그마저도 못 정하여 민중이 투표하여 왕을 선택하는 괴이한 왕정 체제가 세계에 올리비안 왕국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고 평했다.

반면 미국의 대사는 이 사건을 두고 "미래에 하나의 군주국만 남는다면 필히 올리비안 왕국일 것이다."라고 했다.

3월, 국민투표가 샤드리아 총리의 재가를 받아 실시되었으며 63%의 찬성을 얻어 힐데가르트 섭정 체제가 유지되었다. 대신 후견인은 맡지 않았다.

엘게나스 하파시가 짧은 즉위식을 가지어 6대 국왕으로써 즉위하였다.

5월, 올리비안의 최초의 대형마트인 '길버트 몰'이 수도에 개점하였다. 

6월, 올리비안 국립대학병원이 개원하였다.

12월 12일, 선거가 실시되었다.

12월 22일, 개혁당이 겨우 다수당이 되면서 샤드리아 총리가 3선에 성공(19대 총리)한다.

12월 30일, 올리비안 공산당의 '올리비안 인민공화국 정부'와 공화주의세력인 '리퍼블리카 올리바스'는 다음을 혁명의 이유로 설명하고 대단결을 외치며 쿠테타를 일으켰다(12.30 쿠테타(겨울밤 쿠테타)).

1. 하파시 왕조는 정통성이 없으며, 올리비안인의 조상인 오이리 족을 대표하지 아니한다.

2. 올리비안인의 피가 섞이지 않은 독일인, 힐데가르트가 국정에 관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한다.

3. 학살자 파타나샤의 손자인 엘게나스 하파시의 즉위를 일방적으로 결정한 왕실과 내각을 용서하지 아니한다.

4. 학살자 파타나샤의 충성법 통과를 묵인한 잔혹한 샤드리아 총리와 이의 꼭두각시 의원들에 대해 용서하지 아니한다.

5. 12.05 사태의 책임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씌워 민중을 위한 국가가 아님을 증명한데에 대해 무능한 왕실 및 내각을 용서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소련의 건국 2주년에 맞추어 12월 30일 오전 02시에 발전소를 폭파하여 전력을 차단하고 대기중이던 1조와 2조가 각각 총리 관저와 왕궁, 3조와 4조는 각각 근위대 본부와 오이리 시청사를 향해 기관총, 권총 등으로 무장한채 개인화기를 난사하고 폭탄을 던져댔다.

12월 30일 오전 2시 10분, 근위대장 '아인 호르테스'가 본부 건물 입구를 혼자 지키며 지연전을 하다 사망했다. 

12월 30일 오전 2시 20분, 샤드리아 총리가 탈출에 성공하였고, 곧장 관저와 가장 가까운 수도방위군 소속 제2수도방위군기지로 향했다.

12월 30일 오전 2시 40분, 탈출한 총리에 의해 이제서야 쿠테타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고받은 수도방위제2군은 즉시 무장하여 왕궁으로 향했다. 이때 반군의 2조는 왕궁 측면 돌파를 시도했으나 설치한 폭탄이 궁의 벽면을 무너뜨리지 못하여 진입이 늦어졌다.

12월 30일 오전 2시 50분, 제1수도방위군기지에서 지원군이 왕궁으로 출발하였고, 전력이 복구되었다. 반군의 2조는 이때 왕궁 진입에 성공하였으나, 힐데가르트 대비와 산토스, 그리고 엘게나스 왕은 별궁으로 근위대의 지원을 받으며 빠져나간 뒤였다.

12월 30일 오전 2시 55분, 마누엘 2세가 영국 대사관으로 대피하던 도중에 반군에 의해 중상을 입었고, 헬름트루드 포르투갈 왕비는 그를 이끌고 인근 상가로 대피하였다.

12월 30일 오전 3시, 도착한 제2수도방위군에 의해 반군 3조가 진압되었고 모조리 사살되었다. 왕궁은 그 즉시 전력을 복구하고 비상체계를 가동하였다.

12월 30일 오전 3시 05분, 마누엘 2세가 의식을 잃었다. 샤드리아 총리가 계엄령 재가를 받기 위해 왕궁에 긴급히 전보를 보냈다. 1분만에 힐데가르트 섭정에 의해 계엄령이 내려졌고, 전군이 소집되었다.

12월 30일 오전 3시 10분, 모든 도시의 전력이 복구되었고 수도 봉쇄령이 내려졌으나 수도방위군의 교신이 반군이 점거한 오이리 시청사에서 도청되면서 수도경계 전 부대의 위치가 노출되었다. 

12월 30일 오전 3시 20분, 50여분의 대치 끝에 근위대 본부 진입을 시도한 반군의 3조가 전멸하였다.

12월 30일 오전 3시 25분, 마누엘 2세와 헬름트루드 왕비가 군에 의해 발견되었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2월 30일 오전 3시 28분, 힐데가르트 대비가 근위대 본부를 방문하였다.

12월 30일 오전 3시 50분, 총리 관저를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여 숨어있던 반군의 1조 일부가 발견되었고 2명이 생포되었다.

12월 30일 오전 3시 59분, 마누엘 2세가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향년 36세(만 35세)였다.

12월 30일 오전 4시 05분, 사망자가 집계되었다. 총 412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중 반군이 209명이었고 급습당하여 사망한 군인의 수가 192명, 민간인의 수가 10명, 남은 1명은 불행히도 마누엘 2세가 되었다. 반군의 일부는 왕국 내에 숨어있거나 아프리카로 배를 타고 탈출하였다.

12월 30일 오전 4시 10분, 마누엘 2세의 사망 소식이 왕궁에 전해졌고, 힐데가르트 대비는 여동생 또한 함께 사망한줄 알고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12월 30일 오전 4시 30분, 마누엘 2세의 운구가 별궁에 도착한 사이에 수도 봉쇄령이 하루 연장되었다.

12월 30일 오전 4시 35분, 근위대장의 운구 또한 별궁에 도착하였다.

12월 30일 오전 4시 42분, 전군소집령이 해제되었고 상황을 종료하였다.

모든 외국 대사들이 왕궁으로 소집되었고 상황이 설명되었다. 마누엘 2세 사망 소식이 포르투갈에 전해졌다. 영국과 미국은 공동조사를 약속했으며, 임시로 주올리비안 미군과 수도방위군 일부가 각국 대사관을 보호하기로 하였다.

 

 

 

18. 1925년~ 1938년; 엘게나스 하파시(힐데가르트 섭정) 시대

 

1925년 - 1월, 마누엘 2세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마누엘 2세가 포르투갈 중세 및 르네상스 문학에 관한 논문을 비밀리에 작성하는 등 문학 연구에 힘을 썼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포르투갈의 역사서를 집필 중에 사망한 것이었다. 또한 왕실 보물을 매각하여 포르투갈의 불우 이웃 구제에 사용되어 오던 것이 헬름트루드에 의해 드러났다. 포르투갈 공화국 정부는 왕실의 이러한 노력이 있었다는 것에 헬름트루드 왕비의 입국을 허용하였고 경의를 표하였다. 더욱이 주올리비안 포르투갈 대사를 배치하여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하기 시작하면서 양국 관계는 혈맹마냥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한편, 겨울밤 쿠테타와 관련한 모든 관련자를 색출, 영장없이 긴급체포, 형무소로 보내어 올리비안 공산당과 리퍼블리카 올리바스 청산에 나섰다.

2월, 샤드리아 총리가 포르투갈을 방문하였고, 마누엘 2세가 집필하던 포르투갈 역사서와 문학작품집을 전달하였다. 포르투갈은 올리비안 왕국과의 동맹을 긍정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올리비안에 있던 마누엘 2세의 관이 포르투갈로 이장되면서 고국에 뭍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페드루 6세는 여전히 포르투갈 입국을 금지당했는데, 왕당파의 지지율 상승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3월, 올리비안 공산당 본부가 발각되었고 이로써 짧았던 공산당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4월, 헬름트루드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비가 영국에 있는 마누엘 2세의 친모이자 카를루스 1세의 왕비인 '마리아 아멜리아'를 만나러 갔다. 또한 조지 5세를 예방하였다.

6월, 샤드리아 총리 주도로 치안유지법이 통과되었다.

11월, 근위대가 개편되었고 더 이상 근위대 편제가 세분화되지 않고 간결화되었다. 에드워드 7세의 왕비이자 현 조지 5세의 친모인 알렉산드라 덴마크 공주가 사망하자 힐데가르트 대비가 직접 영국으로 건너가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12월, 알고레이 선왕이 영어와 예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6년 - 1월, 올리비안 최초의 영화가 탄생하였다. '오이리쉬'

2월, 노시아 화산이 분화하였으나 큰 피해가 없었다.

6월, 길버트가 자동차 제조업에 뛰어들었고, 길버트 자전차공업이 설립되었다.

7월, 수도에 단독으로 전력을 공급하는 오이리 석탄발전단지가 완공되었다. 이는 헤빌스 발전소에 문제가 발생하여도 계속해서 수도에는 문제없이 전력을 공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고, 12.30 쿠테타의 여파에 따른 것도 있었다.

8월, 가남 전기가 창립되었다. 올리비안 3대 그룹에 속하는 '가남'의 탄생 순간이었다.

12월, 오이리 항만이 확장되었고, 관광객 유치를 위해 그라나 시에 여객항을 추가로 건설하였다.

 

 

1927년 - 2월, 올리비안 국립영화사가 설립되었다.

3월, 올리비안 제도 남쪽에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메레니치 시와 벤타나 시 일부 해안에 대해 해일 피해를 입었다.

5월, 거대한 금광이 미국과의 공동탐사를 통해 벤타나와 하빌리다드 경계에서 발견되었으며 이곳에 광업단지가 들어섰다.

6월, 샤드리아 총리와 스탠리 볼드윈 영국 총리는 올리비안 통일을 점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통일준비기구(Readiation for Unification of Olivian Kingdom(RUOK))' 설립안에 합의하였다. 

10월, 통일준비기구가 발족하였다.

11월, 무역부(무역 담당 부처)가 설립되었고, 세율이 조정되었다. 이때 길버트 그룹과 정부 간 로비의혹이 터졌고 샤드리아 총리의 4선 도전 좌절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물론 4선 도전을 했었어도 건강 악화로 임기를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1928년 - 3월, 샤드리아 총리가 새로 취임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만나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4월, 올리비안 달러에 대해 화폐개혁(2차 화폐개혁)이 이루어졌다.

5월, 올리바민주당이 약진하였고, 이때 독립당이 올리바민주당과 연대를 추진하면서 한동안 정권을 잡지 못했던 독립당이 분당 이래 다시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8월, 올리비안 왕국이 최초로 경전투함인 '엘니치 디 올리비안 레이노함'을 건조하였고 초대 국왕의 이름을 새겼다.

9월, 수도 주둔 상비군이 모두 수도방위군으로 편입되었다.

10월, 엠마 하파시가 덴마크의 왕실결혼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12월, 선거를 1주일 남기고 샤드리아 총리가 4선 도전을 포기하였다. 이는 길버트 그룹 간 로비의혹과 임기 말에 발생한 경제불황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서 '경제 총리', '완벽한 총리' 등 각종 찬사를 받으며 비교적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샤드리아 총리가 빠진 개혁당은 더 이상 지지를 얻지 못했고 올리바민주당의 '카를로스 가리도'가 19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29년 - 1월, 카를로스 가리도가 힐데가르트 섭정에 의해 총리직을 승인받았다. 그러나 그는 가장 불행한 총리로 기록되었는데, 이유는......

4월, 최초로 벤타나 시에 카지노가 건설되었다.

5월, 독립당과 경제평화당의 배신으로 올리바민주당이 추진하던 진보적 법안 4개가 의회에서 모조리 부결되었다. 따라서 그의 지지율은 크게 감소하였다.

8월, 페드루 6세(8세)가 왕립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9월, 엠마 하파시(20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올리비안에 30층이 넘는 건물(서티 카스티아/사무건물)이 최초로 들어섰다.

10월, 뉴욕주식거래소가 폭락하였다. 미국이 경제불황(세계대공황 발생)을 겪기 시작하면서 미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올리비안 왕국의 경제도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1인당 국민소득이 곤두박질쳤다.

11월, 올리비안 주식거래소의 거래가 중지되었고, 올리비안 왕국의 외환보유액이 바닥을 보였다.

12월, 샤드리아 전 총리가 경제 회복 타개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고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만나 회담을 가졌지만, 미국 코가 석자였다.

 

1930년 - 1월, 영국이 대공황의 여파에 놓이면서 영국령 올리비안에 대한 통일 문제가 일사천리로 해결되었다. 영국은 영국령 올리비안의 모든 행정 업무를 올리비안 왕국에 이관하였고 대신 영국에 1천 4백만 파운드를 지불하고 1980년까지 모든 영국 선박에 대한 세금 50% 감면 등 다양한 사항들에 대해 합의하였다.

2월, 영국령 올리비안 총독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마침내 올리비안 왕국은 통일하였다. 그러나 통일의 대가는 가혹했는데, 공짜로 통일한 것도 아닌데다가 대공황 중에 경제적 여건이 부족한 상황에서 무리한 통일을 진행하면서 원성이 높아졌다.

3월, 사살라 군, 스텔리아 시, 노시아 군이 설치되었다.

4월, 카를로스 총리가 사임하였다. 이로써 그는 최단 임기 총리로 남았다. 또한 후임으로 '제임스 밀랑'이 20대 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올바나민주당의 지지율은 끝을 모르고 급락했으며, 국정에 혼란이 일었다. 힐데가르트 대비가 엠마 하파시의 귀국을 요청하였다.

5월, 제임스 총리가 기업보호를 위해 예산을 집중적으로 쏟아부었다. 대부분 무역기업이었고 이에 따라 요단강을 건널 뻔한 길버트 그룹이 회생하였다. 그러나 기업을 살리느라 대중의 기본적인 삶조차 챙기지 못했다는 비판이 생겼다. 다만 경제 복구의 유일한 길일지도 모르는 올리비안의 기업들이 줄도산한다면 외국 자본에 완전히 유린당했을지도 모른다는 분석과 함께 그의 조치가 적절했다는 평가도 있다.

6월, 제임스 총리가 사살라와 스텔리아 사이에 판잣촌을 건설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군인들까지 전부 나서 산 중턱과 강가에 굴러다니는 나무와 돌을 이용해 판잣촌을 건설하였는데, 이는 무주택자, 실업자 및 파산자를 위한 것이었다. 한편 하반기 정부 예산을 절반으로 삭감 집행할 것을 지시하였고, 따라서 1200여명의 공무원들이 일제히 해고되었다.

8월, 재정 건전성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은행이 다시 가동되었다. 한편 경제 회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제한되어있던 금광 채굴량을 최대로 늘리고 세공업에 투자하여 귀금품 시장을 활성화시켰다. 그러나 한번 늘린 채굴량은 후대에 감소하지 않았고 이는 조기에 그란데오이리 섬 중부에 늘어진 대형 금광이 단 10여년만에 고갈되는 참사를 낳는다. 물론 이후 작은 금광지대가 스텔리아 서부와 기니비사우에도 발견되어 귀금품 시장은 몰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때 창립된 세공기업으로 CHJ(Cherish Hoso(창립자 이름)'s Jewellery), PENTA쥬얼리 등이 있다.

9월, 전 부대에 기본 음식을 제외한 모든 보급품의 보급이 일제히 중단되었고, 전력 발전량도 60% 줄였다. 또한 이때부터 보급형 아파트가 건설되면서 올리비안의 주택 시장에 변화가 생겼다. 한편 1930년 기준 인구는 280만여명이었다.

12월, 엠마 하파시가 올리비안 왕국으로 귀국하였다.

 

1931년 - 1월, 경제성장률이 잠시 흑자로 전환되면서 경제 회복이 되는 듯 했다.

3월, 올리비안 은행이 파산을 면하면서 해외 투자자들이 올리비안을 믿고 투자를 시작했다. 그러나 완전히 경제 위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6월, 힐데가르트 대비가 하일레 셀라시에 1세(에티오피아 제국 황제)에 헌법 공표에 대해 축사를 보냈다.

7월, 바이마르 공화국의 다나트 은행이 파산하면서 나치즘의 급성장의 계기가 되었다.

8월, 올리비안 왕국기가 지금에 이른다. 본래 삼색기였으나 사색기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동안은 삼색기를 계속 사용하였다.

10월, 최초로 도시별 팀 간 야구 경기가 열렸다. 미국의 영향으로 야구의 인기가 커진 것이다.

11월, 제임스 총리가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 총리를 로마에서 만났다. 그는 경제적, 정치적 조언을 구했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올리비안 왕국은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이탈리아가 우호국이었기 때문에 방문한 것이었다.

 

1932년 - 2월, 비행선으로 오이리와 비사우(포르투갈령 기니비사우) 간 해상비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곧 여객, 화물용으로 사용되었다.

3월, 제임스 총리가 조지 5세를 예방하였으며 영국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 영국의 대외 정책에 참여하였다.

4월, 증시 시장이 다시 폭락하기 시작했다. 

6월, 화이트필드 그룹이 파산하였고, 이는 경제불황중 유일한 올리비안 기업의 파산으로 기록되었다.

7월, 광역도시철도공사가 설립되었고, 1호선이 개통하면서 올리비안 최초의 지하철이 탄생하였다. 전체 구간 24.2km 중 9.1km이 지하 구간이다.

9월, 내각이 개편되었는데, '국무부', '외무부', '재무부', '상무부', '개발부', '문화부', '농림축수산부', '무역부'로 총 8개의 부처가 되었다. 

10월, 올리비안 야구 리그인 OBO가 창립되었다.

11월, 브라질 합중 공화국이 올리비안 제도에 대해 영유권을 공식화했다. 또한 브라질 연방에 올리비안을 포함시킬 것을 추진했다. 이는 쿠테타 이후 정권을 장악한 바르가스가 상파울루의 반란 문제를 해결하였으나 이번에는 공산당이 대두되자 이러한 원인을 올리비안 공산당 잔재세력의 활동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올리비안에 대한 친선 정책을 폐기하고 적대하기 시작했다.

12월, 길버트 식품제1공장이 모뷔뭰토 산업기지(단지)에 확장, 이전되었다. 현재까지 최대의 면적을 자랑하며 8개국에 대해 수출품을 생산한다.

한편, 선거가 실시되었고 제임스 총리가 재선(21대 총리)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막장이 되어버린 올바나민주당과 올리비안 왕국의 경제 불황에 대한 책임에 따라 임기동안 대표할 수는 없게 되었다.

 

1933년 - 1월, 엠마 하파시 왕세녀가 당선된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을 예방하였다. 제임스 밀랑이 총리직을 승인받았다.

2월, 제임스 총리가 아돌프 히틀러 바이마르 공화국 수상에 취임하자 축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향했다. 이때 힐데가르트 섭정이 고향 방문을 위해 헬름트루드 바이에른 공주와 같이 가며 산토스 파냐 하파시가 섭정대리를 수행했다.

3월, 제임스 총리가 독일 땅을 밟자마자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졌고, 나치 독일이 탄생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경제 협력안에 합의하였으며, 독일산 수입품에 대해서 관세가 감면되었다. 또한 문화, 인적 교류를 위한 하노버발, 하노버행 여객편이 신설되었다.
4월, 제임스 총리와 힐데가르트 섭정이 각각 미국, 올리비안으로 향했다. 미국에서 루즈벨트 대통령이 구상중인 뉴딜 정책에 대해 전해들었고, 제임스 총리는 올리비안 뉴딜을 이때부터 계획했으나, 임기 중에 물러나면서 중단되었다.

7월, 엠마 하파시 왕세녀가 미국에서 유학을 재개했다.

8월, 제임스 총리가 올리비안식 뉴딜을 발표했으며, 이에 따라 그라나 개발 공사가 시작되었다.

9월, 그라나 관광공사와 그라나 개발공사가 각각 설립되었다.

10월, 마리아 덴 에밀리아, 최초의 여성 장관(개발부)이 탄생했고, 여성 인권이 신장되었다.

12월, 그라나 개발공사에 국가예산의 74%에 해당하는 거액이 투입되었고, 마리아 개발부 장관이 성공적으로 그라나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하였다. 이때 본래 그라나 시는 수도의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건설하려 했으나 이미 벤타나 시와 모뷔뭰토 시가 그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고 판단했고 따라서 주택 위주 도시가 아닌 관광, 문화 위주 도시로 설계되었다. 또한 훗날 비행선이 현재의 비행기 형태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공항 부지(훗날 오이리 국제공항이 들어선다.)를 남겨놓았다. 이는 마리아 총리의 최고의 업적으로 사료되었는데, 물론 부지의 길이가 활주로를 건설할 만큼 충분히 길지 않아 지어놓았던 건물을 20년채 안되어 철거해야했지만, 올리비안 제도는 산과 건설이 불가한 지대가 많고 빠른 개발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때에 공항 부지를 마련해둔 것으로 거액의 공사비를 추가로 책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934년 - 2월, 미국과 소련이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마리아 총리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5월, 대사관을 올리비안 내에 설치한 국가가 10개국에 도달했다. 설치 순으로 포르투갈, 미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독일, 덴마크, 소련, 오스트리아였다. 이때 오스트리아에 대사관을 설치한 배경은 독일의 입김도 있었지만 올리비안에서 활동한 옛 군부 세력이 독일계였고 이중 오스트리아인이 2명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올림픽 중에서의 인연도 닿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 그리고 오스트리아가 극우화되면서 교류가 감소했고 점차 관계가 소원해졌다.

9월, 그라나 지선이 완공되었고, 이는 6호선의 기초가 되었다.

11월, 힐데가르트 대비가 귀국하였고, 섭정대리는 종료되었다.

12월, 결국 여러 번의 갈등 끝에 올리바민주당의 의원들이 이탈하여 각각 개혁당, 자유민주당, 경제평화당 등으로 재입당하였다. 이로써 제임스 총리의 국정 운영이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직을 다수당이 된 자유민주당에 넘겨주었다. 이때 개혁당이 총리를 다시 배출할 뻔 했으나 샤드리아 총리의 세력이 건재하고 야당으로부터 미움을 많이 받아왔었기 때문에 이를 견제하기 위해 자유민주당은 연대를 지속하면서 무산되었다.

한편, 마리아 개발부 장관의 정치적 스승인 '베델 루이엔'이 22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1935년 - 1월, 베델 루이엔 총리가 총리직을 승인받았다.

2월, 엠마 하파시가 예일대로부터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였다.

4월, 베델 총리가 뉴딜 정책을 폐기하였다. 이로써 그라나 개발공사 및 이의 프로젝트가 폐지되었다.

5월, 올리비안 예술대학교가 개교하였다.

7월, 베델 총리가 미국과의 경제 교류를 축소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또한 영국의 사실상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 공인에 영국 대사를 초치하여 항의하였다.

8월, 미국에서 사회보장법이 발표되자 사회보장법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무산되었다.

10월, 에티오피아 제국에 선전포고한 이탈리아에 대해 이탈리아 대사를 초치하여 항의하였다.

12월, 영국의 조지 5세의 병세가 악화되자 알고레이 선왕이 영국을 방문하였다.

 

 

1936년 - 1월, 조지 5세의 장례식 및 에드워드 8세 즉위식에 알고레이 선왕과 베델 루이엔 총리가 참석하였다.

3월, 후버 댐 완공 소식에 이를 관람하기 위해 마리아 개발부 장관이 미국을 방문하였다.

4월, 에티오피아와의 무역에 대해 이탈리아로부터 금지 권고를 받았다. 그리고 한 달 후에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령이 된다. 

5월, 스페인 제2공화국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한 이후로 인민전선이 스페인 정국을 장악하였다는 소식에 베델 총리가 "스페인은 앞으로 선거를 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이 예언은 적중한다. 스페인은 이후로 30여년간 선거를 열지 않았다.

6월, 베델 총리가 상무부의 조직을 일부 개편하였다.

7월, 근위대와 수도방위군을 분리하려는 1차 분리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베델 총리의 과격적인 보수적 국정 운영과 반왕실적 태도에 분노한 의회에서 베델 총리를 비난하였고 이에 보류되었다.

10월, 스페인이 공산화되려하자 스페인을 지원하는 소련과 해당국에 대해 베델 총리가 대사 추방령을 내렸고 이에 반발한 소련은 올리비안 왕국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시켰다.

12월, 헬름트루드 공주가 불치병에 걸렸다.

 

1937년 - 1월, 루즈벨트 대통령과 샤드리아 전 총리가 재선 축하행사에서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다.

3월, 마누엘 2세의 유일한 자식이자 포르투갈의 마지막 왕자인 페드루 6세의 성인식이 오이리 시에서 거행되었다. 이때 포르투갈식이 아닌 올리비안식으로 성인식이 이루어졌으며(포르투갈식이라면 19세에 성인식이 거행되어야 했다.), 마누엘 2세를 그리는 포르투갈인들은 그를 진심을 다해 예우하였다.

5월, 길버트 몰이 포르투갈에 개점하였다. 힐데가르트 대비가 직접 조지 6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

6월, 엘게나스 하파시가 성인식을 가졌다. 다만 섭정직은 왕실법에 따라 유지되었고 대신 1년간 통치 교육을 받아야했다.

8월, 엠마 하파시가 페드루 6세와의 연애를 시작하였다. 페드루 6세는 페드루 5세(포르투갈의 12대 국왕)처럼 잘생겼고 훤칠한 키를 가졌으며 온화한 성품을 지녔다. 이에 힐데가르트 대비와 헬름트루드 공주는 그들의 연애를 축하해주었고, 올리비안과 포르투갈은 매우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였다.

한편, 엠마 하파시의 나이는 27세, 페드루 6세는 15세로, 무려 12살 차이였다.

9월, 문화부가 올리비안 영상공업사 지원을 추진하면서 영국과 미국의 영화 산업을 따라가고자 했다.

12월, 올리비안 국립항공사인 OVA가 출범하였다.

 

 

1938년 - 1월, 남서쪽에서 발생한 규모 7.4의 강진으로 재산피해가 발생하였으며 해일이 메레니치를 강타했으나 사상자는 없었다.

3월, 오스트리아 연방국이 나치 독일에 병합되었으며, 이로써 오스트리아 대사관은 20여년간 문을 닫게 되었다. 당분간 주올리비안 오스트리아 대사관 건물은 백화점 및 문화교류원으로써 사용되어졌다. 이때 백화점의 이름은 '길버트 그리텔 백화점'이었고, 최초의 백화점이었으나 당시에는 인기가 없어 매출이 저조하였다. 다만 상류층이 증가하고 GDP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1950년대에 들어서 길버트 그룹은 백화점 사업을 재개하였고 이의 실패 경험을 토대로 삼아 성공할 수 있었다.  

4월, 베델 총리가 근위대와 수도방위군을 법적으로 강제 분리하고 왕권을 약화시키려는 2차 분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왕실과 총리 간 불화가 발생하였고, 이로써 산토스 파냐 하파시는 힐데가르트 대비와의 회동을 통해 임시 동맹을 맺었다.

5월, 엘게나스 하파시가 섭정체제의 종료를 요청했고 힐데가르트 대비는 섭정직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엘게나스 국왕의 친정이 시작되었지만 초반부터 삐걱대는 왕실과 총리 간의 불화, 왕실 내부에서조차 왕위 상속자 지정 논란 등이 불거지면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엘게나스 국왕의 즉위로 발생한 쿠테타 등으로 민심이나 국왕 이미지나 모든 면에서 좋지 못했다. 차라리 알고레이 국왕을 다시 복위시키자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지만, 정작 알고레이 선왕은 복위를 거부하였고 계속해서 영국에서의 생활을 이어나갔다.

6월, 엘게나스 국왕이 산토스 파냐 하파시에게 대군이자 상왕의 작위를 하사하였다. 그러나 상속위원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는 그가 실제로는 왕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파타나샤 4대 왕의 파면으로 이의 후손들을 왕족으로 두어야 하는지 여전히 의회에서는 엇갈린 주장이 나왔다. 이의 작위 하사로 의회와 민중 사이의 불만이 한번에 쏟아져나왔고, 이는 2차 왕위분쟁 그리고 더 나아가 왕위전쟁의 계기로까지 이어졌다.

8월, 근위대와 수도방위군을 법적으로 강제 분리하는 분리법이 결국 베델 총리의 강력한 압력으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엘게나스 국왕은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이에 베델 총리는 상속위원회를 압박하여 엘게나스 국왕의 자손은 왕위를 이을 수 없도록 하는 심사 요구를 하였다. 이에 힐데가르트 대비는 산토스와의 임시 동맹을 깨부수고 베델 총리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급진 정책으로 불만을 사던 베델 총리는 임기를 무사히 끝마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길버트 몰이 포르투갈에 리스본에 이어 포르토에 2호점을 내었다.

또한 PF운수사업주식회사가 물류센터를 모뷔뭰토에 건설하여 올리비안의 전체 물류량의 60%를 독점하였다.

10월, 그라나 개발공사가 결국 국가통제에서 민간사업으로 넘어가면서 도로, 전기 등의 공공 인프라 사업만 남기고 모조리 철수하였다.

11월, 샤드리아 전 총리와 미국 정부가 마리아 덴 에말리아를 차기 총리로써 지지하였으며 이로써 자유민주당은 계속해서 총리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

12월, 엠마 하파시와 페드루 6세가 혼인하였다. 이로써 포르투갈 왕족과 올리비안 왕족이 서로 혼인한 것이다.

한편, 베델 루이안 총리는 여러 논란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후계자인 마리아 덴 에말리아에 정권을 양도하며 무사히 퇴진할 수 있었다. 또한 최초 여성 총리가 탄생하면서 여성 인권이 더욱 신장될 수 있었고, 이때부터 각국에서 인권을 탄압받은 여성들이 대거 밀입국하기 시작했다.

 

 

 

19. 왕위전쟁 (1939년; 엘게나스 하파시 시대)

 

1939년 - 1월, 상속위원회는 엠마 하파시가 코스타 3대 올리비안 왕의 직계 후손이며 파타나샤 4대 왕이 파면당했으므로 만약 엠마 하파시가 아들을 출산한다면 상속자가 그녀의 아들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엠마 하파시의 임신 소식이 전해졌다.

2월, 산토스 파냐 하파시가 힐데가르트 대비와 말다툼을 하다가 

 

1939년 - 2월, 미국과 소련이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마리아 총리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였

 

 

== 아래 내용은 공사중 ==

 

1.14 1939년

마리아 덴 에리치와, 최초의 여성총리가 탄생했다. 전 총리의 병사로 의회는 새로이 총리를 선출해야했고 당시 경제평화당의 최고의원인 마리아가 여성총리로 최초로 선출된 것이다. 그러나 여성총리가 탄생하자마자 9월, 2차 세계대전이 발발, 국제정세는 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은 미국과 동맹인 상태였고 물론 미국은 유럽에서 벌어진 2차 세계대전에 군수물자를 수출할뿐 참전 생각은 없었지만 올리비안 왕국은 세계에서 위상을 과시하기 위해 연합군국으로써 참전하는 것을 고려했다. 알고레이 국왕은 이에 부정적이었다. 마리아 총리는 이에 참전을 보류했다. 한편 미국 문화가 주둔하는 미국군을 통해 유입되면서 경제-문화가 서로 대등하게 발전했다. 의료법도 미국의 영향으로 제정되었고 청바지, 콜라 등 미국의 문화가 끊임없이 유입되면서 점차 남유럽 문화와 미국의 문화, 오이리 원주민의 남아있는 문화와 혼합되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1.15 1940년

스텔라연방공화국을 최종 흡수통일하면서 영토가 확장되었다. 스텔라 시의 시민들은 이를 매우 환영했다.

1.16 1942년

마리아 총리는 1942년 1월, 일본의 진주만 공습에 일본에 미국과 함께 전쟁에 임할 것을 시사, 선전포고했다. 의회 의원의 63%가 찬성했고 알고레이 국왕이 이를 승인했다. 이로써 올리비안 왕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고 연합국 계열에 섰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마리아 총리는 국방력강화에 크게 노력했다. 최초로 올리비안형 소형전투함을 설계했고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입*배치하는 등 국방의 힘을 길렀다. 한편 도박 문화와 마약이 유입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야기되기도 했다.

1.17 1945년 ~

1945년 8월, 마리아 총리가 재선에 성공하고 두번째 임기중, 미국에 군량 지원, 프랑스에 1100명 군사파견 등으로 비록 소규모이지만 적극적으로 연합국측으로 참전해 승리하면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각각 배상금을 받아냈다.

1949년, 프랑스와 동맹을 채결했다.

1950년, 캐나다와 동맹을 채결했다.

1951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미군이 일부 철수했다.

1952년, UN에 가입했다.

1955년, 인구가 3백5십만명을 돌파했다.

1958년, 금광의 50%가 고갈되었다. 의회는 자원의존도를 낮추고자 경제개혁을 실시했다.

1960년, 영국과 공식으로 화해하고 영국대사관 설치를 허용했다.

1962년, 지리적으로 아프리카와 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 남유럽, 미국과 매우 가깝고 인종도 흑인이 아닌 유럽계이므로 유럽국가로 인정받고자 했으나 유럽대륙과 거리가 너무 멀어 유럽연합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63년, 마리아 전 총리가 사망했다.

1964년, 알고레이 국왕이 병사했다. 알고레이 국왕은 자녀가 없어 하파시 왕조는 막을 내렸다. 조나단 왕조가 탄생했으며 조나단 왕가는 살아남은 포르투갈 왕가에서 이어져 내려온다. 에이하바람 조나단 국왕이 즉위했다. (6대 국왕)

1966년, 엘베스 아나타브 총리가 선출되었다.

1967년, 수도를 확장했다. 이로써 영토의 1/3이 수도영역이 되었다.

1968년, 오이리 국제공항이 건설되었다. 드가드 비행장은 폐쇄되었다.

1969년, 지하철 건설을 시작했다. 인구가 4백만명을 돌파했다. 엘베스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다.

1972년, 30층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섰다. 마천루가 즐비하기 시작했다. 엘베스 총리는 역대 최고의 총리로 꼽힌다. 이때 올리비안 왕국은 세계 30위권 경제대국으로 크게 성장했다.

1974년, 올리비안 왕국의 사기업이자 세계적 기업인 길버트 그룹이 창설되었다.

1981년, 석유매장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1.18 1984년

기니비사우 공화국이 총리제를 폐지하고 국민평의회를 구성한 해, 급작스럽게 올리비안 왕국과 기니비사우 공화국은 혈연동맹관계를 선언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두 국가 모두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았고 언어도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기니비사우에서 오이리제도로 넘어와 부족국가를 구성했던 원주민들이 오이리족이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매우 끈끈했다. 올리비안 왕국과 기니비사우 공화국은 서로 혈연동맹관계임을 선포했고 이듬해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이 출범했다. 다만 경제적, 문화적으로 올리비안 왕국이 기니비사우에 비해 매우 선진국이었기 때문에 연방은 올리비안 왕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한편 석유매장이 확인되어 해상 유정 건설이 계획되었다.

1.19 1985년 ~

1985년, 브라질 군함이 올리비안 왕국의 영해를 무단으로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에 미국과 올리비안 왕국은 브라질에 항의하고 국제법 위반을 이유로 브라질을 국제헌법재판소에 기소했다. 브라질은 곧바로 사과했지만 브라질이 의도적으로 올리비안 왕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냐하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올리비안 왕국이 참가, 올림픽에 최초로 참가하게 되었다.

1989년, 지하철이 우여곡절 끝에 완공되었다. 지하철 착공 무려 20년만이다. 인구가 5백만명을 넘어섰다. 경제적 발전을 이룩한 왕국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간 자원과 수공품, 중개무역으로 경제를 성장시켰지만 선박의 발달에 따른 중개무역 감소와 자원의 고갈임박 등으로 경제적 쇠퇴가 시작되었다.

1990년, 에이하바람 조나단 국왕이 노환으로 별세했다. 에이하바람 국왕의 아들인 바라나달 국왕이 즉위했다.

1991년, 세르겐데이 벨 데바나르 총리가 선출되었고 경제부활을 약속했다.

1992년, 2차 산업 집중투자계획을 발표했지만 너무 늦은 계획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매우 컸고 의회에서 다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총리권한으로 강행하여 국왕의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드가드시와 그라나군에 대규모 산업단지가 착공됬다. 한편 브라질이 2차 도발을 강행했다. 브라질은 이로 인해 미국으로부터 비난당했으나 도발은 이후에도 2주간 길게 이루어졌다. 이는 자주국방정책을 강화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의회는 이에 부정적이었지만 브라질의 도발 이후로 점차 자주국방에 대한 인식이 변화했다.

1993년, 기니비사우 공화국과 합병하자는 의견이 의회에서 나왔고 긍정적으로 검토되었으나 기니비사우 공화국의 대통령이 어처구니 없는 상상이라며 선을 그었다. 이 발언으로 올리비안 기니비사우 연방이 한때 위태로웠다.

1995년, 세르겐데이 총리가 재선에 실패했고 에나바드 아벨 엘리고 총리가 선출되었다. 에나바드 총리는 산업육성은 올리비안 왕국을 부활시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산업육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1996년, 오이리 국제공항이 확장되었고 인구가 5백5십만명을 넘어섰다. 아프리카 난민 등이 꾸준히 유입되어온 결과였다. 과인구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가 커 결국 이민법이 제정되었다. 인구성장률이 급감했다.

1997년, 에나바드 총리가 스텔리아 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이는 수도의 포화상태를 막기 위한 결정이었다.

1998년, 제철소 단지, 화학공업단지 등 여러 산업단지들이 차례대로 완공되었고 화이트필드 타운 건설계획이 발표되었다. 관광업 증진을 통해 경제를 살리고자 하는 정부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길버트 몰타워, 메가타워 등이 착공되었다. 모뷔뭰토 군이 개발되어 인구가 유입되면서 일찍 시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모뷔뭰토 군이 아직 도시를 형성하지 못하였으므로 군으로 남아야 한다고 본다.

1999년, 에나바드 총리가 재선에 성공했으나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에나바드 총리가 막말논란을 겪으면서 야당의 정치적 공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국왕은 허수아비다라는 발언이 결정적이었고 결국 에나바드 총리는 사퇴했다.

2000년, 바라나달 국왕이 병사했다. 가비오이 조나단이 8대 국왕으로 즉위한다. (MCAC 출범)

2015년, 남대서양전쟁이 발발하였다. 또한 국방부 쿠테타(2015)의 발생으로 국가가 한때 전복될 위기에 처했지만 이후 기니비사우 지역을 얻어 합병했고, 부당히 퇴위되었던 국왕이 다시 복위한다. (자세한 사항은 남대서양전쟁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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