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토척식계획 (빌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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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토척식계획은 고조선과 고구려와 발해 부터 이어진 대한의 정당한 고토를 회복하는 것이었으며, 오랜 대업이던 북벌론을 완수하는 것이었으며, 반도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할 발판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근대화를 위한 동력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며, 앞으로 수십년의 안보를 책임질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다.
한국의 역사 교과서 中

1890 계획이라고도 불리는 고토척식계획은 대한국의 만주로의 영토 확장, 그리고 한국화를 주장하던 한국의 이론이자 정책이었다. 그 전신은 조선 시대의 북벌론으로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에 와서 이범윤의 주도 하에 체계화 되어 고토척식계획으로 재정비 되었다. 그리하여 등장한 고토척식계획은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졌던 한국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서 작용했다.

한국은 고토척식계획에 따라 연화도, 압록도, 요동도를 차례대로 중국에게서 얻어냈으며, 대추방남만주대토벌작전 등의 남만주에서의 한족 추방과 제노사이드의 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토척식계획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계를 맞이했다. 본래의 목표대로라면 쑹화강 이남은 한국의 직할령으로서 삼는 것이었으나, 북방출병에서 이렇다할 소득을 얻어내지 못했고 국제사회의 눈초리가 한국에 집중됐다. 더욱이 근본적으로 한국의 개척 능력이 한계에 봉착했다.[1] 1927년, 고토척식계획은 "만주 전역을 대한의 창이자 방패가 될 영향권으로서 확보해야 한다"는 논조로 노선을 변경하였고, 만주 출병으로 만주국을 건국하면서 도출되었다.

제2차 벨트크리그가 끝나고 고토척식계획은 중단되었다. 한국은 나치 러시아에게서 연해주 전역을 손에 얻었으나, 블라디보스토크(현 북위) 일부만 한국의 직할령으로 편입 되었을 뿐 나머지 영토는 만주국에게 넘어갔다. 한국령이 된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한국화는 진행되지 않았으며 현지의 슬라브인들은 시민권을 인정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고토척식계획은 세계 정세의 흐름, 그리고 한국 제국주의의 끝과 함께 자연스레 소멸되었다.

고토척식계획은 사라졌으나 그 영향은 여전히 동북아시아 정세에 짙게 남아있다. 한국은 남만주를 얻어낼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한족을 추방함으로서 그곳을 완전한 "한민족의 영토"로 삼을 수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고토척식계획의 전신인 북벌론은 청나라를 타도하기 위해 탄생되었으나, 정작 고토척식계획에서 만주족은 한족을 몰아내기 위한 창으로서 한국의 비호를 받아 수백만의 만주족이 한국령 남만주에서 생활하고 있다. 한국의 야욕에 따라 건국된 만주국은 몇번의 전쟁에서 한국의 본토를 지키는 방패로서,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창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자주국으로서 재편된 현대에 이르러서도 만주국은 한국의 영향권 아래에 있다. 국내적으로만 본다면 고토척식계획은 완전한 대성공이었으나, 이것으로 인해 현대까지 대중외교, 특히 청나라와의 관계에서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로서 한국의 발목을 잡고있다.

역사

영향

평가

  1. 지금의 인구로도 힘들 계획을 당시 2천만 남짓의 인구로 시도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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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IA 빌레펠트연재팀 정보
대표연재자 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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