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인란드

기나인란드는 2024년 6월 23일자로 대대적인 혁신에 돌입했습니다.
죽기전에는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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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nbae | CC-BY-SA 3.0
기나인란드 공화국
Eruplbci fo Igannialdn | Republic of Ginainland
국기 국장
하늘의 푸르름을 아는 사람이여
You know the blueness of the sky
국가 공화국민이여, 불타올라라!
국수 도롱뇽
국화 붉은 장미
역사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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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마르디아 특급시
최대 도시
면적 25,102km²
인문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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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총 인구 224만 1,452명 (2022년)
인구 밀도 89.29명/㎢ (2022년)
출산율 1.88명 (2022년)
기대수명 78세 (2022년)
민족구성 82.5% 기나인인
14.6% 게일족
2.3% 영국계
0.6% 기타
언어 국어 기나인어
공용어 영어
게일어
국문 영어
종교 국교 국교없음 (세속주의)
분포 개신교 40.3%[1]
무종교 37.2%
가톨릭 17.8%
기타 4.7%
군대 기나인란드군
주둔군 기나인란드군, 주기미군, NATO군
하위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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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할구역 6개 주, 1개 특급시
직할관할령 37개 시, 11개 구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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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체제 자유민주주의, 공화제, 의원내각제, 다당제, 양원제, 문민통제
민주주의 지수 168개국 중 14위 (2021년)[2]
행정
각료
총리 에루펠베치 페트릭
부총리 이르마 존
상원의장 아스더릴 오엡
하원의장 아세노 스미스
최고법원장 오르레 웰란 주니어
집권 여당 틀:기나인란드 급진당
연립 여당 틀:기나인란드 노동당
신임 공급 틀:기나인란드 자유당, 틀:시민사회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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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체제 자본주의시장 경제
GDP
(PPP)
$1025억 | 세계 57위
1인당 $45,765
GDP
(명목)
$1142억 | 세계 57위
1인당 $50,987
외환보유액 $2,456억
신용 등급 무디스 Aa2
S&P AA
Fitch AA
통화 공식 화폐 기나인란드 배인드
ISO 4217 GRB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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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연호 서력기원
도량형 SI 단위
통행 방향 좌측 통행
시간대 서유럽 표준시(WET) (UTC+0)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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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교현황 대한민국
1953년 8월 15일

북한
1996년 4월 2일
UN 가입 1947년
ccTLD
.GI
국가 코드
713, GIN, GI
전화 코드
+11
위치
지도

개요

기나인란드 공화국 (Eruplbci fo Igannialdn), 약칭 기나인란드 (Igannialdn)는 대서양과 서유럽에 위치한 공화국이며, 수도는 마르디아이다.

아일랜드의 1/3에 이르는 땅과 200만 가량의 인구를 보유하고 있으며 2022년 기준 명목상 GDP 1025억 달러를 기록해 세계 57위에 위치해있다. 냉전초기에는 찢어지게 침체된 경제와 만연한 부정부패, 동시에 실패한 출산정책으로 인해 삼무국(Three Non-Country), 대서양의 환자라는 별칭을 얻는 굴욕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1950년대 중반부터 미국의 마셜 플랜과 같은 경제 원조아래 시작된 경제성장정책으로 50년만에 1인당 GDP 5만 달러를 돌파하며 대서양의 기적을 일구어낸 국가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본국을 제외하면 아일랜드인이 가장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기나인란드인이 전 인구의 83% 가량의 차지하고 있기는 하나 2차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건너온 아일랜드인의 후손들, 기타 이민자들을 포함해 15%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같은 서유럽의 섬나라라는 정체성과 양국 모두 영국의 식민지이며 상당한 탄압을 당했다는 점, 기나인란드인의 일부 뿌리가 게일족에게서 이어져 온점으로 인해 두 민족간의 갈등은 크지 않은편이다. 오히려 2% 가량의 차지하는 영국계와의 마찰이 더욱 심할정도.

대항해 시대 이전에도 서유럽과의 교류가 없지는 않았고, 페스트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나 이와는 별개로 유럽 문명에서 나뉜채 고립된채로 문명을 발전시켰다. 허나 대항해 시대의 시작 이후 서서히 신대륙으로 통하는 이점 지역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1589년 존 데이비스가 본래 독자 국가로 존재하던 안유즐 왕국을 무시하고 영국의 땅으로 선포한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영토를 잠식해가 1609년에 최종적으로 안유즐 왕국이 멸망하며 13개 주 연합에 이어 두번째로 영국의 식민지로 편입되었다. 이후 사회 문화적으로 영국의 방향을 따라가기 시작됐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기나인인의 반발을 일으켰고, 결국 1922년 기나인인들의 지속되는 반란과 이로 인한 기나인란드 총독부의 파산이 계속되자 아일랜드와 함께 자유국 성립을 조건으로 사실상 독립하였다. 이후 영국과의 협상으로 1927년에는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상징

국호

Raitlce 5
elt hte anem fo hte Eruplbci eb Eruplbci fo Igannialdn

제5조
공화국의 이름은 기나인란드 공화국으로 한다.
기나인란드 공화국 헌법 원본

정치적 체제변화가 심했기에 국명히 상당히 자주 변하였다. 1922년 기나인란드 자유국이라는 국명으로 국가가 수립되었고 마르디아 협약으로 완전히 독립된 이후에는 기나인란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하지만 27년 사태로 공화국이 무너지고 대서양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몽골 인민공화국에서 모티브를 따온 기나인란드 인민공화국으로 국명을 재변경하였다. 하지만 몇달 뒤 일어난 내전으로 인민공화국 정부가 1년도 안되어 망하면서 국명은 다시 기나인란드 공화국으로 환원되게 된다. 이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이 2차 대전에 참전하자 기나인란드를 전략적 요충지로 판단한 독일 정부가 정권교체를 요구하며 압력을 가하고 전쟁을 피하고자 했던 기나인란드 정부가 이를 수락하면서 기나인란드 대서양 제국이라는 무근본 국명으로 국명을 다시 바꾸게 된다. 허나 1943년 본래 목적과는 다르게 대서양 제국 정부가 대서양 전체를 기나인란드로 편입시켜주겠다는 말도안되는 제안을 수락하고 몇달뒤 영국군과 미국군에게 처참히 점령당하며 1947년 군정 종료 직전까지 기나인란드 군정청으로 존속하게된다. 1947년, 마침내 군정이 종식되면서 기나인란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되찾았고 이가 이어져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현재의 국명은 군정청 종료 이후 소집된 3차 제헌의회에서 확정이 되었는데, 처음 제안된 국명은 기나인란드 공화국이 아닌 안유즐 공화국이었다. 기나인란드가 아니라 안유즐이 제안된 이유는 강제적이기는 했으나 대서양 제국 당시에도 유지했던 국명이였고, 기나인란드 공화국이라는 국명만 사용하면 이후 지속해서 체제가 엎어져 생긴 부정적 인식으로 인한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의원들에게서 상당한 지지를 받고 확정 직전까지 같으나, 안유즐 왕국이 멸망한지 너무 오래되었고 고대 기나인란드어가 유실되어 안유즐의 뜻을 알수없다는 이유로 당시 제헌의회 의장이던 -에 의해 거부되었다. 이로서 유일히 기나인란드를 대체 할수있던 안유즐이라는 국명이 국명으로 탈락한 상황에서 기나인란드에 붙일 수식어만 정하면 되는 상황이였는데, 이는 각각 아무것도 붙이지 않았던 기나인란드와 영국계가 지지하던 기나인란드국, 기존에 사용하던 기나인란드 공화국으로 추려지게 된다. 이를 제헌의회에서 투표로 붙인 결과 기나인란드 공화국이 144표, 기나인란드가 38표, 기나인란드국이 18표로 기나인란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확정되었고, 헌법 제5조에 새겨지게 되며 공식적으로 완전히 굳어지게된다.

국기

삼원기 (Htere Iclce Lfga)
지위 공식 국기
제정시기 기나인란드 공화국 (1923년 3월 27일)
근거법령 기나인란드 공화국 <공화국 국기 법률>[3]
제작자 어니스트니 제임스 (Ernestny James, 1898 ~ 1928)
공화국국기수정위원회 (Lfga Erisisno Ocmmtiete, 1947년)

독립 직후 제정된 국기이다. 기나인란드 총독부와 기나인란드 자유국 시기에는 이러한 깃발을 사용했으나, 완전히 독립된 이후에는 자주공화국의 국기처럼 안보인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도했던 의회는 물론이고 일반국민들 사이에서도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독립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국기 공모전이 열리게 되는데, 약 300여개의 국기도안 중 어니스트니 제임스 당시 총리의 도안으로 의견이 모이게 된다. 밑의 원 2개는 각각 노동자, 지식인을 상징하며 맨 위의 원은 사회를 상징하게 해 노동자와 지식인이 사회를 만듦을 상징하게 하였다. 또한 바탕의 적색은 피땀흘려 만들 새조국을 상징한다 밝혔다. 이런 도안으로 의견이 모아지기 시작하자 당시 야당이던 보수당농민당, 가톨릭사회당이 강력하게 반발하며 흰 바탕에 청색 십자가를 그린 도안을 가져왔으나 핀란드와 비슷하며 세속국가를 지향하는 기나인란드 국가방향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결국 보수당과 중앙농민당의 반발속에 노동당 내각이 공화국 국기 법률을 일반법률로 지정하여 날치기로 통과시키며 삼원기는 처음 생길때부터 상당한 잡음을 듣게 된다.

허나 27년 사태로 인해 집권한 대서양 공산당이 공화국 국기 법률을 폐기하고 낫과 망치를 중앙에 넣은 국기를 사용하며 이야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다수의 예상과는 반대로 공산당은 삼원기를 찢어버리는 선전물을 붙이고 삼원기의 계양을 금지시키는 등 삼원기를 말살하려 시도했다. 그러던 중 28년 대서양 공산당의 인민공화국이 내전으로 패망하게 되고, 내전 종료 직전 거국내각은 만장일치로 국기법을 복원시켰다. 이는 공산당이 삼원기를 부정적으로 생각함에 따라 급진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던 삼원기가 오히려 반공주의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였고, 이로 인해 보수층과 반공주의자들 사이에서 오히려 삼원기가 장려되는 상황이 일어났기 때문이였다. 공산당의 집권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이익을 얻었던 삼원기는 1942년까지 온전히 유지될수 있었고, 잠시 대서양 제국시기에는 국기에서 퇴출당하기도 했으나, 대서양 제국의 패망 이후 군정청 체제가 들어서며 삼원기 금지령은 다시 한번 풀리게 된다. 군정청 종료 이후 1947년 공화국국기수정위원회에 의하여 국기의 크기를 1280X640의 크기로 확정시킴과 동시에 원의 크기를 통일시켰고, 삼원기는 국가통합의 상징으로 불리며 현재까지 처음의 의미를 유지한채로 내려져 오게 된다.

국가

공화국민이여, 불타올라라!
(Eruplbcinas, Ubnr Pu!)
지위 공식 국가
제정시기 기나인란드 공화국 (1952년 9월 8일)
근거법령 기나인란드 공화국 <공화국가 법률>
작사가 레그서스 카논 (Regsas Canon, 1920 ~ 1942)
작곡가 아터 엠마 (Aweter Emma, 1900 ~ 1972)

1942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해 1952년 공식적으로 지정된 국가다. 해당 노래에는 안타까운 사연이 숨어있는데, 해당 곡의 작사가인 레그서스 카논은 1942년 당시 국립 마르디아 대학의 정치학과 2학년 학생이였다. 하지만 독일 정부의 압력에 의해 파시스트 정권인 대서양 제국이 수립되자 이에 반발하여 대규모 투쟁에 나섰는데, 이때 만들어진 투쟁가가 바로 이 노래이다. 초기에는 그냥 흥얼거리는 정도였지만, 당시 마르디아 대학 최연소 작곡과 교수였던 아터 엠마의 도움으로 곡조까지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카논은 이를 얼마 불러보지도 못하고 동해 1942년 7월 경 체포되어 8월 경 사형을 선고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1943년 군정청 수립과 동시에 노래는 묻힐것처럼 보였으나, 1952년 내각에서 국가의 필요성을 호소함과 동시에 해당 노래를 국가로 추천함에 따라 부활하였고, 연립여당은 물론 야당 역시 찬성함에 따라 만장일치로 국가로 채택되게 된다.

가사

한국어 기나인란드어 영어
1
구시대의 깃발은 이미 내려가니

삼원기는 찢어져 그물 아래로 떨어지네
공포와 아득함이 뒤엉킨 그물
도살용 칼은 대서양에서 마르디아까지 떨어졌네
마르디유에 닿은 태평양의 바다 아래에는
끝없는 어두움만 남으니 대서양에서 방황하는구나
억압과 독재 아래는 더없이 어둡지만
대서양에서의 반항은
여전히 브루반의 등대와 같네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세계의 외각에 있어
더럽고 슬픈것만 자욱해 눈에 들어오지만
언젠가 되찾으리라 희망하네
설령 세계의 올바른 등불이 꺼져갈지라도
이렇게 일,이,삼을 세며 우리의 노래를 부르자
이제 전력을 다해 독재를 쳐부수자
자, 미래의 태풍에 빌붙어
썩어빠진 독재자를 쫓아내자
자, 모두 함께 삼원기를 높이 들고
저 장미를 과거의 번화함으로 가지고 돌아오자
이는 정말 어려운 반항이지만
자유를 탈환하자

공화국민이여, 불타올라라!
The flag of the past is already falling down-

the three-circled banner is tearing apart below the trawl.
And that trawl is ravled with fear and despair.
See, a butcher knife is falling from the Atlantic to Mardia
Vicinity of the Mardia is a bottom of Pacific,
the bottom stands for endless darkness wandering below Atlantic.
Under the oppression and tyranny is darkness unprecendted.
But the revolt from the Atlantic is lighthouse of Bruban.
Although this land is verge of the world watched by no one,
only bluric and tragic things watched,
but hopefuly, someday will reconquered by us.
Even if justice of our culture is disappearing light,
Let's sing our song of hope, counting one two three.
Let's overthrow the tyranny.
Let's overthrow the depressor.
Let's bring the rose back to its flourishing age
with flying three-circled banner high.
It'll be a struggling with long way,

but stand up, children of the Republic!
2
헛된 기다림의 길을 포기하고
한숨이나 쉬니 언제 고초에서 벗어날까
설령 이 길에 핏자국이 가득해도
자유를 위해 자, 마지막까 분투해
독재자들을 이 손으로 끌어내리길 맹세하자
조국을 위해 싸우고
미래를 위해 싸우고
이 썩어빠진 독재에 절대 굴복치 않으리
저 썩은 억압을 향하여
저 독재자, 노예상, 뺏은자와 억압자를 향해
저 어둠을 향해 칼을 빼내자
일,이,삼을 높이 외치며 쇠사슬을 부수자
피눈물로 긴 슬픔을 씻으리라
모두 도롱뇽의 풀어
시위를 멈추지 않고 대서양을 건너자
마침내 독재자의 관저에 들어왔으니
모두 함께 저 거대한 그물을 찢어버리자
자, 끝없는 미래를 위해서
주저말고 대서양에 잠기자
Never give up the path of endless wating, vaining and sighing.

No one cannot let you escape from suffering.
Even if the way for rightness is full of bloodstains,
let's fight to the end, for liberation by our own.
Let us swear to bring down the oppressor with our own.
Let us struggle for our future.
Let us struggle for our country.
Let us not surrender to the brutal oppression.
Let's take out the sword towards that darkness.
Let's count, two, three and break the chains.
Let's liberate the salamander from oppression.
Let's cross the Atlantic without stopping struggling.
At last, we reached the oppressor's throat.
Together, let's tear down that great trawl of oppression.
Now, for our eternal future,

Let us not hesitate to march to the Atlantic.
3
이렇게 일,이,삼을 세며 자유를 외치니

꿈같은 승리를 모두 함께 환호하자
머리를 쳐들고 알랑투아왕의 동상을 지나자
지나간 상처를 모두 없애니
우리는 돌아왔도다
망설이지 않고 용감히 나아가
삼원기의 의지를 다시 빛나게 하네
정말 고난스러운 여정이였지만
우리는 마침내 모두 되찾았네

공화국민이여, 불타올라라!
Counting one-two-three, asserting liberation,

it's time for hailing unbelievable victory.
March boldly above King Allangtois!
We are back,
marching boldly without hesitating,
raising the honor of will of three-circled banner.
Although it was a struggling with long way,
We reconquered everyting.

So, stand up, children of the Republic!
4
바이 바이 독재자 아래의 고통이여
삼색기는 더이상 찢기지 않고
저무는 검은 태양에 고별하네
저 어두운 물결을 향해 바이 바이 바이
바이 바이 어둡고 차가운 세상이여
한점의 불꽃이 맹렬한 불길로 들판을 태우니
함께 손잡고 신세계로 가면서
압박과 고통을 향하여 바이 바이 바이
Farewell, the pain un der the oppression.
Three-circled banner will not be torn,
and it farewells to the downing black sun.
Farewell to the dark wave,
farewell to the icy world.
A single spark burns the field with raging flames,
so let's go to the brave new world, with hand-to-hand.
Farewell, all the oppression and affliction!

보다시피 가사가 상당히 길다. 그렇기에 대부분 1절에서 바로 3,4절로 넘어간 뒤 국가 제창을 끝내는 편.

슬로건

역사

기나인란드의 역사
A istsroy fo Igannial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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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기시대

선사시대의 기나인란드인들 (상상화)

기나인란드의 선사시대 유적과 이에 대한 관련 자료 연구가 활발한 편이다. 약 80만년 전 경, 호모 에렉투스가 아일랜드를 통해 기나인란드에 처음으로 상륙한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천적이 비교적 적고 식량자원이 많은 기나인란드에 쉽게 정착했을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의 인류와 비슷하게 이들은 수렵활동을 중심으로 하여 활동했을것으로 보이며, 상륙 초기에는 단순 뗀석기 정도에 머물렀으나 대륙보다는 느리지만 약 기원전 1000~2000년 경 본격적으로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어 농경사회를 본격적으로 이루었을것으로 보인다. 허나 기나인란드의 발전은 청동기나 역사시대로 이어지지 아니한채로 신석기 시대에서 정체되었고, 이후 단순 기록을 제외하면500년 경 게일인들에게 처음으로 발견되고 800년대 바이킹들에게 침략을 받을때까지 신석기 시대에서 정체되어있게 된다.

당시 이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천적과 같은것이 아니라, 동물의 수가 압도적었기 때문에 생긴 단백질 부족과 불의 고리 정중앙에 위치했기에 지금까지 기나인란드를 괴롭히는 지진 문제였을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이들은 육식이 아닌 채식을 압도적으로 선호하게 되었고, 동시에 지진에 대비하기 위하여 움막에 진흙을 바르는 등 상당히 특이한 생존방식을 터득하게 된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일부 북쪽 야만인들에게 들은 섬이 있다라는 정도만 알려져있었다. 또한 고대 로마제국 시기에 기나인란드는 단순 브리튼에서 서쪽에 있는 섬이라 묘사되는 수준이였고, 이로 인해 대륙과 기나인란드간의 직간접적인 접촉은 완전히 전무한하였다. 애초에 대서양 한복판에 있으니 거리로 인해 점령되었어도 정상적인 행정력을 구사하기에는 무리가 많았을것이다.

역사의 시작

이후 기나인란드섬은 기원후 500년까지는 신석기 생활을 하던 정통 기나인란드인을 제외하면 아예 모르는 수준의 섬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600년 경부터 아일랜드에서 "서쪽의 아름다운 섬"에 관한 기록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고, 일부 아일랜드의 어부 및 상인들은 기나인란드섬과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기나인란드에 철기 및 대륙의 혁신적인 문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에 의해 700년 초반 경 본격적으로 기나인란드는 역사시대로 들어오게 된다. 역사 시대로 들어온 이후 본격적으로 소규모 왕국들과 기타 국가들이 세워짐과 동시에 피지배층과 지배층이 명확히 구분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본격적으로 아일랜드어의 영향을 받은 고대 기나인란드어의 언어체계와 문자문화가 자리잡혀 통일되기 시작한것 역시 이 시기이다.

중세시대

중세 방어시설 라우디 투아

중세시대 기나인란드는 강약약강의 시대였다. 카톨릭의 전파와 함께 넘어온 게일인들은 중세 기나인란드의 경제를 잡고 흔들었으며, 아일랜드 를 통해 기나인란드까지 넘어온 바이킹은 해안가와 강 부근에서 지속적으로 약탈을 시도하였다. 이 와중에 크고작은 소왕국들은 지속적으로 생겨나 기나인란드 전체의 혼란을 부추겼다. 거기에 조금만 강해지거나, 국력이 높아지면 기나인란드 통일을 시도하며 전쟁을 일으켰으나 이런 경우에는 대부분 다른 소왕국들이 생존을 위한 연합을 맺고 통일을 시도한 왕국을 멸망시켰기에 통일 전쟁은 큰 의미가 없었다.

대표적인 소왕국으로는 현재 북서부 지방 레피우서주의 왕국인 마우저 왕국, 산악지대인 남서부 지방 이어레벰주아이든 왕국, 동부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던 오두 왕국등이 있다. 이 외에는 왕국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으로 작거나, 4대 왕국의 위성국, 조공국으로만 존재했었다.

바이킹의 침략도 많았는데, 어떻게 이 먼 바다를 건너오냐 물을수도 있겠지만 기나인란드까지 왔던 바이킹의 대부분은 아일랜드를 건너서 온 이들이였다. 당시 기나인란드 존재했던 네 왕국이 각자 바이킹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였기에 바이킹이 올 무렵만 되면 네 왕국이 동맹을 맺고 싸웠으나, 이는 역부족이여서 바이킹의 일부가 동부 해안가에 자리를 잡고 살기에 이른다. 이때 세워진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동부 제2의 도시인 아베키겐시이다.

대분열 시대

대분열 시대 당시 기나인란드 전도

외부에서의 방문은 기나인란드에게 번영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으나, 결국 중세의 끝에서 파멸을 맞이하게 하였다. 1208년 기나인란드 섬 전체에서 발생한 진도 9.9가량으로 추정되는 대지진이 기나인란드를 덮치면서 중세기준으로 꽤나 높은 지진 대처능력을 가지고 있던 소왕국들은 대처능력을 써보지도 못한채로 순식간에 완전히 붕괴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실 대지진만이 원인이 아니라 당시 소왕국 곳곳에서 일어나던 민란과 점점 심해지는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해 각 소왕국들은 이미 버티기 힘든 상황이였다.

소왕국들의 붕괴는 말 그대로 기나인란드의 비교적 안정적이던 체제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했으며, 이를 기다리기라도 한듯 지방의 영주들과 민란에서 우두머리들이 차지한 이들이 스스로를 왕으로 자처하며 대분열 시대가 열리게 된다. 대분열 시대에 있었던 크고 작은 소왕국들의 갯수만 해도 이 작은 땅 안에서 40개를 넘기는 수준이였으며, 당연히 소왕국들 끼리의 전쟁도 매우 잦은 편이였다.

대분열 시대는 지진이 일어난 1208년에서 시작되어 1468년 알랑투아왕이 오울레건 왕국으로 통일할때까지 대혼란 상태에 빠지게 된다.

통일왕국 시대

오울레건 왕국

마르디아 대광장에 위치한 알랑투아왕의 동상

안유즐 왕국

영국 식민지 시대

자치 운동

독립 운동

독립 이후

27년 사태 이전

27년 사태기나인란드 내전

다시 공화국 체제로

대서양 제국의 수립과 군정청

현대 시대

공화국의 부활과 대서양의 기적

2000년대 이후

  1. 대부분 성공회
  2. 완전한 민주주의 8.79점
  3. 1923년 3월 27일 제정
    1927년 10월 4일 폐기
    1928년 4월 11일 복원
    1942년 2월 28일 폐기
    1948년 1월 1일 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