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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행정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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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4대 행정원장 롄잔 連戰(연전) | Lien Cha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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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6년 8월 27일 (86세) |
중화민국 산시성 시안시 | |
재임기간 | 제14대 행정원장 |
1993년 2월 27일 ~ 2007년 1월 25일 | |
학력 | 국립타이완대학 (정치학 / 학사) 시카고 대학교 (정치학 / 박사) |
소속 정당 | |
종교 | 개신교 |
개요
중화민국의 제14대 행정원장.
생애
유년 시절
롄잔 본인은 시안에서 태어났지만 할아버지 롄헝(連橫, 1878-1936)은 타이난 태생의 유명한 역사학자이다. 롄헝은 대만의 역사를 중화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기전체로 정리한 대만통사(台灣通史)를 저술하여 대만의 민족의식 고양에 크게 기여하고 여러 사회운동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대만총독부의 아편정책[1]에 찬성한 것[2]을 계기로 대만 지식인들과 갈등하다 1933년에 상하이로 이주했다.
롄잔은 아버지 롄전둥(連震東)이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도중에 태어났으며, 롄전둥은 중일전쟁 시기 중국 국민당의 요직에 있었다. 이렇게 대만 출신이면서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다가 국부천대 때 대만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반산(半山)이라 한다. 대륙출신을 唐山 또는 阿山이라고 부른데서 나온 말. 모계는 외성인이다.
롄잔이라는 이름은 중일전쟁 때 중국의 연전연승을 바란다는 의미로 성과 맞춰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아들의 돌림자가 성(勝 승)인데 자신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은 듯. 그래서 자는 오히려 이름과 정반대로 영원한 평화를 뜻하는 융핑(永平)으로 지었다.
국립타이완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미국 시카고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순조로워 보였던 권력의 길
1969년 국립대만대학 교수였던 롄잔은 유엔 주재 중화민국 대표단의 고문으로 임명됐다. 같은 해 롄잔은 국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롄잔은 엘살바도르 주재 전권대사를 거쳐 국민당 중앙위원회 부비서장으로 승진했고, 1979년 당시 총통이었던 장징궈의 특사로써 라틴아메리카 6개국을 순방했다.
1981년 롄잔은 교통부장으로 입각하여 5년 반 동안 재직하였다. 롄잔은 재임 기간 타이베이의 지하철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통신 현대화를 촉진하고, 컨테이너 운송 및 항만 컨테이너 처리 능력을 확장했다. 이후 1984년 롄찬은 국민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1986년 5월 3일, 중화항공 334편 납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기장 왕시추는 중화항공 화물기 334번을 납치해 광저우 바이윈 공항으로 날아갔고, 왕시쥐는 중국민항의 도움을 받아 광저우에서 베이징까지 비행기를 몰았다. 당시 교통부장이었던 롄잔은 기체를 회수하기 위해 당시 행정원 부원장이었던 위궈화에게 기장의 송환과 기체의 환수를 구별하는 방안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당시 긴장된 양안 관계에 따른 비접촉, 비협상, 비타협으로 대표되는 "3불'(三不) 정책"에 명백히 도전했기 때문에 위궈화는 롄잔을 대동하고 장징궈에게 보고했다. 장징궈는 롄잔의 방안이 가지는 장단점을 분석한 뒤, 해당 제안을 승인했고, 행정원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태스크 포스를 구성했다. 롄잔은 사건의 해결을 위해 태스크포스의 주석을 맡았고, 몇 차례의 협상 끝에 중국 민용항공국은 마침내 중화항공 화물기를 홍콩으로 비행할 기장을 파견한 후 중화항공에 넘겨 처리하도록 했고, 비행기는 성공적으로 회수되었으며 납치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후 롄잔은 1987년 행정원 부원장을 거쳐 1988년 외무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자유중국과 바하마, 그레나다, 벨리즈, 기니비사우 간의 수교를 추진하고 레소토 왕국, 라이베리아와의 수교 재개를 추진했으며, 니카라과를 비롯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 세계 각국을 활발히 방문했으며,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7개국을 순방했다.
1990년 6월부터 롄잔은 타이완성 정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행정의 단순화와 국민의 편의, 규제의 합리화'를 추진하고, 군과 지방자치단체의 조직을 조정하고, 지방 경제 건설에 박차를 가해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단축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권력 투쟁에서의 패배
롄잔은 정부와 당내에서 다수의 요직을 거쳐 외견상 화려한 경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그의 경쟁자로 급부상한 마잉주는 외성인이자 해군육전대 군관 출신으로, 국가안전국과 총통부에서 근무하며 당시 총통인 하오보춘을 위시한 국민당내 절대적 신임을 얻은 반면, 롄잔은 본인 자체는 시안 출신이지만, 가문이 대대로 대만 출신의 본성인 가문임이었던 것이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결국 1996년, 하오보춘이 제9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국민당의 부총통 후보자로 마잉주를 지명함에 따라 롄잔은 차기 대권 주자에서 멀어졌고, 이후 2000년, 하오보춘이 병환과 당내 반대파와의 갈등에 의해 사임함에 따라 마잉주가 계임 총통에 등극하며 롄잔은 권력 투쟁에서 완전히 패배하였다.
권토중래
비록 차기 대권 주자에서 멀어졌지만, 롄잔은 1993년부터 마잉주 정권 2기인 2007년까지 행정원장으로 재임하며 자유중국의 경제 발전과 양안관계 정상화의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여 정치적 입지를 어느정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2007년 행정원장을 사임하며 정계를 은퇴한 이후에도 후진타오, 시진핑 등 중공의 수뇌부들과 여러번 갖는 등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평가
여담
선거 이력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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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 현재 | 정계 입문 정계 은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