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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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중화민국 초대 총통
장제스
(Jiǎng) (Jiè) (shí)(장개석) | Chiang Kai-shek
본명 장중정(蔣中正)
출생 1887년 10월 31일
저장성 닝보부 펑화현 시커우진
(現 중국 저장성 닝보시 펑화현 시커우진)
사망 1951년 XX월 XX일 (향년 63세)
중국 베이징시 공더린(功德林) 교도소[1]
재임기간 초대 총통
1948년 5월 20일 ~ 19XX년 XX월 XX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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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계구 장씨(溪口蔣氏)
부모 아버지 장조총, 어머니 왕차이위
형제자매 이복형 장제친
동생 장루이칭
배우자 마오푸메이(毛福梅) (1번째 부인, 기간: 1901-1921)
야오예청(姚冶誠) (첩, 기간: 1913-1921)
천제루(陳潔如) (2번째 부인, 기간: 1921-1927)
쑹메이링(宋美齡) (3번째 부인, 기간: 1927-1951)
자녀 아들 장징궈, 장웨이궈[2]
딸 장젠화, 장야오광
학력 봉록학당
금천공학
용진학당
일본육군사관학교 산하 진무학교 (중퇴)
종교 불교개신교 (감리회)
국적 (1887~1912)
중화민국 (1912~1928)
중화민국 (1928~1950)
중화인민공화국 (1950~19XX)
신체 169cm[3], 52kg, O형[4]
소속 정당
개석(介石)
군사 경력
임관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1기)
임관 국민혁명군
1911년 ~ 1952년
최종 계급
공식 초상화

개요

나는 중국이다. 중국은 나 없이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신생활운동을 비판한 외국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에게

중국의 군인, 정치가. 제2·4대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과 초대 중화민국 총통을 지냈다.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 쑨원의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11년 신해혁명에 참여하고 1923년 쑨원의 추천을 통한 소련 유학 이후 황푸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의 총사령관 직에 올라 북벌을 진행했으며 1928년 북벌 완수 선언 이후 국민정부의 수립을 선언하였다. 국민정부 수립 이후엔 1930년부터 무려 5차례의 공산당 토벌 작전, 일명 초공작전(剿共作戰)을 단행하였다.[5]

그러나 초공작전은 1936년 격려 차로 시안을 방문했다가 봉천군벌의 수장이었던 장쉐량에게 감금당하는 시안 사건 이후 중지되었으며 1937년엔 공산당과 제2차 국공합작을 맺어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946년 발발한 제2차 국공내전에서 패배하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돌려받은 대만으로 피신했으며 이마저도 1950년 진행된 타이완 상륙작전으로 인해 타이완이 함락되어 국민당은 1919년 창당 이후 30여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장제스는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19XX년 XX월 XX일 사형이 집행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되었다.

생애

유년 시절

1차 국공합작

쑨원의 사망 이후

2차 국공합작과 중일전쟁

2차 국공내전의 패배

최후

1950년 진행된 중국의 대대적인 타이완 상륙 작전에 중화민국군은 맥을 추리지 못하고 그대로 무너져 내렸으며, 결국 1950년 X월 X일 임시 수도 타이베이에 인민해방군이 입성하며 5년 간의 국공내전은 마오쩌둥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승리로 그 끝을 맺게 되었다. 리쭝런은 타이베이 함락 직후 곧바로 공산당에게 투항하였으며, 장제스는 총통부에서 붙들려 베이징으로 압송당했다. 베이징 압송 직후 그는 베이징의 공더린(功德林)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50년 X월 X일, 장제스와 국민당 주요 인사를 대상으로 한 재판이 진행되었다. 자본가의 앞에 서서 인민들을 탄압한 죄, 인민들을 징병하여 총알받이로 세운 죄, 국가총동원법으로 인민들의 재산을 무단을 갈취한 죄, 황허 제방을 폭파시켜 무고한 인민들을 집단으로 살해한 죄 등 10여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장제스는 재판에서 시종일관 침묵으로 이에 응답했으며, 결국 그는 10여개 죄목이 모두 인정되어 사형과 재산 몰수라는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는 항소할 의사가 없다 밝혔지만 그의 아내인 쑹메이링이 그를 대신해 항소하였다. 그러나 재판부는 해당 항소를 기각하였으며 결국 1950년 X월 X일, 그의 사형이 확정되었다.

1951년 X월 X일 새벽 5시, 그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향년 64세. 장제스의 요청에 수락한 교도관의 도움으로 군복 차림으로 산시군벌의 옌시산과 함께 총살형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사형 집행 직전 남길 유언이 없냐는 교도관의 물음에 그는 "중산 선생의 뜻을 잇지 못한 채로 이리 죽음을 맞이하니 어찌 유언을 남기겠느냐, 나는 유언을 남길 가치도 없다"는 말을 남겼다. 발포 직전에 그는 "중화민국 만세! 중산 선생 만세! 삼민주의 만세!"(中華民國萬歲! 中山先生萬歲! 三民主義萬歲!)를 외쳤으며 이 말을 외친 직후 발포된 총알에 후두부를 맞고 절명했다. 시신은 화장되어 교도소에 뿌려졌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사상과 성격

장제스주의

장제스주의(蒋介石思想, Chiangism)는 유교와 삼민주의에 기반을 둔 우익 권위주의, 민족주의 사상이다.

여담

어록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중화민국 2,430 (90.03%) 당선 (1위) 초선[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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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재 공더린 교도소는 사라졌으며 그 역할은 베이징 친청 교도소가 대신하고 있다.
  2. 친부가 다이지타오라는 의혹이 있다. 예전엔 아예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현재는 찬반 여론이 엇갈린 상태.
  3. 그 당시 중국인 평균키보다 컸다.
  4. 자신이 청년기에 받았던 신체검사에서 그 정도 체격이였다고 인정했다. 다만 청년기의 자료이므로 국공내전이 끝날 무렵인 1945~1950년에는 167cm 정도로 줄었을 가능성은 있다.
  5. 1936년 6번째 초공작전이 시행될 예정이었으나 시안 사건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6. 1950년 XX월 XX일 멸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