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독립유공자 | |
---|---|
대한제국 제13-15대 국무총리대신 장준하 張俊河 | Chang Chun-ha | |
출생 | 1918년 8월 27일 |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면 연하동 (現 평안북도 신의주시 연하동) | |
사망 | 1999년 8월 17일 (향년 80세)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준하내각국무총리묘소 |
재임기간 | 제13대 국무총리대신 |
1980년 6월 17일 ~ 1982년 4월 5일 | |
제14대 국무총리대신 | |
1982년 4월 5일 ~ 1985년 2월 23일 | |
제15대 국무총리대신 | |
1985년 2월 23일 ~ 1987년 6월 29일 | |
[ 펼치기 · 접기 ] |
개요
장준하는 대한제국의 제13-15대 국무총리대신이자 독립유공자[1]이다.
생애
일제강점기에 교육 활동을 하였고, 일본군에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하여, 1944년 1월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되었으나 그해 7월 장쑤성 쉬저우에서 탈출,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국민혁명군준위가 되었다. 1945년 대한제국 임시정부 충칭본부를 찾아가 1945년 2월부터 한국광복군 소위로 복무하였다. 한국광복군으로 재직 중 미국 CIA의 전신인 전략첩보대(OSS)에서 활동하면서 3개월간 국내 진공작전에 가담하였고, 8월 서울 진공 작전 당시에는 국내 밀파 특수공작원으로 활약하였다.
1953년 월간 잡지 사상계를 출간하기 시작하였고, 사상계는 황실과 중앙정보부의 보도관제 및 언론탄압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자유 마지막 등불같은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사상계는 한일기본조약이나 5.18 광주 발포 사태 등을 폭로하여 지식인과 시민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으며, 장준하 본인도 한일회담 반대운동, 베트남 전쟁 파병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장준하 역시 이범석과 독립운동을 함께 하였던 동지였기에 중앙정보부가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었다. 1974년 신민당에 입당하여 신민당 언론자유위원장을 맡았고, 동년 언론자유청원백만인서명운동 선언문을 발표한다.
1975년 10대 민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으로 자신의 고향이자 한국독립당의 텃밭이였던 신의주에 출마하였고, 뛰어난 연설력과 자유를 향한 호소로 신의주를 포함한 북부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겨우 28표차로 한국독립당의 김형욱 후보를 이기고 당선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국회의원 당선 이후 초강경 공화주의자들의 대표로서 활동하였고, 이범석과의 인연과 독립운동가라는 명성때문에 중앙정보부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울수 있었다는 점을 이용하여 신민당의 스피커로도 활동했다.
1976년 9월 열린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김대중과의 단일화를 통하여 김영삼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었다. 총재에 취임한 이후 김대중을 부총재 겸 민의원대책위원장에, 김영삼을 민의원 원내총무에, 이기택을 정무조사위원장에 임명하며 계파를 안배하였고 취임식에서 의내제파던 공화주의파던 중요한 것은 독재와 반민주의 종식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며 신민당의 단합을 주도하였다. 그뒤 이듬해인 1977년 열린 11대 민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역대 최다의석을 거두게 했고 험지였던 이북지역에서도 여러 의석을 확보하였다. 1979년 김영삼과 김대중이 반황실 발언[2]으로 의원직에서 제명되자 이에 반발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직접 시위를 주도하였다.
1980년 5월 18일 김대중의 복권을 주장하던 전남대생이 경찰의 발포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사상계를 통해 전국에 알렸고, 장준하 총재도 광주로 직접 내려가 시위대와 함께 단식투쟁에 돌입해 경신혁명을 주도하면서 이범석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게 된다. 결국 흥영제가 생전퇴위를 선언하고 이범석 총리도 하야를 선언하면서 20년간의 친정시대를 종식시킨다.
1980년 민주화 이후 치루어진 12대 민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이 압승을 거두며 국무총리대신에 취임하였다. 취임 이후 초강경 공화주의자답게 황제에게 무릎을 굽히고 충성 선서하는 것을 거부하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한국독립당은 매우 모욕적이고 황제폐하를 무시한 행위라고 규탄했지만 아버지와 달리 민주주의에 호의적이였던 명덕제는 오히려 옹호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문에 의외로 명덕제와 장준하 총리간의 케미스트리는 상당히 좋았던 편이였으며, 오히려 명덕제 본인이 장준하 총리에게 황실의 권위를 먼저 내려놓겠다고 전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총리로 집권하면서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였고, 민주화 이후 정치를 안정시키는 한편 3저 호황과 산업 발달을 주도했다. 그리고 기존의 친정체제 헌법을 고쳐 1981년 부분적으로 개정한 헌법을 통과시켰으며, 그뒤로도 정계 및 국민들과의 논의를 통하여 1987년 최종 민주화 헌법[3]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 국회에서 개헌시켰고 개헌안이 통과되자 본인의 임무를 완수했다며 의회를 해산함과 동시에 총리직에서 사임하여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 은퇴 후 1988년 옛 사상계의 창립맴버들, 언론 자유운동을 주도했던 청년기자들과 함께 한겨레신문을 창간하여 초대 사장을 역임했고 한겨레신문의 논설위원을 동시에 지내다가 1999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평가
그가 없었다면 21세기에도 대한제국은 봉건적 국가였을겁니다. 김대중 |
현실주의적 몽상가 김영삼 |
인간 관계
이범석
장 후배님, 이 추한 선배는 추한 몰꼴로 물러나지만 우리 장 후배님께서 바로 잡아주시겠죠? 황국을 잘 부탁하겠소이다. 총리께서 바라는 이상을 마음껏 이뤄보시구려. 이범석[4] |
사적으로는 독립군 선후배 관계로 맺어진 끈끈한 우정이 있었지만[5], 정계에서는 늘 정적으로서 대립하였던 애증의 관계였다.
김대중
둘 다 신민당 내 공화파로서 이해 관계가 잘 맞아 떨어졌기에 우호적이였다.
김영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였지만, 강경 공화파였던 장준하와 달리 김영삼은 온건 입헌군주정파였기에 대립하기도 하였다.
김종필
장준하 인생 최대의 아치 에너미.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75 | 제10대 민의원 선거 | 신의주 을 | 틀:신민당 (동방의 등불) | 46,255표 (40.7%) | 당선 (1위) | 초선 |
1977 | 제11대 민의원 선거 | 56,981표 (44.5%) | 재선 | |||
1980 | 제12대 민의원 선거 | 72,345표 (55.5%) | 3선[6] | |||
1982 | 제13대 민의원 선거 | 69,153표 (50.0%) | 4선 | |||
1985 | 제14대 민의원 선거 | 84,530표 (63.5%) | 5선[7]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틀:신민당 (동방의 등불) | 1974 - 1999 | 정계 입문 정계 은퇴 사망 |
기타
- ↑ 독립유공 작위를 수여받아 귀족이 될 자격이 있었지만 본인이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는 초강경 공화주의자였기에 거부하였다
- ↑ 황실모독법이 그 이유였지만 황실모독법은 당시 사문화되었던 법률이였기 때문에 정부가 꼬투리를 잡은것이였다.
- ↑ 아무리 공화주의자라도 국민들의 황실 지지 여론이 높았기에 황실의 정치불간섭과 귀족원→참의원 명칭변경 및 귀족대표 인원 축소·평민대표 선출 등 민주적인 조항을 대거 넣는 것으로 타협했다.
- ↑ 1983년 병문안을 온 장준하에게 남긴 말. 이후 세상을 떠났기에 사실상의 유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 실제로 이범석은 비록 정적이였지만 후배였던 장준하를 여러번 중앙정보부의 마수로부터 구해주기도 했다.
- ↑ 장준하 내각 출범
- ↑ 1987.6.29 국무총리대신직 사퇴 및 정계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