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티니아 공화국 ረፑብሊች ኦፍ ብሪታንኒ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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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 |
국장 | ||||||||||||||||||||||||||||||||||||||||||
표어: ፍሬዶም ኣንድ ዒንደፐንደንቸ (독립과 자유) | |||||||||||||||||||||||||||||||||||||||||||
국가: 전진하라, 브리튼이여 (ፎርዋርድ፣ ብሪታኢን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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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브리타니아 공화국(브리튼어: ረፑብሊች ኦፍ ብሪታንኒኣ)은 북프랑지의 우문굴루쿠두 제도에 위치한 공화국이다.
과거에는 아바나만들라(줄루어: ኣባናማንድላ)로도 알려져 있었으나, 1980년 브리타니아 독립 혁명을 거치면서 "프랑지화 정책"의 일환으로 브리타니아라는 프랑지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상징
국호
브리타니아는 기원전부터 약 5세기까지 우문굴루쿠두 제도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원시 부족인 브리튼족의 이름이다. 브리튼족은 독자적인 문화를 갖고 있었으나, 5세기 경 앵글로-색슨족의 침공으로 멸망했고 이후 아일랜드족, 웨일스족, 스코틀랜드족 등으로 나뉘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 이후 프랑지 대륙 전체에 탈식민주의 흐름이 우세해지면서, 보다 자주적인 이름을 가져야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베키지즈웨 애틀리(ብሀኪዚዝወ ዓችሌ) 등의 자주독립론자들은 고대 브리튼족의 이름을 따와 본인들을 브리튼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79년 독립혁명 이후, 독립운동가들은 기존 식민주의의 이름이었던 아반다만들라를 폐지하고 브리타니아라는 신국호를 채택하는 안건이 만장일치로 통과되면서 1980년부터 브리타니아 공화국이 되었다. 활용형은 "브리튼"이다.
과거에는 아반다만들라(ኣባናማንድላ)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는 줄루어로 "힘이 강력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15세기 처음 브리튼섬을 발견한 탐험가 타보 음키제(ጥሃቦ ምክሂዘ)가 앵글로 색슨인들이 무척 거칠고 도끼를 잘 사용한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붙였다.
구체적으로 브리튼의 국호 변천사를 보자면 이러하다.
- 줄루왕국 령 아반다만들라 (ዓባንዳማንድላ ካዡሉ): 1888년~1964년
- 아반다만들라 공화국 (ረፑብሊች ኦፍ ዓማንዳማንድላ): 1964년~1979년
- 아반다만들라 브리타니아 공화국 (ረፑብሊች ኦፍ ዓማንዳማንድላ፡ብሪታንኒኣ): 1979년~1980년
- 브리타니아 공화국 (ረፑብሊች ኦፍ ብሪታንኒኣ): 1980년~
국기
브리타니아의 국기는 1980년 독립과 함께 제정된 국기이다. 국기는 빨간색과 초록색 띄가 감싸는 흰색의 삼색기로 되어있으며, 왼쪽 상단에 각각 14~18세기 브리튼 지역에 존재한 고대 왕국인 스코틀랜드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국기가 그려져있다.
빨간색 국기는 독립에 대한 브리튼인의 열망을, 하얀색은 스코틀랜드 하이랜드의 드넓은 고원을, 초록색은 남잉글랜드의 푸른 평원을 의미한다.
국가
전진하라, 브리튼이여!(ፎርዋርድ፣ ብሪታኢንስ፦) | |
(1절) ዒብሪትሃኒ፣ አያከ ያባ ኢምባሊ የዝወካዚ ላሰፍራንጊ፣ ዑዙዘ ኢጋማ ላክሆ ንጀንጎኩዚመላ፣ ፉትሂ ኡሱፕሂንደ ዋባ ዪንካዚሙሎ። ዒንካዚሙሎ ካ፡፪፲፻ ኣዪዛንገ ኢንያማላለ ንጊስሆ ናማንጀ። ዑባኒ ኦዮፕሂንደ አዘ አዝወኒ ላኪትሂ ፉትሂ ኣሲቡሰ፧ (후렴) ጺዪንዛሎ አዚቅሀንያዮ ያማ ብሪቶንስ ዑትሃንዶ ልወትሁ ንጋወ ኣሉሶዘ ልዋፕሁካ ዽሉለላ አኩዚመለኒ ኦኩፕሁመለላዮ ናሰንኩሉለክወኒ፣ ኒና ባሰብሪትሃኒ፦ |
(1절) 한때 프랑지 대륙의 꽃이었던 브리튼이여 그대는 독립으로서 이름을 얻었고, 다시 영광스럽게 되었구나 2000년의 영광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 누가 다시 우리의 땅에 찾아와 우리를 지배하겠는가 (후렴) 우리는 자랑스러운 브리튼인의 후예 그대를 위한 우리의 사랑은 영원히 꺾이지 않을터이니 번영할 독립과 자유를 향해 전진하라, 브리튼이여 |
브리타니아의 국가는 전진하라, 브리튼인이여!(ፎርዋርድ፣ ብሪታኢንስ፦)이다.
역사
고대 브리타니아
철기시대 때부터 브리튼 제도에는 브라티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들은 켈트파의 일부로 분류되고 있다. 기원후까지 이들은 독자적인 국가나 문명을 이루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5세기에 북프랑지 계통 유랑민족인 앵글로 색슨족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5세기부터 10세기까지 앵글로 색슨은 혼란스러운 고대 수준의 문명을 발전시키다가, 대략 10세기 경부터 남부~중부 브리튼 제도를 통일하고 이를 잉글랜드 왕국으로 칭했다. 이때를 고대 잉글랜드 왕국(1100?~1300?)이라 칭한다. 그러나 고대 잉글랜드 왕국은 1300년대 몽골의 침공과 이로 인한 흑사병의 유행으로 인해 멸망했고, 이후 1700년대까지 브라티니아에는 문명이라 할법한 독자적 국가가 세워지지 않게 되었다.
악수미아 문명의 도래
1549년 악수미아의 줄루 왕국이 처음으로 브리튼을 방문하였다. 이 지역을 발견한 타보 음키제는 "힘이 센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에서 아반다만들라(ኣባናማንድላ)라고 칭했다.
악수미아의 선진 문명을 흡수한 브리튼 제도의 문명은 빠르게 발전해나갔으며, 에티오피아의 그으즈문자를 도입해 독자적인 문화와 역사서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에따라 1683년 경 브리튼 제도의 첫번째 근대 문명이라 볼만한 앵글로 왕국이 건국되었다. 앵글로 왕국은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 약 200년간 번창하였으며, 1700년대에는 런던 지역에서 음분두 왕국을 몰아내고 땅을 남쪽으로 넓히기도 했다. 이에 따라, 앵글로 왕국은 프랑지 대륙에서 몇 안되게 강성한 문명을 이뤘다.
줄루와의 전쟁과 복속
1880년대 들어 줄루 왕국이 프랑지 대륙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식민제국을 건국하고자 함에 따라, 앵글로 왕국도 위기에 처했다. 앵글로 왕국의 여왕 빅토리아는 재상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과 함께 줄루에 맞선 줄루-앵글로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창과 방패로 무장한 앵글로의 전근대적 군대는 총과 기마부대를 앞세운 줄루 왕국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1888년 앵글로 왕국은 멸망하고 빅토리아 왕이 줄루 왕국으로 압송, 글래드스턴은 처형당하며 콰음키제 식민지[1]가 세워졌다.
콰음키제 식민지
콰음키제 식민지 성립에 많은 브리튼인들이 반발하였으며, 1896년과 1897년에 줄루 북프랑지 회사의 수탈에 반대하는 현지인들의 봉기가 있었다. 이러한 반란이 실패한 후, 템베카 구메데(ጥሀምበካ ጙመደ) 행정관은 악수미아인들에게 유리한 토지 조정을 통해 현지인들을 쫓아내고 농업을 줄루인의 것으로 독차지했다.
줄루 왕국은 브리튼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지명을 고쳤으며[2], 브리튼식 이름 작명을 금지했다. 또한 석탄, 나무 등 수많은 자원이 약탈당해 콰음키제 식민지인들은 무척 굶주렸다. 한편 흑인들의 콰음키제 이주도 시작되어 1930년대에는 인구 전체의 5.7%가 흑인으로 분류되었다.
1923년, 줄루 당국은 서콰음키제(아일랜드)를 행정적으로 콰음키제와 합쳤다. 이에따라 1923년 10월 1일 첫번째 통합 헌법이 발표되었고, 프랑지인들이 완전히 배제된 1922년의 국민투표를 통해 자치령으로 선포되었다. 콰음키제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 줄루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1945년 이후, 프랑지 대륙 전역에서 탈식민 운동이 일어나며 콰음키제 내에서도 독립의 열망이 꿈틀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자이자 무장독립론자 베키지즈웨 애틀리(ብሀኪዚዝወ ዓችሌ)와 외교독립론자 움베네네 이든(ዑምብወነነ ዐደን)이 익히 잘 알려져있다.
콰음키제 공화국의 성립
1964년, 서콰음키제가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독립하자, 줄루 왕국은 콰음키제 역시 독립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콰음키제에 거주중이던 흑인 이민자들은 이러한 조치에 반대해 1964년 우탄디웨 쿠데타로 왕정을 폐지하고 흑인 우월주의 정권인 콰음키제 공화국을 성립했다.
콰음키제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인구 12%를 차지한 흑인이 88%의 백인을 2등 신민 취급하며 억압하는 구조였다. 백인들은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고, 공민권이 제한받았다. 단 민권이 없었으므로 세금은 면제받았다.
콰음키제 공화국은 독립과 즉시 국제적으로 제재당했으며, 프랑지의 여러 독립국가들은 콰음키제 공화국의 비행기 통과를 금지하고 수출을 금지했다. 또 국제 체전에도 출전할 수 없게 되었다. 이런 고립이 심해지면서, 1970년대 들어 콰음키제는 두차례의 석유파동을 견딜 수 없게 되었고 백인들의 저항도 심해지게 되었다.
브리튼의 독립
1979년, 논나흘라흘라 대처(ኞናህላንህላ ጥሃትጨር)가 이끄는 브리튼 백인연맹(ብሪታኢን ውሂቴ ጰፕፕሌእስ ዓልሊኣንቸ; ብውጵዓ)이 오랜 내전 끝에 콰음키제 공화국군을 패퇴시키고 수도 우탄디웨를 포위했다. 결국 흑인 정권의 수장 은코시 움코모(ኝኮሺ ዑንኮሞ)는 대처와의 협약을 통해 콰음키제 브리튼 공화국의 성립을 발표했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대처의 백인연맹이 압승하면서 헌법을 개정, 브리튼은 100여년만에 자유를 되찾게 된다.
대처의 독재
처음에는 백인연맹과 흑인이 중심이 된 콰음키제 동맹, 그 외에 브리튼 공산당, 사회민주당 등 다당이 경쟁하는 구도였으나 대처의 리더십에 따라 브리튼이 발전함에 따라 다른 당이 지리멸렬하게 되었다. 이는 독재로 이어졌고, 1987년 논나흘라흘라 대처는 다른 정당을 해산하고 백인연맹의 일당 독재를 선언했다. 그녀는 이를 "흑인의 우위를 해소하기 위한 일시적인 백인 우위 정권"으로 선포했다.
대처는 1990년대 브리튼인이 주가 된 아일랜드 북부를 재침공해 국제사회의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며, 급속한 민간부분 활성화 정책으로 경제에 무리를 주어 점차적으로 브리튼을 빈국으로 만들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초인플레이션까지 발생하면서 브리튼이 세계 최빈국으로 떨어지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이미 2010년 초부터 치매로 인해 스스로 공무를 볼 수 없었던 대처는 2013년 사망했고, 그 후임자 무조레 캐머런(ሙዞረ ጫመሮን)이 점진적인 민주화를 약속했다.
점진적 민주화와 한계, 오늘날
캐머런은 2015년 국민투표를 통해 새헌법을 통과시키겠다고 했으나, 이 헌법은 기존 흑인 기득권층의 반발과 백인 노동자계층의 회의적 반응으로 인하여 난항을 겪었다. 결국 2016년 국민투표에서 52% 대 48%로 헌법이 부결되며 캐머런은 정권을 잃게 되었다.
후임자 움루카사 존슨(ዑምሉካሳ ጆህንሶን)은 강경파로 이전까지의 민주화 논의를 중단하고, 제한적인 다당제와 대통령 직선제만을 허용하는 부분적 민주화로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그와 별개로 존슨의 국민적 지지는 높은 상태이며, 2016년 대선에 이어 2022년 대선에서도 승리해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한편 2023년에는 기존 흑인 지주들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발표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사회
인종 구성
2024년 기준 인구 통계로 흑인이 3.5%, 백인이 92.2%, 혼혈이 4.0%를 차지하고 있다. 과거에는 흑인 인구가 최대 12~13%까지 잡힐 정도로 많았지만, 1980년대 이후 백인 우월주의 정권이 들어서며 대부분 본국인 줄루로 이민 간 상태다.
백인 인구 중에서는 대다수가 앵글로 계통이며, 소수는 스코트, 아일랜드, 웨일스 계통이다. 그 외에 흑백 혼혈은 4%를 차지하는데, 대체로는 백인으로 분류되는 편이다. 그 외에 극소수 아시아인들도 있다.
정치
의회민주주의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민주공화국이다. 정치적 불안정성이 높은 국가로, 1980년 이래 50여년 가까이 독재를 이어가고 있는 브리튼 백인연맹과 야당 간 갈등이 크다.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점차 발전하고 있는 국가로 평가받는다. 2016년까지는 일당제 국가였으나, 2016년 이후 제한적으로 다당제를 허용하고 있다. 또한 대통령 직선제를 통과시켰다. 그럼에도 인권탄압과 야당 탄압이 극심해 여전히 권위주의적 국가로 분류된다.
대통령 중심제로, 임기는 6년이다. 이론상 무한히 연임할 수 있고 현 대통령임 움루카사 존슨은 2016년 당선 이후 현재까지 8년째 집권하고 있다.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수기에 불과한데, 2022년 대선에서 존슨 대통령이 97.2% 득표율로 당선되었던 것을 예로 들 수 있다.[3]
경제
빈부격차가 극심한 국가로, 1980년 기준으로 전체 인구의 12%를 차지하는 흑인이 전체 부의 98.5%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1980년부터 2013년까지 집권한 대처 대통령은 백인 우월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땅을 강제로 백인 농부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문제는 백인 농부들이 제대로 된 농업 기술이 없다보니 농업 생산력이 턱 없이 낮아져 경제가 형편이 없어졌다.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일본보다도 경제 사정이 나빴을 정도.
2010년대 이후로는 그나마 신흥 산업 투자와 흑인의 토지 소유를 허용하여 경제가 호전되었고 2024년에는 처음으로 국민 소득이 2,000무뉴 선으로 올라갔다. 또, 중국의 일대일로 계획에 참여하고 있어, 기초 인프라가 2020년대 들어 척척 지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2020년대 들어 다시 흑인들이 경제적 부를 차지하고 있어 백인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이 큰 상태이다. 게다가 2023년에는 흑인 농부들에게 빼앗긴 땅을 되돌려주겠다는 정책을 발표해 백인 농부들이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외교
줄루와의 관계
식민지와 피식민지라는 관계 때문에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지만, 미우나 고우나 협력하고 사는 사이이다. 일단 같은 말이 통하고 어느정도 문화도 같기 때문. 여러모로 현대 대화가 한국을 보는 시각과 비슷한 편이다.
중국과의 관계
국민적으로 중국에 대한 시선이 좋은 편이다. 일대일로에 참여하고 있고, 이에 따라 중국 자본이 유입되며 인프라 건설 속도가 빨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수도에서 사고를 치고 무례하게 군다며 싫어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