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

[역사] 오스트프로이센 왕국

- 1945년 -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이 지역을 영유하고자 했고 연합국은 이 지역에 대해 소련 영유권을 인정하고자 앵간히 노력했다. 그러나 쾨니히스베르크는 엄연히 독일인의 권역이었고 물론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독일을 완전히 분할하는데는 이견이 없었으나 소련의 부동항이 스웨덴과 덴마크 등 자유진영 경계로부터 최단거리에 위치하게 되는것만으로도 큰 부담을 느끼는 것이었다.

 

설상가상 폴란드가 공산화 조짐이 보이며 스탈린의 야욕이 드러나자 미국은 보다 못해 폴란드 간섭을 하고 나섰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폴란드 정부수립을 위한 자유선거 실시를 조건으로 쾨니히스베르크의 소련화를 묵인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명목상으로 약속하였을 뿐 1945년 9월이 될때까지 폴란드 자유선거는 실시되지 못하고 되려 공산군이 동독까지 밀고 들어오게 된다.

 

이에 미국은 독일 분할을 무효화라는 초강수를 둠으로써 폴란드 자유선거 약속을 무시한 스탈린에 대해 쾨니히스베르크와 동독일을 폴란드 대신 내놓아라며 으름장을 두었다. 소련과 미국 모두 2차 세계대전으로 산업-군사적 피해가 막심했지만 3차 대전까지 벌일 각오를 하자 영국, 프랑스 등 연합국들은 중재에 나서게 된다. 이후 9월 말에 벌어진 회담이 그단스크 회담이었다.

 

이때 독일은 서방이, 폴란드는 소련이 가져가는 것으로 합의되었고,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령이지만 폴란드에 귀속하는걸로 중재하였다. 따라서 쾨니히스베르크는 폴란드령이 되었고, 독일은 동서로 분리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후 소련군이 이 지역과 단치히에 대한 군사적 목적의 기지를 건설하거나 독일인을 학살하는 등 쾨니히스베르크의 소련화를 포기하지 않게 되면서 1년 4개월만에 다시 미독소 간 회담을 열게 된다.

 

- 1947년 -

1947년, 쾨니히스베르크의 운명을 거머쥔 일명 Last Game, 슈체친 회담에서 소련은 쾨니히스베르크 양도를 계속해서 주장했으나 대신 독일은 슈체친 등 베를린과 가까운 서폴란드 지역의 양도를 조건으로 내걸었고 미국이 쾨니히스베르크의 영세중립화를 중재안으로 제안한다. 결국 이 논의는 UN에 최종 회부되었고 다음과 같이 합의되었다.

 

01. 독일은 슈체친 등 옛 독일의 동부 고토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는 조건 대신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세계 평화 증진을 명목으로 쾨니히스베르크 지역을 프레골랴강 기준 남북으로 분할하여 소련과 함께 통치한다.
02. 양국의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해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로부터 20km 반경으로부터 군사를 배치하지 않으며 군사 이동시 사전 통보 및 군사 훈련 금지를 원칙으로 한다.

03. 양 지역에 대한 자치권 행사는 양국의 결정에 따르되 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을 금하며, 양국의 헌법에 따른 자유를 최대한 보장한다.

 

그런데 쾨니히스베르크 자치주의 반쪽짜리 독일화에 분노한 일부 주민들로 구성된 사회는 큰 혼란에 빠졌다. 일단 역사적으로 독일의 고토임에 절대다수 독일인의 거주지역이었음은 분명한데 월경지이며 자치권이 없어 독일의 소규모 지원에 연명해야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의 공산당 지부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이곳은 이념의 대립장소로 전락한다. 

 

이에 남쾨니히스베르크(폴란드어:바르민스코마주르스키에)는 아예 독일로부터 독립하고자 나치 독일 패망후 방황하던 호엔촐레른 왕가의 빌헬름 황태자를 추대하였다. 이는 북쾨니히스베르크(러시아어:칼리닌그라드)의 공산화에 대항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인물임과 동시에 독일 정부와 대치가능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태자는 히틀러를 잠깐 지지한 적이 있었지만 이후 나치와의 연을 완전히 끊어 부담이 제거되었다.

 

-1948년-

1948년 1월, 남쾨니히스베르크는 소련과 공산 폴란드 그리고 새로 출범한 칼리닌그라드 인민 공화국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오스트프로이센 왕국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자본민주주의에 입각한 입헌 왕정 체제를 수립하기에 이른다. 본래 공화정 논의도 끊임이 없었지만, 왕정 체제가 수립되게 된 핵심적 배경만 말하자면, 결국 일단 인구도 적은 마당에 기득권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구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써 융커의 세력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독일은 이를 승인할수도 승인 안할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승인할시에 나중에 호엔촐레른 왕가의 복귀로 공화정 체제가 위기를 맞을수도 있었고, 승인 안할시에 소련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련을 감시할 수 있도록하는 감시망 체제 및 동독을 넘보는 소련과 폴란드에 대한 견제권을 미국과 독일이 잃게 되는 것이었다. 또한 오스트프로이센을 인정하지 않으면 칼리닌그라드 공산정부도 인정하지 않아야했지만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독일인 자유 통행 요구에 따른 사전 채결된 조약으로 이미 인정한 상태였기에 무를 수도 없는 외교적 실책이었다.

 

소련은 또한 이를 기회로 삼아 오스트프로이센을 아예 중립국화하는 것으로 하여 영세중립국이자 자주국인 오스트프로이센에 대한 독일과 미국의 군대 주둔은 허용될 수 없다며 국제사회에 주장하였다. 다만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을 약속하며 영구히 불간섭할 것을 함께 약속하였다. 이는 물론 오스트프로이센이 독일과 미국군의 주둔을 허용하지 않고 관계를 맺지도 않으며 소련 물건과 소련인에 대한 무역을 허가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당연하게도 독일과 미국은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빌헬름 당시 황태자는 독일과 미국에 의존하면 소련과의 무력 충돌이 우려될 수 있고 프로이센 유산이 가득한 왕국의 땅만 폐허가 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승인하였다. 대신 왕정에 따른 공산당 창당 불허 등 반소련으로 비쳐질 수 있는 자국의 결정에 대해 소련은 묵인할 것을 확약받았다.

 

이로써 오스트프로이센의 1대 왕이자 전 독일 제국의 황태자였던 빌헬름 폰 프로이센은 빌헬름 3세로 즉위하여 못다한 왕정의 부활의 꿈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약소하게나마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세워진 헌법을 토대로 이곳의 남아있는 독일인을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공산 독일 세력을 칼리닌그라드로 추방하면서 영세중립국으로써 어떠한 이념도 추구하지 않고자 했다.

 

-1951년~1988년-

1951년, 빌헬름 3세의 사망이후 루이 페르디난트 왕이 즉위하였고 소련과의 직접적인 무역을 피하고자 했던 일부 서방 국가들이 오스트프로이센을 중개무역의 거점으로 두면서 무역사업이 크게 발전, 많은 돈을 벌어들였다. 소련은 이후 무역량을 줄이면서 성장을 경계했으나 그럴때마다 루이는 아예 미국으로 건너가 서방의 경제적 원조를 구하고 영토 판매를 대놓고 언질하며 소련을 압박했다. 즉 양줄타기를 열심히 한 덕분에 영세중립국으로써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겨우 연명해올 수 있었다.

 

1965년, 독일에서 대통령 출마 제의가 거론될 정도로 독일에서 정치적 혼란이 있었을때에도, 그는 영세중립국의 군주로써 남아있지만 독일인으로써 독일의 혼란이 종식되고 재기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며 독일인을 축복했다. 따라서 한때 독일의 진보주의자들은 그가 돌아온다면 독일 공화정이 위태할 것이라며 암살 기도까지 얘기할 정도였다. 소련도 영세중립국 답게 행동하라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1967년, 아내인 키라 여대공이 사망하자 장례식에 합스부르크 왕가 수장, 영국의 찰스 왕세자 등 여러 주요 서방 인사들이 참가하였고, 소련의 압박 수위는 최고조에 달해 이에 항의하고자 칼리닌그라드를 아예 병합해버리고 그 위에서 군사 훈련을 전개했다. 물론 그럼에도 루이 왕은 침략 명분만큼을 주지 않기 위해 장례식이 끝나는대로 상황을 정리하고 소련에 친서를 보내는 등 관계 개선 태도를 유지하였다.

 

-1989년~-

그러던 1989년, 동유럽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헬무트 콜 독일 총리,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칼리닌그라드 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소련에 압박을 불어넣었다. 따라서 1990년, 발트 3국이 독립을 이끌어내면서 독일의 고토 포기 선언과 미국의 오스트프로이센에 대한 외교 기조 정책에 따라 가장 가까운 칼리닌그라드도 오스트프로이센에 반환하게 되었다. 병합 자체가 무효가 된 것이었다.

 

또한 1991년에는 8월 쿠테타로 소련이 빈사 상태에 놓이면서 보리스 옐친 등 처음으로 소련의 인사들과 루이 페르디난트 왕이 만나게 되었고 이곳의 소련 경제권은 몰수하지 않고 인정하는 등 포용적인 태도를 보여 칼리닌그라드와의 병합을 완전히 인정받는다. 이로써 칼리닌그라드라는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이후 1992년, 급속도로 독일과의 연방화가 추진되는듯 했지만, 이에 회의감을 느꼈던 발트 3국과 폴란드의 반발 그리고 체제가 다르다는 점에서 무기한 논의가 지속되었고, 결국 1994년, 루이 페르디난트 왕이 병사하고 베를린에서 장례가 이루어지면서 독일의 왕가에 대한 즉위, 장례 및 안장을 독일 정부의 뜻에 따라 독일 땅에서 다하는 것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어 관례로 대신 자리잡으면서 연방화는 무산되었다. 이후 삼남 루이 페르디난트의 양위 거부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게오르크) 왕베를린에서 즉위하고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프로이센 왕국을 독일 왕관령으로 습관적으로 불렀다. 독일 왕관령이라 함은 독일이 왕국이며 왕은 그곳만 지배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한때 독일과의 관계가 급속도로 좋아지지 않았지만, 독일인의 독일 제국에 대한 향수를 일으키기는 충분했기에 왕정 복고의 말이 야당 사이에서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이는 폴란드 등 국제사회의 반발을 살 것이기에 결국 희망 사항으로만 남았다.

 

-21세기-

2014년, 계속 영세중립국을 주창하였던 오스트프로이센 왕국은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합병하자 이를 빌미로 영세중립국 포기를 선언하고 나토에 가입하여 반러시아 체제에 합류한다. 그리고 러시아인을 일부 추방하여 강경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국경이 맞닿아있지 않아 러시아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반면에 이를 계기로 나토군이 주둔하여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안보 능력을 갖추었고 관광업으로써 더욱 성장하며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룩하게 되었다.

 

2022년, 독일 쿠테타 모의가 발각되었을 때 오스트프로이센 왕국은 전혀 무관함을 밝혔고, 같은 독일인의 국가이지만 우리는 연합이 아닌 동반 관계자로 남아있기를 바란다며 선을 그었다. 다만 독일 정부에 왕실의 유산을 돌려받기를 원한다며 외교 관계를 흔들어 놓는 등 부정적인 일이 몇번 있었기 때문에 애초에 독일 민중 사이에서 인식은 별로 좋지 않았다. 만약 루이 페르디난트 왕이 10년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다면 독일은 정말 왕정복고가 이루어졌을 수도 있었다.

 

*** 해당 역사는 UNIONJET가 작성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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