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봉 (라선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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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 2, 3, 4, 5, 6, 7대 국가최고권력자이자 영웅
고려민주해방공화국 정부 수립자
김원봉
출생 1898년 9월 28일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감천리 57번지

(現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감천2길 30-2)

국적 고려민주해방공화국
거주지 라선 특별시 라진구역 김원봉 저택
사망 1985년 11월 9일 (87세)
라선 특별시 라진구역 김원봉 저택
임기 제1, 2, 3, 4, 5, 6, 7대 국가최고권력자
1948년 2월 17일 ~ 1983년 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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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최석진의 딸[1], 박차정[2], 최동선[3]
자녀 김중근, 김철근
그 외 가족 김봉철, 김학봉
본관 김해 김씨
종교 무종교
신체 163cm
소속 정당 고려민주당
성향 김원봉주의
사상 파시즘

개요

일제강점기 시절 극우 계열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자 고려민주해방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독립운동가로서는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어 박재혁, 최수봉, 김익상, 김상옥, 김지섭, 나석주 등 많은 단원들의 일제 요인 암살과 식민통치기관 파괴 활동을 이끌었고, 중국 관내에서 독립운동진영 통합 운동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의 총서기로 활동하였으며, 군사조직으로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총대장이 되어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력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다. 이후 일부 대원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등으로 활동하였다.

독립운동 노선에 있어서 그는 무장투쟁 이외의 다른 방식의 독립운동을 비판하면서 독립운동의 주류인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고 때문에 우익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또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혁명가 최창익, 김두봉 등과 치열한 헤게모니 다툼을 벌였다. 초기에는 극좌 독립운동 단체에서 의열단 활동을 한 김원봉이 압도적인 위세를 과시했으나 1940년 이후 공산주의자 최창익과 김두봉이 주도권을 잡으며 연안파가 탄생했고, 김원봉은 연안파에 의해 철저히 배제되고 말았다.

연안파에서 배제된 김원봉은 한때 반목했던 임시정부에 합류하고 광복 때까지 그곳에서 활동하다가 광복 후 결국 북한이 아닌 남한에서 좌익 계열의 인민공화당을 이끄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남한 내의 좌익 계열 인사들과 단체들이 미군정과 우익 세력에 의해 와해되는 상황이 벌어지자 1946년에 월북했다. 이후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서 북로당 계열로부터 '남조선 출신 비공산주의자'라는 지분으로 배려를 받았으나, 거절하고 현재의 라선시로 가 현재의 고려민주해방공화국 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사실상 영웅이다.

여담

  • 어릴 때부터 강한 반일감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밀양 보통학교에 다니던 1911년,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때 학교에서 나눠준 일장기를 화장실 변소에 처박고 자퇴했다고 한다. 이게 단순히 자퇴로 끝났기에 다행인 거지 시대가 어느 시대인지를 감안하면 정말 대단한 패기가 아닐 수가 없다.
  • 항상 무표정으로 상당히 과묵했다고 한다. 임시정부에서 그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던 김구마저도 그가 웃는 모습은 거의 못 봤다고. 하지만 웅변 때문에 한 번 말했다 하면 상대방을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 밀양의 절에 자주 들려서 주지스님과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주지스님이 회고하길 '인생에서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한다.
  •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성 독립운동가였던 박차정 여사와 결혼하고, 신접살림까지 차려서 살았다. 나중에 부인이 1939년 곤륜산 전투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을 때, 손수 밀양에 돌아와 묻어주었다고 한다. 김원봉이 손수 만든 무덤은 아직도 밀양에 보존되어 있다. 다만 관리가 잘 되지 않아서 풀숲이 무성하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박차정 여사의 모교인 동래여고 동문회에서 주기적으로 묘소 관리를 하러 들른다고 한다.
  • 의열단의 단장답게 항상 인물을 만나면 의심과 경계를 했다고 하며, 아무에게나 쉽게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2시간 이상 머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잠은 제대로 잤을까 싶을 정도며 그의 정신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의열단 창립 때부터 얼마나 잘 피해 다녔는지 일제 패망 때까지 잡히지 않았다.
  • 미국의 기자였던 님 웨일스는 그녀의 저서 『아리랑(Song of Arirang)』에서 김원봉에 대해 "그는 고전적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몰랐다. (중략)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중략) 아가씨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아가씨들은 그를 멀리서 동경했다. (중략) 미남으로 로맨틱한 용모를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 해방 직후 고려민주해방공화국 내각의 군사부장(국방장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역대 정당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 1947 정계 입문
고려수립당 1948 고려민주해방공화국 정부 수립을 위해
당 해체
고려민주당 1948 - 1985 창당
사망
  1. 첫번째 아내. 제대로 이름이 밝혀지지 않음. 이후 사별
  2. 두번째 아내. 충칭에서 병사
  3. 최동선과 결혼 후. 김중근김철근을 낳음. 이후 최동선이 죽은 후, 결혼을 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