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국 대황제 (아침해의 원유관)

[ 국가 목록 ]
[ 국가 목록 ]

대한국

일본국

대금민국

러시아 차르국

중화민국

티베트 왕국

중화인민공화국

소련

마다가스카르 왕국

몽골

타이완민주주의인민공화제국

대한제국

대한 공화국

예케 몽골 울루스

대청제국

만주 사회주의 공화국
[ 세계관 설명 ]
[ 세계관 설명 ]
청룡 백호가 좌우에 둘렀는데 마치 호랑이가 바위에 걸터앉은 듯
공후며 부귀며 영화로운 세상
일세를 통령한 대장군일세
명예는 우레처럼 천하에 떨치고
온 세상 막힘 없어 글과 수레가 사해에 통하였네
석 자 칼로 사직을 편케 하고
한 줄기 채찍으로 천하를 평정하였네

아침해의 원유관은 "조선과 일본이 비슷하게 근현대시기를 거쳐갔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장편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임진왜란 이전 원균이 요절을 맞이함에 따라, 몇백년에 걸쳐 크고 작은 변화들을 거친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치, 사회, 문화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 문서 목록 ]

대한국 대황제
大韓國 大皇帝 | Emperor of Korea
현직 이순 / 제5대
즉위 2010년 5월 5일
연호 명화 (明和)
초대 고조 태황제
경칭 황상(皇上)/폐하 (陛下)/황상 폐하
관저 대한국 서울 한성부 경복궁 경무전
대한황제폐하몸기[1]

개요

틀:인용문W

대황제(大帝皇)는 대한국의 군주이다. 현 황제는 제 5대 대황제인 이순이며, 2010년 5월 5일에 공식적으로 즉위했다. 연호는 명화(明和)로 선정되었으며, 2024년 현재는 연호로 계산할 시 명화 13년이다.

현존하는 전통적인 동아시아계 국가의 군주 중 유이한 존재이기도 하며, 이 외의 존재로는 일본의 천황이 있다.

역사적으로는 한국 사회 내의 유교적 질서의 중심이자 중국의 황제를 제외하면 한국 입장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자국 내 세속적 유교 지도자인 사람을 부르는 명칭이기도 하다.

본래는 중국의 제후로 취급되었으나, 개항 이후 아편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순나라와 일본의 메이지 유신에 대한 전보가 전해지자 칭제 요청이 조정에 빗발쳤고, 결국 '옛 천하가 저무는 새 시대에는 새 천하의 천명이 필요하다' 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선적으로는 고려식 외왕내제 제도를 택했다가, 이후 금나라와 순나라의 동맹을 확실하게 박살내면서 칭제건원에 대한 명분을 얻게 된 조선 왕조는 1894년 양력 10월 3일에 완공된 환구단에서 완공식과 동시에 의식을 거행, 유교적 질서에서 황가로서의 자격을 얻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의 권력 자체는 초창기 조선왕조 시기보다 약해진 편이었는데, 이는 개항 이전까지 권력이 어느정도 억제된 상태에서 세도정치가 있었으나, 세도정치기가 말기때와 중간중간의 불안을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을 세계무대로 보내준 기반을 마련한 나름 성세였기에 실질적인 왕의 권력이 일부 부재한 상황에 한국인들 자체가 익숙해져서 가능했다는게 정론이다.

임신년에 대경장을 단행한 이후에는 독일과 일본을 본따, 대한제국의 사실상 국교급 위상의 이념이였던 국체유학의 정점이자 대한제국의 국가원수(元首), 대한제국군의 대원수(大元帥)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한성 내전과 항복 이후, 새롭게 시행된 현행 대한국 헌법하에서는 '한국인의 지도자'이자 '한국의 통합자'로 규정었다. 그러나 헌법 개정 이후에도 대중에겐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황실의 권력은 일부 건재하며, 때문에 옆나라인 일본처럼 완전히 상징적인 존재라고만 보기는 힘들수도 있는 존재로 자리잡고있다.

대한국에서 명목상의 국가원수인 관계로 각국의 정상들과 만날때 최소한 얼굴을 한 번 비추는 정도는 관습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타국 왕족의 접대는 전면적으로 한국의 군주로서 대접하고 있다.

칭호

대황제의 외국어 표기법은 각 나라별로 상이한 편이다. 예시로 일본어 발음은 '황제(皇帝)'의 한자 음독인 'コテイ (Kōtei)'이고, 영어로는 흔히 'Emperor of Korea'로 옮긴다. 영미권 말고도 다른 국가에서도 황제 칭호를 붙이는데 일례로 태국에서는 자국 군주는 그냥 라자(왕)라고 부르면서도, 대황제에 대해서는 마하라자(황제)라고 칭한다. 일본 제국, 순나라, 송나라, 대청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 오스만 제국, 인도 제국 등 다른 황제국의 황제들이 모두 격동의 20세기를 거치며 사라져버린 오늘날 지구상에서 일본 천황, 러시아 차르국 차르와 더불어 유일하게 황제(Emperor)로 불리는 군주이다.

현대 일반적인 한국인들이 대황제를 언급할 때는 '황제(皇帝)'나 '황상(皇上)' 혹은 폐하를 붙여 '황제폐하(皇帝陛下)'라고 하며, 대한국의 뉴스나 신문사에서는 거의 '대황제폐하(大皇帝陛下)'라고 한다. 또는 줄여서 폐하(陛下). 황제의 권위가 절대적이던 제국 시기를 겪었거나 그 세대의 영향을 받은 노년층의 경우 간혹 사장된 옛날식 명칭인 나라님, 금상 폐하 혹은 임금님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어원

한자 문화권의 군주들 중 황제라는 칭호는 본래 중국에서 들여온 명칭이다. 진나라의 진시황이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사기》의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왕(王)을 대신해서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명칭을 올리도록 이사(李斯)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요구했다. 이에 신하들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 중에 가장 존귀한 것은 태황(泰皇)이라면서 태황이라는 호칭을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태황의 황과 신을 뜻하던 제를 붙여 직접 만든 것이 황제(皇帝)라고 한다.

황(皇)과 제(帝)는 상나라 때부터 군주를 가리키는 어휘이긴 했으나, 통상적으로는 중국 신화의 삼황오제등에서 알 수 있듯이 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옥황상제나 기독교 신의 번역어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상제(上帝)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다.

임신대경장 이전까지는 조선이 명목상 중화질서에서 번국의 위치를 점했던 관계로 당연히 황제를 칭하지 못했으며, 자주국임을 선언한 대한국 시기에도 내부적인 칭호만 부황이였고, 대외적인 칭호는 대군주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황제라는 칭호를 수입하여 사용한 데에는 제 1차 동아시아 전쟁 이후 동아시아 내에서 확고히 높아진 한국의 국위를 선전하기 위한, 즉 새로운 천명을 받은 천조질서의 주인을 모시는 국가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도 있었다.

역대 대황제

황사

군상대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 현재 전 세계의 군주들 중 'Emperor(황제)'로 불리는 몇 안되는 군주지만, 그 권한은 실질적으로 전무하며 명목적으로도 사실상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의 입헌군주제 국가 군주는 (실제로 사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법률 거부권과 인증 거부권, 의회해산권 등을 명시적으로 지니고 있다. 태국의 경우에는 쿠데타 같은 비상상황에선 국왕이 제재를 가하거나 승인함으로써 실제로 개입할 수 있으며, 영국 국왕도 이론상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에 자발적으로 위임한 형태로, 제2차 세계 대전 때처럼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 국정에 개입할 수가 있다.

그러나 대황제의 경우, 황실을 관리하는 궁내부 인사들에 대한 추천권과 소수의 거부권을 제외하면 위의 경우에 속하지 않는 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는 구 대한제국 헌법에서 보장하던 대황제의 사실상의 전제정치를 연합군이 전후 황제들의 성향에 따라 대한국의 국정이 오락가락하는 부작용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헌법을 대거 개정한 뒤 수정판이라 할 수 있는 대한국 헌법을 출범시키면서 발생한 현상으로, 2조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대한국의 주권은 엄연히 국민에게 있다고 명시됐다. 황제가 1조에 표기되긴 했지만, 그조차도 한국인의 지도자로서의 위치만 보장했지 국가원수로서 정의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해당 직위가 국민들의 총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고 서술되어있다. 따라서 대황제는 실질적으로 자신과 친족들의 안위를 관리하는 기관인 궁내부 인사들의 임명권에 대한 일부 권한을 제외하고는 국정에 개입하는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이상으로 제약이 심한 군주는 전 세계에서 일본의 천황 외에는 없다.

틀:인용문W 다만 국사행위에 거부권은 없는데, 이를 무조건 승인해줘야 한다는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어떻게든 황제의 섭정을 세우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섭정도 정부의 국사행위를 융허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라는 내부의 지적이 있으나, 이에 대해선 답이 없다고하기에 어찌 보면 헌법적으로 보면 한계가 있는 셈이다. 통상적으로 성문법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정치권에 대한 비판 의식이 강한 편이지만, 황실과 관련된 관습이나 사안에 대해서는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게 받아들이는 한국인들이기 때문에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 감히 제한을 두는 것은 무엄하다고 여기기 때문.

다만 황실사무, 사비인 내탕금 사용과 생전 퇴위에 대한 권한은 법에 의해서 제약받지 않고 있다. 대한국 헌법 제 7조에서는 황실의 재산처분에 대한 권한은 재산의 주인인 대황제 본인에게 있음을 명시했고, 헌법 제 9조에서는 궁내부에 임명하는 관료들에 대한 사안은 어느정도 궁내부의 관리를 받는 주요인물인 황제의 의사가 반영이 되도록 규정했다. 다만 궁내부의 경우 우선적으로 내각이 출범하면 궁내부의 인원들이 그 내각에 따라 선임되고, 이 과정에서 대황제가 개입할수도 있지만 개입하지 않았다가 후에 개입하여 내각 임료 중 다른 누군가를 궁내부대신 혹은 공무원에 임명할수도 있다.

이 외에 법률에 의해 정해진 정치적 행위에는 헌법에서 명시한 일부 공무원의 임명에 대한 '임명식'이라는 국사행위가 있다. 예를 들어, 대한국 농수산부 대신직에 임명될 때에는 반드시 황제의 옥새가 찍힌 임명장을 필요로 한다. 당연히 옥새를 찍는 주체는 옥새의 주인인 대황제고, 어찌보면 일부 국사행위에서 황제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엄연히 대한국 헌법에서 정의한 국사행위 중 하나다. 따라서, 본 행위에서 황제의 주관적인 입장이 개입하는 경우는 형식적인 절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므로 불가능하다.

틀:인용문W

위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현 황제인 명화제도 현재의 헌법에서 보장하는 대황제의 권한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인정하는듯한 모습을 보였다.

위상

실권의 범위와는 별개로, 현대의 대한국 사회에서 대황제가 지닌 상징성은 매우 크다. 한국인들은 기본적으로 황제와 자신들의 위치, 즉 일반 국민을 엄연히 구분지어서 보고 있으며, 특히 노년층과 중년층의 경우 대황제를 지엄한 존재로서 여기는 풍조가 아직도 남아있다. 상대적으로 이러한 규정에서 자유로운 편인 젊은층도, 직전의 선대 황제인 태시제나 현임 황제에 대해서 평가하는것은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있다.

실제 국제사회에서도 국가원수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당장 1996년의 김영삼 담화가 가능했던 이유가, 앞서 있었던 대금민국 수상 허서리 굴마훈의 방한 당시 강조 경황제가 한 "귀국의 민족이 우리나라로 인해 감내해야 했던 역경과 고난을 생각하면 한없이 망극하다"라는 발언이 그러한 담화가 나오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즉,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대황제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큰 영향력을 가진다고 보기 충분하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대한국 헌법의 제 1조부터 10조까지가 대황제에 대해 명시해놓았다. 그만큼 대황제라는 존재가 한국인들에게 가지는 무게감이 한국인들한테 크다는 의미기도 하며, 제아무리 갖가지 정치적 풍자가 한국의 넷상에서 쏟아져나와도 현행 대황제, 혹은 제국시기의 대황제에 대한 직접적인 비방은 찾기 힘들다. 이러한 면모는 전대 황제였던 강조 경황제의 임종 몇년 전부터 드러났는데, 강조 가 말기 폐암에 걸렸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한국 내 모든 행사가 취소되고 자숙(自粛)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강조 가 붕어한 당일에는 지방에서 한성부로 상경하는 사람들이 워낙 늘었났던지라 기차가 잠시동안 정체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현대에 들어 사고적인 개방이 많이 이루어진것이 대강 이정도고, 이러한 면모는 옛날에는 더 심한 편이였다. 조선 왕조 시대부터 이미 국왕을 대놓고 비방하는것은 민중들 사이에서 금기시되었고, 국왕에 대한 평가도 사망 후 1대를 거쳐 실록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양반층에서도 금기였다. 이러한 기조가 절정을 달린 것이 폭력적인 근대화와 국민국가로의 급격한 변화를 추구하던 임신대경장 이후부터로, 세도 정치를 타파하면서 장기간 꺾여 있던 위세가 왕도개화파들의 집권으로 다시 상승했던것도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한국 황제의 권위가 거의 종교적인 신 수준으로 올라갔던 시기가 바로 이때다.

당시 근대화를 거치며 국민적인 단합요소가 필요했던 대한제국 정부는 황제의 권위를 대폭 강화시키는 방침을 체택했고, 이 조치가 조선 시대부터 발달해온 중앙집권제도, 국위 상승과 전쟁에서의 연전연승 등 외부적인 요인들과 겹쳐지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국체유학이 국학으로서 지정된 이후부터는 국학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초등교육기관인 서당과 서원등을 통해 조기부터 아이들에게 황제에 대한 우상화,각색된 일화들과 존경심을 신민의 미덕으로서 가르쳤고, 대황제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은 사실상 대황제 본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 함부로 훼손하는 경우 사회적인 지탄과 비방은 물론이고, 심하면 강상죄로 경찰에까지 불려갈 수도 있었다. 을축대홍수 당시에는 어진영을 건지기 위해 침수하는 학교 건물로 뛰어들었다가 목숨을 잃은 교사의 일화가 사후 본받아야할 미담으로서 그려졌고, 반공과 계엄,근황주의를 부르짖으며 집권한 김창암 정권 시대부터는 관료들에게만 가끔 요구되던 황궐망배를 나아가서 대한제국과 그 식민지, 속령들의 전 국민에게, 그것도 매일 강요했다.

결국 실권과 정치적 위세야 늘상 변화를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1910년대 이래 계속 상승세를 타고 오른 대황제의 권위는 파시즘 정권까지 집권하면서 기존의 우상화, 숭배 및 권위 부여가 더욱 강화됐고, 그렇게 1930년대에는 그 민족의 영도자이자 황제의 대리자인 호국경도 가뿐하게 뛰어넘는 신성불가침 수준의 권위가 완성된 것이다.

상징군상제와 국가원수성

관계

대금민국과의 관계

조선시대 중기부터 만주의 통일을 어느정도 이루어낸 후금은 처음엔 조선에게 자신들의 한과 한이 우위에 있는 형제의 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과 더불어 만주를 전부 차지하지도 못한 후금의 주장을 조선이 받아들일리는 없었고, 결국 양국의 제대로 된 외교관계가 수립된 시기는 타이핀 한(청 강희제)이 사실상 만주 대부분을 통일한 1720년대 부터였다. 그마저도 이후 을묘호란으로 잠시동안 외교가 단절됐었고, 이후 압카이 워혜허 한(청 건륭제)이 내부 기틀을 다지는 데 집중하는 한편 조선과의 담판으로 국교를 정상화하던 때가 되서야 겨우 동등한 관계로서 외교가 성립됐다.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 후금이 조선에게 우위를 점할 시기는 한참 늦은 후였다.

그러던 중 19세기 말에 조선이 세도가 혁파, 전면적인 개혁과 해외로의 사절단 파견을 실행했고, 이후 근대화와 자주독립국으로서의 지위 선포, 대격변(임신대경장)을 성공시키면서 만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때 파견된 대한국의 사절단들은 평상시에 자국 내에서는 대군주를 부황이라고 부르던 시스템도 무시하고, 유독 후금을 대상으로 대놓고 "대한국 황제가 후금의 한보다 의전서열이 높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중국이 천하통일을 할 조짐이 도통 보이지 않던 16세기 말부터 대략적으로 존재했다. 당시 중원을 통일시켜 유지시켰던 명나라의 유산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국가가 조선이라는 자부심이 훗날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으로 진화, 만주에 있는 후금은 저 멀리 남쪽에 있는 월남보다도 조공국으로서의 권위가 떨어지므로 조선 국왕>후금 한 이라는 논리가 성립됐기 때문. 여기엔 전통적으로 여진족을 복속시키거나 아래로 봤던 조선의 사고방식도 있었다.

하지만 후금의 입장에서는 동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마땅했다. 당대에 관전천명사상이라는 사상이 퍼져있던 후금의 경우 자신들이 북경을 함락시키지 못했을 뿐이지 충분히 중국에도 위협이 되는 세력을 키웠었다는 점을 들면서 스스로들을 또다른 중화인이라고 생각했고, 조선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조선이 후금을 생각하듯 그저 거만한 오랑캐일 뿐이였다. 하지만 애시당초 이 사상 자체가 부분적으로 수용된 부분이 많았고, 결국 대한국 측에서 후금과 화친을 하고자 한다고 판단해 여기서는 한 수 접었다. 이후 흠정대청국 헌법대강이 반포되면서 "대청제국 한"이 명목상 "대한제국 대황제"과 동등해지면서 형식적인 문제는 해결됐으나, 1909년 10월 24일 금·한 불법병합이 시행되면서 기존 후금의 아이신기오로 가문은 일반적인 한국의 귀족 사족보다는 높지만, 전주 이씨 황실보다는 격이 낮은 소위 왕공족으로서 편입됐다.

강조 경황제가 한때 공식석상은 아니지만 황실의 기원에 만주가 깊게 얽혀있다고 전해지고, 이후 명화제가 '태조 고황제께서는 만주와 많은 인연이 있으셨다'라며 발언했을때 대금민국의 재야사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적이 있다. 다만 해당 발언은 명화제가 외교적 수사를 구사한 것에 더 가깝고, 다른 면에서 보면 대한제국 시기 대청제국을 병합한 것에 대한 정당화가 성립될수도 있고 나아가서 내만동체 사상과도 연관이 되는지라 너무 깊게 받아들이면 안된다는 평이 중류. 사실 만주 자체가 조선과 권위가 어느정도는 동등해진것은 만주가 안정기에 들어선 17세부터지만, 그 이전까지는 금나라 황실의 시조가 고려인으로 추측되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열세인지라 대금민국 입장에서는 꽤나 껄끄러운 떡밥이다.

대황제가 한때 식민지 만주나 대만에서 해당지 총독을 임명하는 권한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대금민국에는 전쟁 책임은 물론이고 아시아 식민 통치의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애초에 총독부의 직속 상관이 대황제이므로, 식민지에 한해서는 총독의 위치가 사실상 내지의 총리대신과 비슷했다. 물론 1945년 패전 이후 식민지를 모두 상실함에 따라 총독 자체가 사라져 자연스럽게 임명권한도 폐지되었다.

대한국 정부와 궁내부에서 1996년 5월 17일, 허서리 굴마훈대금민국 수상의 국빈방문시 당시 황제였던 강조 경황제가 만주에 대한 '고난'과 '망극'이라는 단어들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상대적으로 과거 대한국의 태도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방만여부

대금민국대한국은 역사적으로 교류가 잦았던 나라임에도, 조선 건국 이후 양국의 군주가 각자의 영토에 방문한 적이 없다. 1896년에 순종 효황제가 황태자 신분으로 방문하기는 했지만, 대황제로서의 방만은 아니였다.

다른 아시아 지역들의 경우, 대금민국처럼 사실상 한국의 식민지였던 러시아 차르국에는 강조 경황제가 1978년 방문한 적이 있으며, 그 이후에도 1986년과 1987년, 2016년에는 중화민국,몽골,중화인민공화국,소련에 대황제가 방문한 적이 있는데, 만주는 바로 코앞에 육로로 이어진 땅임에도 대황제가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이 특이사항이다.

물론 대금민국보다 한국과 더욱 사이가 안 좋은 중화민국에도 1987년 건고제가 방문한 것처럼, 언젠가는 만주도 방문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만일 방만이 정말로 성사된다면 대금민국에 방만한 국가원수들의 기념행사인 건국대훈장, 대훈위 금척대수장의 교환이 대황제에게도 이루어질지도 실로 주목된다.

이후 2020년을 거치면서 한금관계가 어느 정도는 개선되었고, 대한국의 여성 주간지인 리빙센스는 2023년 7월 13일 '전직 궁내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2025년은 금한국교 정상화 50주년이 되는데, 이때 종주 부부(황제 부부)의 만주 방문을 성사시키려는 움직임”이 현재 안철수 내각에게 있음을 보도했다. 리빙센스는 '수상 관저 한 관계자의 발언'으로 "안철수 총리는 급속히 개선되고 있는 금한 관계의 총체적인 마무리를 위해 대황제 부부의 만주 방문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듯 하다", "(안철수 총리는) 전례 없는 종주 부부의 방만이 이뤄지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며, 퇴임 전 ‘정치적 유산’을 남기고 싶어하는 안철수 총리의 꿍꿍이도 얽혀 있다고 설명했다.

타국과의 관계

외교 프로토콜에 따른 영어 경칭은 His Imperial Majesty다. 정식 영문 명칭도 Emperor of Korea이며 영어권에서 주로 이렇게 통용된다.

한국에선 각각의 황제는 여타 군주들처럼 칭호를 붙여 구분하며(고조 태황제, 순종 효황제),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현대의 대황제는 홍무제, 영락제처럼 광무제나 성덕제로 연호를 붙여 지칭한다. 또한 옛 중국의 황실 용어를 받아들여 황제의 죽음을 붕어(崩御)라고 쓰고 부른다.

본 작위명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중국 양국의 경우에는 모두 황제(중국어로 환톄)라는 호칭을 쓰고 있으며, 베이징대학살 연구자들이 고종 성덕제를 비판할 때도 황제라 표기한다. 가끔은 중국 왕조의 황제들과 구분하기 위해 한제(중국어로 한톄)라고 부르기도 한다.

논란

칭호표기논쟁

여담


  1. 다른 명칭은 태극팔괘기. 조선 시대에는 어기로 쓰였던 깃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