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벤나 동맹 전쟁 (일 발렌티노)

라벤나 동맹 전쟁
Guerra della Lega di Ravenna
날짜 1510년 6월 25일 ~ 1516년 11월 29일
장소 중부 및 북부 이탈리아, 칼레 등 프랑스 일부
원인 원인 문단 참조
교전국
라벤나 동맹
로마냐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1513)
페라라 공국
신성로마제국(1511~)
아라곤 연합왕국(1511~)
잉글랜드 왕국(1511~)
스위스 서약동맹(1511~1515)
프랑스 왕국
피렌체 공화국(1511~1512)
베네치아 공화국(1513~)
지휘관
라벤나 동맹
체사레 1세
레오나르도 로레단(~1513)
알폰소 1세
막시밀리안 1세(1511~)
페르난도 2세(1511~1516)
   카를로스 1세(1516~)[1]
헨리 8세(1511~)
루이 12세(~1515)
   프랑수아 1세(1515~)
피에로 소데리니(1511~1512)
레오나르도 로레단(1513~)
결과
영향

개요

라벤나 동맹 전쟁은 1510년 6월 25일부터 1516년 11월 29일까지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원인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하기 위한 프랑스의 시도는 1510년 캉브레 동맹 전쟁으로 베네치아의 세력이 약화되며 사실상 견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밀라노와 제노바, 롬바르디아를 장악한데다 피렌체의 소데리니 정부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북부 이탈리아 전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당시 프랑스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이탈리아의 다양한 군주들에게 많은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이탈리아 중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가고 있었던 로마냐의 공작 체사레 1세는 프랑스가 약화된 베네치아를 집어삼키고 자신의 세력을 위협하게될것을 경계했으며, 프랑스의 행보를 주시하였다. 로마냐 공작의 이러한 우려가 1510년 3월, 루이 12세가 다시금 베네치아를 침공하고 겨우 2개월 만에 베로나를 함락시키고 비첸차를 포위하며 현실화되어가자 로마냐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1510년 6월 25일 라벤나에서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체결하였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경과

초기 양상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은 체사레 1세는 곧바로 동맹에 합류한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와 함께 프랑스군이 포위중인 비첸차로 진격했고, 7월 28일 비첸차 전투에서 루이 12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을 격퇴시키고 비첸차를 구원하는데 성공하였다. 비첸차 전투 이후 로마냐와 페라라, 베네치아의 연합군은 이후 별다른 저항 없이 베로나까지 함락시키며 승승장구하였지만, 이어진 브레시아 전투에서 군대를 재정비한 루이 12세의 프랑스군에게 대패하며 베로나를 다시 빼앗기게 된다. 이 브레시아 전투에서의 패배에 이어 다시 벌어진 비첸차 전투에서 나름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비첸차를 프랑스에게 함락당하고 전투 중 체사레 1세가 부상당하기까지 하는 패배를 당하자 동맹군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비첸차에서 동맹군을 상대로 승리한 루이 12세는 곧바로 남하하여 파도바를 함락시키고 페라라 공국으로 진격하였으며, 로마냐와 페라라 연합군은 이에 맞서 포 강을 중심으로 프랑스군의 공격으로부터 페라라를 방어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페라라마저 함락되게 되고 로마냐 공국의 볼로냐가 포위되는 상황에 이른다.

전쟁이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피렌체의 소데리니 정부는 프랑스를 지지하며 참전을 선언하였고, 1504년에 체사레가 정복한 피사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전황이 이렇게 되자 로마냐 공국의 지방 세력가들과 보르지아 가문과 체사레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던 가문들이 로마냐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고, 교황청 내에서조차 친(親) 보르지아 세력에 공공연히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교황청의 권위와 체사레의 군사력 위에 세워진 로마냐 공국을 위태롭게 하기에 충분했고, 사태가 심각함을 느낀 체사레 1세는 1510년 12월 25일, 성탄절을 틈타 볼로냐의 수비를 페라라의 알폰소 1세에게 맡기고 소수의 친위대와 함께 볼로냐를 빠져나간다.

합스부르크의 참전과 라벤나 동맹의 반격

볼로냐를 빠져나가 라벤나로 향한 체사레 1세는 곧바로 프랑스군에 대항할 동맹을 구하기 위해 신성로마의 막시밀리안 1세의 본거지인 인스브루크로 향한다. 그렇게 1511년 2월 14일 체사레 1세와 그 일행은 무사히 인스브루크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고, 막시밀리안 1세를 접견하여 그에게 전쟁을 지원해줄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프랑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고 따라서 전쟁에서 프랑스가 승리해가던것을 불안히 여겨 견제하고자 한 막시밀리안 1세는 체사레 1세의 지원 요청을 수락하였고, 1511년 2월 27일 체사레 1세가 시에나 공작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2] 신성로마제국이 전쟁에 참전하는 인스브루크 협약이 체결되었다.

결과 및 영향

관련 문서


  1. 카스티야 왕 겸임
  2. 시에나는 당시 체사레의 로마냐 공국 영토 중 유일하게 교황령이 아닌 신성로마제국에 속하는 영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