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빌레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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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별 핵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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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작전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는 1960년 부터 1964년까지 진행된 한국의 핵개발 계획이다.

역사

제2차 벨트크리그와 50년대까지

1939년 초부터 일본과의 전운이 감돌자 한국은 핵분열의 무기로서의 가능성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원자폭탄의 대한 관심도, 기대도 적었을 뿐더러 한국의 기술력이 부족했다. 결정적으로 1940년 부터 한국 전선이 개막하면서 사정이 어려워지자 관련 연구에 대한 지원이 크게 감소했다. 이와중에 1942년 부터 독일이 우란프로옉트를 시작하자 한국은 도상록을 필두로 한 자국의 과학자들을 파견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한국 부산에서 이륙한 독일의 폭격기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대로 헤임달과 헤르모드 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독일의 핵투하는 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고, 더욱이 바로 코앞에서 핵폭발을 바라본 한국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자국의 핵개발에 매달리기 시작한건 이 시점 부터였다.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열정이었을 뿐이고 본격적인 핵개발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15년이 더 지난 1960년에 들어서였다. 핵개발을 논하기 전에 당장에 전후 재건이 시급했기 때문. "무슨 전후 재건이 그렇게 오래 걸리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거기엔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일본이 독일의 핵을 시원하게 얻어맞고 항복한 후에 일본 땅에는 연합군 군정이 이루어졌는데, 서쪽에는 한국군을 필두로 한 팍트군이, 동쪽에는 미군을 필두로 한 협상국이 들어와 있었다. 이미 두차례의 일본과의 전쟁을 치뤘던 한국은 일본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적어도 열도에 완충 지역을 형성하여 대한 해협 바로 너머에 적대적인 세력이 들어서는 것을 경계했고. 그에 따라 동경 137도를 기준으로 일본의 분단이 이루어졌다. 1950년엔 기시 노부스케의 요청을 승인해 서일본의 동일본 침략을 지원했는데, 서일본이 요코하마 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쭉 밀리기 시작하자 당시 총리였던 이승만과 그의 내각은 자국의 전후재건 비용까지 털어서 라이히스팍트를 설득해 일본에 개입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일본의 침략에 시달리던 아시아를 구원하고 전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지만, 대전 기간 동안 미국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대한이 피흘리며 일본의 주력군을 상대할 때 고작 태평양의 자그마한 섬 몇몇에서 일본하고 드잡이질 한게 전부이지 않습니까?
당시 일본 파견군 총사령관 이범석

당시 이범석의 말은 미군의 대한 한국의 시점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미군의 기술력이나 물량은 한국에 비해서 우수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정신력은 부족하다고 여겼고, 애당초에 논점인 그 기술력 마저도 그다지 큰 차이가 난다고 여기질 않았다.[1][2] 그리해서 일본에 개입한 한국군과 팍트군은 개입 후 몇달동안 미군과 협정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며 동경 138도까지 빠르게 몰아붙혔지만, 선더볼트 작전으로 인해 137도까지 밀려난 이후 부터는 전쟁의 남은 2년동안을 그곳에서 싸웠다. 이 동안 미군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물량, 특히 공군 전력을 경험한 한국은 "핵까지 가진 미국에게"[3] 자신들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체감했다.

본격적인 핵개발의 시작

이승만 내각의 일본 개입으로 지연된 전후재건이 대략적으로 끝나고 본격적인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한 장면내각 부터 한국은 핵개발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에 우란프로옉트에서의 한국의 기여분을 논하며 핵기술의 양도를 주장했지만 완전히 까였고, 당시 독일과 도나우 2강 체제로 이루어져 있던 라이히스팍트를 한국까지 3강으로 만들자고 주장했지만 그것마저도 까인 후였다. 거기다가 도나우까지 핵개발에 성공하자, 이대로 간다면 대한은 세계 신질서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는 서양인들이 다시 아주를 주무를 것이다! 라는 생각까지 이어져 본격으로 자력 핵개발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960년 부터 한국은 우란프로옉트에 참가한 도상록을 총책임자로 하여 독자적인 핵개발 작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1960년 부터 시작했다. 한국의 핵개발을 눈치챈 독일, 미국, 파우엔은 안전보상이사회에서 한국의 핵개발을 포기하는 결의안을 통과 시켰고, 한국을 외교/경제적으로 고립 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이러한 전략은 "서양인들이 진짜로 대한과 아주를 종속 시키려 한다!"라는 생각을 확정적으로 만들어 한국의 핵개발을 부추겼다. 한국이 핵개발을 멈추지 않자 독일은 한국에 핵우산을 비롯한 유화책을 제시 하였으나...

독일은 한성을 위해 베를린을 포기할 수 있는가?

라는 장면의 물음에 명확한 답을 주지 못했고, 독일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1964년 한국은 풍계리 지하 핵실험장에서 핵실험에 성공하며 네번째로 핵보유국 반열에 들어섰다. 거기다가 2년 후에는 수소폭탄 개발에도 성공했다.

  1. 근본적으로 이범석의 말 또한 틀린게 없었다. 일본은 대전 내내 미국의 본토침입 가능성 보다 대마도와 구주를 이은 한국의 본토 침입 가능성에 대해 염려했다. 더욱이 해외 점령지를 잇는 항로에서 한국은 필수적인 곳이었다. 때문에 대전 내내 한국전선의 조선 파견군은 일본군의 주력군이었고 이는 남방작전으로 전력이 분산된 이후에도 유효했다. 조선파견군이 1944년 6월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되며 소멸한 이후에도 일본의 본토 결전의 주축은 한국의 침입로로 예상되는 구주 북부 방면이었다.
  2. 일례로 필리핀 탈환전에서 일본군에게 유의미한 전차전력은 제2기갑사단 하나 뿐이었다. 반면에 한국전선의 짧은 종심에서 수천대의 전차가 뒤엉켰다.
  3. 미국은 1949년에 이미 핵개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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