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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관저 首相官邸 | Chancellor's Office of Kore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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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근지문(木槿之紋)[1] | |
기능 | 의정대신 관저 |
의정대신 공저 | |
총리관방장관/부장관 집무실 | |
각의실 |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전화번호 | (+81) 02-730-5800 |
관저입주자 | 대한제국 의정대신 |
역사 | 1929년 3월 18일 (수상관저) 1961년 4월 22일 (신축 관저) 2012년 12월 26일 (리모델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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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관저 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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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수상관저(首相官邸)는 의정대신의 관저로, 황성 한성부 종로구 육조대로 198에 위치해 있다.
수상관저는 총리대신이 그 공무를 수행하는 '의정대신 관저'와 퇴근 후 기거하는 '의정대신 공저'의 기능을 수행하는 건물로써, 수상관저(首相官邸) 건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확장되어 의정대신을 보좌하는 비서진 및 관료들이 근무하는 행정기구 내각소속부국(內閣所属部局)을 의미하고 있다.
백악관이나 엘리제궁과는 달리 별도의 명칭으로 불리지는 않지만, 한국에서 공식적으로 '관저'(官邸)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기관이 오직 수상관저밖에 없어 단지 '관저'라는 이름으로도 통한다. 영미권에서도 이회창 총리대신이 재임할 시절에 로마자를 이용해 '관저(Kwanjeo, 한국식 독음)'라고 표기하기 시작한 것을 계기로 서구 언론에서도 이 '관저'를 수상관저에 대한 고유명사로 사용하는 예가 늘어났으며, 수상관저 홈페이지 주소 역시 그냥 kwanjeo.go.kr 이다.
구역
지상 6층, 지하 1층인 수상 관저(신관)는 노태우 총리 시절인 1991년 완공됐다. 신축된 수상관저 총 공사비만 당시 돈으로 4,200억 원이 들어갔다.
6층 | 의정대신 집무실 |
5층 | 총리관방장관 집무실/총무처 |
4층 | 국무대신 각의 집무실/각의실 |
3층 | 각부 사무실, 현관홀 |
2층 | 귀빈실/영빈관 |
1층 | 기자회견장, 기자실 |
지하 1층 | 국가위기관리센터 |
수상관저 관저 지하1층 국가위기관리센터. 1층은 출입구의 로비에 기자회견장/각종회견장. 2층은 각국 정상들의 귀빈실/회의실. 3층은 각/부 사무실, 현관홀. 4층은 각부대신들의 각의 집무실. 5층은 총리대신 집무실과 총리부의 총괄대변인 총리관방장관과 부장관의 집무실이 있다.
수상관저 외부엔 수상의 거주지인 수상공저가 연결되어 나누어져 있는데. 각국의 정상(대통령, 수상, 주석, 군주, 총독 등)들과 각종 연회나 만찬회 등의 장소로 쓰이고 있다. 관저구역의 경비를 경시청 관저경비대가 담당한다.
역사
1991년 신축 이전
1937년에 일본은 이 지역을 한국주차군 사령관 공저 부지로 선정하여 경운궁 인근에 공저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지붕은 보천교(普天敎) 본당이던 십일전(十一殿)[2]의 화려한 청기와를 가져왔다. 사령관 관저는 1939년 완공된 후 미나미 지로가 공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저 완공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차군 사령관을 노린 폭탄 테러가 수도 없이 발생하면서 주차군 사령관 공저는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 뒤로 사령관 공저는 너무 심한 피해를 받아서 복구를 포기하고 한국 주차군 사령부를 임시 공저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 뒤로 사령관들은 공저에 입주하는 것을 꺼렸고 그 대신에 자택에서 사령부로 출퇴근했다.
2차대전과 황궁 사건으로 주차군 공저가 다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해방이 되면서 주권예속기에 지어진 주차군 사령관 관저를 재활용하여 총리대신의 관저이자 공저로 쓰이게 되었다. 이후 총리대신의 집무실을 뜻하는 수상관저(首相府)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빠르게 수상관저 건물은 복구는 했지만 복구된 수상관저는 전쟁통에 망가진 걸 임시 복구만 하고 쓰는 수준이라 시설이 매우 좋지 못했다. 그 뒤로 역대 총리대신들은 대부분 자택에서 관저로 출퇴근했으며, 수상관저조차 비워두고는 자신의 저택에 관저 기능까지 그대로 옮겨놓는 경우도 많았다. 장면은 외무대신 시절부터 사용해온 한남동의 외무대신 관저를 총리 영전 후에도 그대로 써먹었고[3], 김성곤도 종로구 인근에 있던 자택을 관저처럼 써먹었다.
그러던 것을 1960년 안보투쟁 당시 시위대가 관저를 포위해서 조병옥 총리가 퇴근하지 못했던 일이 있었던 것을 계기로 총리의 출퇴근에 따른 경호 문제가 대두되어 수상관저는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쳐 1963년부터 총리의 생활공간으로 다시 쓰게 되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살기 좋은 건물은 아니어서,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그래서 총리들이 구 본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1980년대 까지 여러 총리대신들은 등은 리모델링 이후로도 자택에서 출퇴근했다. 박정희와 김종필과 같은 총리들은 수상관저에 거주했지만 수상관저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현재
1960년대의 리모델링 이후로도, 역대 총리들은 수상관저를 선호하지 않았는데, 1947년에 지은 걸 수리만 하고 쓰고 있어서 매우 비좁았다. 이 때문에 신축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내 새 관저가 착공되어 1991년에 완공되었다. 현 관저는 대지 95,550㎡에 연건평 48,644㎡로 지상 6층 및 지하 1층의 초현대식 건물로 구 본관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새로운 총리 관저는 설계 당시부터 외관과 내장 모두 ‘한국적인 미학을 추구한다’는 기조 아래 꾸며졌다. 관저를 찾은 외국 손님들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도록 박물관 또는 미술관적 컨셉트에 주안점을 두었다.
관저를 새로 신축하는 과정에서 이미 기존의 초고층 빌딩이 인접하고 있는 문제로 경호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상당히 면밀한 설계를 거쳤으며, 미국의 백악관 상황실을 본딴 국가위기관리센터를 지하에 배치하는 식으로 수상 관저의 집중도를 높였다. 또 태양광발전 및 풍력발전 설비를 설치하고 연료전지를 통한 발전과 난방 시스템도 갖추는 등 친환경적인 면에도 신경썼다.
관저 신축과 함께 옛 본관은 대규모 리모델링을 거쳐 1995년부터 총리 공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건물
관저
의정대신 집무실
공저
여담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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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수반 관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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