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헌정회 (카게사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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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헌정회 | 帝國憲政會
창당일 1892년 1월 7일
당명변경 1905년 11월 20일 (신민당)
후신
주소 한성부 은평부 녹번로 40[1]
역대 총재 박정양 (초대)
김홍집 (제2대)
김가진 (제3대)
민의원 의원 30석 / 342석 (8.77%)
당색 파란색 (#0000FF)

개요

대한제국의 보수정당. 현재 대표적인 보수정당인 민정당신한국당의 기원인지라 대한제국 근대정치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상세

초기

1885년에 초대 의정총리대신이자 수구당의 영수였던 이유원이 의회를 해산한뒤 실시된 총선에서 패배한 직후 수구파들과 온건개화파들은 개화당으로 단일대오를 이루고있던 개화당에 비해 지속해서 분열하며 개화당에게 지속해서 패배를 면치못했다. 특히나 황제가 자신들보다 급진적인 개화와 산업화를 주장하는 개화당의 손을 매번 들어주자 분노한 수구파들을 중심으로 개화당에 반대되는 세력들의 통합이 거론되기 시작하였고, 이에 수구파들과 온건개화파들이 1889년에 민의원과 중추원 내에서 제국헌정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구성하게 된다.

초기에 단순 의원들의 친목모임, 구락부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던 제국헌정회는 점차 개화당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모임에 따라 세력이 확장되어갔고 1892년에 정식으로 창당되기에 이른다. 제국헌정회가 처음 창당되고 열린 제5회 민의원 선거에서 홍영식이 이끄는 개화당과 정면으로 충돌하게된 헌정회는 선거초반 개발이 진행되지 않은 농어촌 지역에서 승기를 잡았으나, 황제의 노골적인 선거개입과 여론전으로 인하여 선거에서 패배하고만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제국헌정회가 전체의 40%나 되는 의석을 얻으면서 1930년대까지 지속되는 보수-자유당 계열의 양당제를 열었다 평가받는다.

선거 이후에는 제국헌정회가 유일한 야당으로서 강력하게 개화당을 견제했고, 특히나 산업화와 관련해서는 사사건건 개화당을 막아서는 바람에 개화기 중기에 들어서 개화당의 동력이 부족한점을 제국헌정회의 견제에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이로인해 당내 좌파에 속했던 온건개화파들이 일제히 개화당으로 당적으로 옮기면서 당세가 위축되었고, 도시지역의 산업화의 근본적인 가속을 막을수는 없었기에 지지 역시 점점 적어질수밖에 없었다.

결국 1895년 청일전쟁 도중에 열린 민의원 선거에서 청일전쟁 중립과 산업화 중단을 외친 제국헌정회는 별다른 황실의 개입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급 참패를 당하게 되고, 한청전쟁이 터지면서 제국헌정회는 전쟁반대도 전쟁찬성도 아닌 애매한 입장에서 개화당의 행보를 방관한 탓에 지지도는 점점 깎여나가고만 있었다.

집권기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전쟁의 피해가 적지않았고, 남만주와 관련하여 러시아와 외교적 충돌이 일어나면서 개화당과 당시 총리던 김옥균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된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헌정회의 새로운 총재가 된 김홍집은 애매한 스텐스의 헌정회의 노선을 반전으로 확고히 하였고, 이를 통해 개화당에게 전쟁광 프레임을 씌움으로서 지지도를 높였다. 결과적으로 김옥균이 압승을 자신하며 의회를 해산했으나, 오히려 판단 미스로 인해 정권은 헌정회에게 넘어가게되며 제국헌정회는 사상최초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룰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집권한 헌정회는 갈팡질팡을 반복했다. 자신만만하게 출범한 김홍집 의정부였지만, 정작 집권 이후에는 남만주 총독부의 설치를 취소하였다가 다시 설치하는 등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였고, 산업화에서도 당내갈등으로 인해 제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헌정회를 대안으로 여겼던 황제와 국민에게 실망을 안겨주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전후복구 대책으로 내놓은것이 사실상 당내 우파가 주도한 농업중심의 탈근대화 정책이라서 민심이 완전히 떠나가게 된다.

이에 김홍집 총리는 당내불안을 진정시키고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으나 당내 척사파들이 대거 탈당하고, 개화당은 아예 의정부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사실상 폭망이 확실시 되었다. 결국 김홍집 의정부은 출범한지 단 4개월만에 붕괴되었고, 의회가 해산됨에따라 열린 민의원 선거에서 개화당이 전체 70%를 넘는 의석을 얻으며 압승하면서 짧은 집권기를 허무하게 날려버린다.

쇠락과 부활

상황이 이렇게되자 김홍집은 모든 직책에서 사임한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고, 이에 대안으로 나선 중도파 김가진이 총재가 되었으나 당 내 갈등은 이미 돌이킬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02년, 결국 김홍집을 따르던 당내 온건개화파들이 일제히 헌정회를 탈당하여 민정당을 창당했고, 척사파도 아니고 온건개화파도 아닌 애매한 중도파만 남아버린 헌정회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버린다. 이에 쇄기를 박은것은 이완용 총리의 의회 해산으로, 이완용 총리가 척사파들과 헌정회가 제1야당을 차지하고 있는 상황을 타파하고자 의회를 해산해버리면서 헌정회는 민정당에게 압도적으로 밀려 제2야당이 되어버린다.[2]

하지만 1905년 이완용 총리가 부정선거 추문으로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서 의회가 해산되고, 간신히 간판만 유지하던 헌정회는 기적적으로 소생하여 민정당과 연립의정부를 구성하였다. 이에 대대적인 당의 개혁을 시도하던 김가진 총재가 당명을 신민당으로 바꿈으로서 파란만장한 제국헌정회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여담

같이보기


  1. 현재 그 자리에는 제국국제기념관이 자리잡고있다.
  2. 그래도 척사파들보다는 상황이 나았던것이, 척사파는 주문팔현으로 불린 곽종석을 제외하면 전원이 낙선해버린 탓에 완전히 몰락하여 사실상 해체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