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 편집 권한이 없습니다. 다음 이유를 확인해주세요: 요청한 명령은 다음 권한을 가진 사용자에게 제한됩니다: 사용자. 문서의 원본을 보거나 복사할 수 있습니다. {{한나라닷컴}} {{다른 뜻 설명|황제에 대한 설명은 [[순종 효황제 (한나라)|순종 효황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의 연호 (한나라)}} {| class="wikitable" style="border:2px solid #E3BA62; max-width:450px; width: 100%; float:right" ! colspan="2" style="background:linear-gradient(to right, #e3ba62, #e3ba62 20%, #e3ba62 80%, #e3ba62); color:#B22222" | 융희 시대<br>光武 |- ! style="width:30%; 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개막 | [[1907년]] [[8월 3일]] |-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종막 | [[1926년]] [[4월 25일]] (20년) |-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황제 | [[순종 효황제 (한나라)|순종 효황제]] |-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내각총리대신 | <span class="mw-customtoggle-dbdgml">'''[ 펼치기 · 접기 ]'''</span>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mw-collapsed hidden" id="mw-customcollapsible-dbdgml">[[이완용 (한나라)|이완용]](1907~1919)<br>[[조중응 (한나라)|조중응]](1919)<br>[[이윤용 (한나라)|이윤용]](1919~1920)<br>[[민병석 (한나라)|민병석]](1920~1924)</div> |-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이전 | [[광무 시대 (한나라)|광무]](光武) |- ! style="background:#E3BA62; color:#B22222" | 다음 | [[창명 시대 (한나라)|창명]](昶明) |- |} {{목차}} == 개요 == [[순종 효황제 (한나라)|순종 효황제]]가 재위했던 시기에 사용한 [[대한제국 (한나라)|대한제국]]의 연호이자 시대 구분. 서력으로 [[1907년]] ~ [[1926년]]. == 상세 == [[1907년]] [[8월 2일]] 당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한나라)|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한나라)|이완용]]이 [[대한제국 내각 (한나라)|내각]]을 대표하여 연호 후보로 '융희(隆熙)'와 '태시(太始)' 2개를 상주하였고,<ref> 당연히 이완용이 단독으로 연호를 지은 것은 아니고 내각에서 상의하여 정한 것이다. 직전 연호인 광무 또한 [[의정부 (한나라)|의정부]]에서 논의하여 올린 후보 중에 고조가 골랐다. 이 중 '태시'는 한무제와 발해 간왕도 사용한 적이 있던 연호다.</ref> 순종이 이 중에 융희를 고름으로써 새 연호가 결정되었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융(隆)은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이고, 희(熙)는 흥성하고 화목하며 넓고 장구하다는 뜻이다.<ref>이를 뒤집은 형태 희륭(熙隆)은 사도세자의 묘호 후보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현륭(顯隆)'이 낙점되었다. 단, 이완용이 이를 참고해서 상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ref> 원래 [[대한제국 (한나라)|한국]]의 예법에 따르면 [[정변 (한나라)|정변]]이나 [[반정 (한나라)|반정]] 등 비정상적 황위 계승이 아닌 경우에는 [[연호|유년칭원법]]에 따라 즉위년 다음 해에 [[개원]](改元)하는 것이 [[전통]]이므로,<ref>이렇게 새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 [[1월 1일]]부터 연호를 교체하는 것은 선대 군주의 통치 시대를 존중한다는 [[효]]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같은 해에 연호 2개가 공존하여 나타날 수 있는 혼란 역시 방지한다는 측면도 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즉위년칭원법을 따라 새로운 [[천황]]이 즉위한 그 해에 개원한다.</ref> 정상적으로는 [[순종 효황제 (한나라)|순종 효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1908년]]이 융희 원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엄연히 [[대한제국 황태자 (한나라)|황태자]]가 예정대로 제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한국에서 썼던 유년칭원법이 아닌 일본에서 쓰는 즉위년칭원법을 택해 순종이 즉위한 바로 그 해인 1907년을 융희 원년으로 정했다. 융희 개원이 전통적인 예법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일제가 [[헤이그 특사 (한나라)|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삼아 [[고조 태황제 (한나라)|고조 태황제]]를 강제로 불명예스럽게 퇴위시켜 정상적인 제위 계승이 되지 못한 탓도 있고, 둘째로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에 따라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였으므로 일본식으로 즉위년칭원법을 따른 측면이 있다. == 사건 == == 기타 == ---- [[분류:융희 시대 (한나라)]] 이 문서에서 사용한 틀: 틀:-2 (원본 보기) 틀:Color (원본 보기) 틀:글씨 색 (원본 보기) 틀:다른 뜻 설명 (원본 보기) 틀:대한제국의 연호 (한나라) (원본 보기) 틀:목차 (원본 보기) 틀:좌측 광고 (한나라) (원본 보기) 틀:한나라닷컴 (원본 보기) 융희 시대 (한나라) 문서로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