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희 시대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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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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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희 시대
光武
개막 1907년 8월 3일
종막 1926년 4월 25일 (20년)
황제 순종 효황제
내각총리대신 [ 펼치기 · 접기 ]
이전 광무(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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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순종 효황제가 재위했던 시기에 사용한 대한제국의 연호이자 시대 구분. 서력으로 1907년 ~ 1926년.

상세

1907년 8월 2일 당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내각을 대표하여 연호 후보로 '융희(隆熙)'와 '태시(太始)' 2개를 상주하였고,[1] 순종이 이 중에 융희를 고름으로써 새 연호가 결정되었다. 《설문해자》에 따르면 융(隆)은 융숭하게 보답한다는 뜻이고, 희(熙)는 흥성하고 화목하며 넓고 장구하다는 뜻이다.[2]

원래 한국의 예법에 따르면 정변이나 반정 등 비정상적 황위 계승이 아닌 경우에는 유년칭원법에 따라 즉위년 다음 해에 개원(改元)하는 것이 전통이므로,[3] 정상적으로는 순종 효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인 1908년이 융희 원년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때는 엄연히 황태자가 예정대로 제위를 계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한국에서 썼던 유년칭원법이 아닌 일본에서 쓰는 즉위년칭원법을 택해 순종이 즉위한 바로 그 해인 1907년을 융희 원년으로 정했다.

융희 개원이 전통적인 예법을 따르지 않은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일제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삼아 고조 태황제를 강제로 불명예스럽게 퇴위시켜 정상적인 제위 계승이 되지 못한 탓도 있고, 둘째로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에 따라 사실상 일본의 반식민지 상태였으므로 일본식으로 즉위년칭원법을 따른 측면이 있다.

사건

기타


  1. 당연히 이완용이 단독으로 연호를 지은 것은 아니고 내각에서 상의하여 정한 것이다. 직전 연호인 광무 또한 의정부에서 논의하여 올린 후보 중에 고조가 골랐다. 이 중 '태시'는 한무제와 발해 간왕도 사용한 적이 있던 연호다.
  2. 이를 뒤집은 형태 희륭(熙隆)은 사도세자의 묘호 후보이기도 했다. 최종적으로는 '현륭(顯隆)'이 낙점되었다. 단, 이완용이 이를 참고해서 상주했는지는 알 수 없다.
  3. 이렇게 새 황제가 즉위한 다음 해 1월 1일부터 연호를 교체하는 것은 선대 군주의 통치 시대를 존중한다는 사상의 반영이기도 하고, 같은 해에 연호 2개가 공존하여 나타날 수 있는 혼란 역시 방지한다는 측면도 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즉위년칭원법을 따라 새로운 천황이 즉위한 그 해에 개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