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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3일 (금) 22:59 기준 최신판
대한민국 최규하 내각 崔圭夏內閣 | Choi Kyu-hah Cabine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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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14일 ~ 1979년 4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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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 박정희 / 7대 (1970. 6.5. ~ 1974. 6.4.) 신현확 / 8대 (1974. 6.5. ~ 1978. 6.4.) 남덕우 / 9대 (1978. 6.5. ~ 1982. 6.4.) | ||||
국가수상 | 최규하 / 3대 (1972. 5. 14. ~ 1979. 4. 8.) | ||||
국가 부수상 | 백두진 / 2대 (1972. 5. 14. ~ 1979. 1. 3.) 이효상 / 3대 (1979. 1. 4. ~ 1979. 4. 8.) | ||||
사회수상 | 이효상 / 2대 (1972. 5. 14. ~ 1979. 4. 8.) | ||||
여당 | 민주당 (1972. 5. 14. ~ 1979. 4. 8.) |
개요
박정희 군사내각 이후로 첫번째 민주투표로 선출된 내각이다. 국가 부수상,사회수상직이 부활했으며 최규하는 약 7년 가량의 임기를 마쳤다.
국가수상
1972년 박정희 내각 당시 박정희 국가수상이 내각불신임결의에 대한 반발로 의회를 해산했고 각종 부정투표 의혹과 민주당 깎아내리기에도 결국 민주당이 168석을 차지하며 박정희가 불리해지자, 결국 5월 14일 퇴임했다. 이후 의회에서 선출된 후보중 최규하가 가장 유력했으며 찬성 195표를 가져가며 5월 15일 국가수상직을 시작했다.
1979년 1월 16일 최규하 국가수상이 국정능력에 대한 의심이 생기자 최규하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았고 2월 27일 저번 내각에 이은 내각불신임결의가 또다시 결의되며 최규하는 자진 사퇴하냐, 의회를 해산하냐를 놓고 고민했는데 국가부수상 권한대행이였던 이효상이 사퇴를 권유했다. 1979년 4월 5일 차기 국가수상으로 김종필 후보가 당선되었고 3일 후인 4월 8일이 되어서야 사퇴했다.
국가 부수상
국가 부수상은 국가수상 후보중 2위로 낙선하거나 3,4위등 다른 후보를 임명하는데 최규하는 일반 국회의원이였던 백두진을 임명했다. 민주공화당 의원들이 반발하기도 했지만 법에 위반되진 않아 논란은 금세 사라졌다.
이후 백두진이 1979년 1월 8일 사망하자, 사회수상이였던 이효상이 국가수상 권한대행또한 겸임했고 빠른 시일 내에 투표가 이루어졌어야 했지만 이또한 법에 위반되지 않으며 당시 내각에서 해산분위기가 돌아 백두진이 계속해서 권한대행을 맡는것이 되었다.
사회수상
국회의 투표로 결정되는 국가수상, 예비 국가수상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국가부수상과는 다르게 100% 국민투표로 이루어져 있으며 사회수상은 국회의 3/1이 탄핵에 동의해도 바로 자리에서 내려보낼수 있었다. 하지만 이효상 사회수상은 58% 가량을 득표했으며 민주공화당 내부에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적었고 거의 당이 붕괴 직전이였기에 100명 이상의 단합이 불가능했다. 이후 보수주의 성향의 국민당이 147석으로 100석 이상을 얻어냈지만 따로 사회수상을 탄핵시키지는 않았다.
의회
총 2번의 의회 해산이 있었으며 각각 1975년, 1976년이였다. 국가수상은 임명된후에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았고 최규하는 총 2번의 의회해산에서 의석을 얻어내는데 실패했지만 국가수상직을 유지했다.
제 2대 국회
두번째 민선 국회이다.
제 2대 국회
제 3대 국회
세번째 민선 국회이다.
제 3대 국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