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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style="float:right; max-width:450px; border:2px solid #030; color:#000;"
| | ==개요== |
| ! colspan="2" style="width:450px; background:#030; color:#fff;" | {{large|이베리아 내전}}<br>Spain civil war<br>Iberia civil war
| | 1796년~1797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공화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초 국면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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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과== |
| |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프랑스 정부에 신임을 얻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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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활약 중 라인강 전선에서도 주르당과 모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승승장구해 네덜란드는 기존 공화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괴뢰국 바타비아 공화국이, 스위스는 헬베티아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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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style="background:#eee;" | 이베리아 내전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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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align=center | <div style="margin: -5px -9px">[[파일:스페인_내전.jpg|450px]]</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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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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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margin:-6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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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20%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날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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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년 12월 20일 ~ 1903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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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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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베리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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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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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화파의 마드리드 점령, 포르투갈의 쿠데타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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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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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인 국가당의 독재ㅤㅤㅤㅤ 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ㅤ동이베리아 지역 독립'''<br>'''북아프리카 전쟁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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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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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교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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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50% style="vertical-align:top;" | 스페인 왕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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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해방연합<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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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 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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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 세력'''<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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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프랑스 국기2.svg|23px]] 프랑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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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vertical-align:top;" | 스페인 의회공화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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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베리아 노동연맹<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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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베리아소비에트국<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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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원 세력'''<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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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소련 국기.svg|23px]] 소련<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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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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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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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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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vertical-align:top;" | [[알폰소 13세 (신군)|알폰소 13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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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시스코 프랑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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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밀리오 몰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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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엘 팔 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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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vertical-align:top;" |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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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세 산호르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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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누엘 아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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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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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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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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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vertical-align:top;" | 왕국파 스페인 세력 총 278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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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vertical-align:top;" | 공화파 스페인 세력 총 319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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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style="background:#030; color:#fff;" |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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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vertical-align:top;" | 왕당파 스페인 세력 총 187만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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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vertical-align:top;" | 공화파 스페인 세력 총 133만명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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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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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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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 이베리아에서 벌어진 가장 거대한 전쟁으로 세계대전을 일으킨 모로코전쟁의 배후가 바로 이베리아 내전이다.
| | 나폴레옹 전쟁의 두번째 국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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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의회공화국=
| | 1798년 한해동안 벌어졌으며 이집트 지역 해안가 일부를 점령하여 몇백년 후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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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style="border:2px solid #DB0A13; color:#FFCB4E; max-width:450px; float:right;"
| | ==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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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집트는 인도와 영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다면 영국과 인도 사이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공백상태에 빠진 인도를 쉽게 프랑스의 식민지로 삼을 수도 있다는 계산까지 한 듯하다. 거기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기 급상승 중이었던 나폴레옹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총재 정부의 입장도 그대로 맞아떨어진 상황이었다. |
| ! colspan="2" style="width:450px; 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글씨 크기|16|스페인 의회공화국}}<br>Spanish Parliamentary Re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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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그보다 급한것은 돈이였다. 끝없는 전쟁과 반란에 시달리고 있던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는 돈이 바닥난지 오래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던것이다. 이탈리아 원정으로 뜯어온 돈이 다시금 떠오른 총재정부는 이번에도 대상만 바꿔서 돈을 뜯어오라고 시킨것이다. |
| | colspan="2" | <div style="margin: -6.0px -1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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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width:100%;"
| | 물론 이런 계산은 속내에 숨기고 나폴레옹이 전면에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 제국 술탄의 명을 받들어 맘루크의 학정에서 고통받는 이집트 민중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
| ! style="height:140px;" | [[파일:Flag_of_Spain_(1931–1939).svg.pn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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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ㅇㄴ.png|1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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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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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50%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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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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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align=center | {{글씨 색|#DB0A13|'''PLVS VLTRA<br>보다 더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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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align=center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F;" | '''1899년 12월 20일 ~ 1903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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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30%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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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리에고의 노래(El Himno de Ri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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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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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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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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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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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8,96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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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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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정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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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화제]],[[의회중심제]],[[스페인 인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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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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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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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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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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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주요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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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후세 안토네}}<br>{{글씨 색|#000|마누엘 카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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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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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주요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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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후안 네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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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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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스페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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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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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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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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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스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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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DB0A13; color:#FFCB4E;" |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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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스페인 페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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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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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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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공화파가 건설한 공화국이며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았으나 끝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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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연합왕국=
| | 1798년 7월 3일, 아부키르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다음날 알렉산드리아에 침공해 손쉽게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이어 나폴레옹은 카이로를 함락시키기 위해 사막으로 행군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입던 두꺼운 군복을 그대로 입고 왔고, 사막에서 꼭 필요한 식수와 신선한 식품을 준비하는데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는 등 사막 행군에 필요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따라서 더위와 갈증, 식중독으로 사망하거나 낙오한 병사들이 적지 않았고 전체 행군 속도도 매우 느려졌다. 따라서 되려 7월 21일에야 카이로 근처의 나일 강변의 마을인 엠바베에 도달할 수 있었고 엠바베에서 기다리고 있던 맘루크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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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lass="wikitable" style="border:2px solid #AE0D12; color:#FABE00; max-width:450px; float:right;"
| | 기자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인 탓에 "피라미드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맘루크군은 오래 전 몽골 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는 당대 최강의 기마병으로 영국제 신형 기병총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해버린지 오래였고 나폴레옹군의 머스킷 총검으로 만든 방진을 돌파하지 못하고 격파당했다. 결국 무려 3,000기에 달하는 맘루크군 기병이 전사하고 아랍 보병대도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29명에 불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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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style="width:450px; 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글씨 크기|16|스페인 연합왕국}}<br>united kingdom of sp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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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 <div style="margin: -6.0px -1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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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width: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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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height:140px;" | [[파일:스페인연합왕국.png|20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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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일:800px-Coat of Arms of Spain (1874-1931) Pillars of Hercules Variant.svg.png|15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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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50% style="background:#AE0D12; color:#FFCB4E;" | 국기<ref>내전 발발 당시 공화파 반대 시위대가 사용한 깃발이며 이후 마드리드 전역으로 널리 퍼지며 공식 국기가 되었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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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FCB4E;" |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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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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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align=center | {{글씨 색|#DB0A13|'''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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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olspan="2" align=center style="background:#AE0D12; color:#FFF;" | '''1900년 3월 2일 ~ 1909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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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width=30%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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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국왕 행진곡(Marcha 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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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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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마드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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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인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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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9,002,000명 <small>(1899년)</small><br>23,180,000명 <small>(1909년)</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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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정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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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헌군주제]],[[의원내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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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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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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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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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주요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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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owspan="2" | {{글씨 색|#000|알폰소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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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주요 행정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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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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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스페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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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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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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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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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스페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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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yle="background:#AE0D12; color:#FABE00;" |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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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씨 색|#000|스페인 페세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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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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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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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이 전투의 결과로 카이로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고 나폴레옹은 7월 25일 카이로에 입성하여 이집트 정복은 3주 만에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에 격분하여 대프랑스 동맹에 가세하고 나폴레옹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나폴레옹의 뒤를 쫓던 호레이쇼 넬슨은 8월 1일, 아부키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을 습격했지만 이를 예상한 프랑스 해군이 전력의 90%를 자침하거나 본토로 돌려보내 피해를 최소화했다. 이 해전을 나일 해전이라 부르며 영국군은 이 해전 이후로 프랑스군을 얕보며 아예 이집트로 육군을 보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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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왕국이 붕괴하고 세워진 후신 국가로 약 9년간 존속하였으며 이후 포르투갈과 통합하여 이베리아 연방을 선포했다.
| | 9월 6일 영국군 10만명이 알렉산드리아 해안가를 덥치며 대규모 상륙전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땅에서는 완전한 우위였지만 나폴레옹은 그때 알렉산드리아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공격을 원했던 다른 지휘관들과 다툼이 일어나 사실상 퇴출되었고 카이로에서 프랑스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중이였다. 영국군은 혼란스럽던 프랑스군을 덥치는데 성공했다. |
개요
1796년~1797년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공화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초 국면이라 할 수 있다.
결과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대부분의 지역을 손에 넣음과 동시에 프랑스 정부에 신임을 얻었다.
나폴레옹이 이탈리아에서 활약 중 라인강 전선에서도 주르당과 모로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승승장구해 네덜란드는 기존 공화국이 무너지고 프랑스 괴뢰국 바타비아 공화국이, 스위스는 헬베티아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개요
나폴레옹 전쟁의 두번째 국면.
1798년 한해동안 벌어졌으며 이집트 지역 해안가 일부를 점령하여 몇백년 후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었다.
진행
나폴레옹은 인도에 식민지를 가진 영국을 견제하고자 했다. 이집트는 인도와 영국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이집트를 정복할 수 있다면 영국과 인도 사이를 차단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공백상태에 빠진 인도를 쉽게 프랑스의 식민지로 삼을 수도 있다는 계산까지 한 듯하다. 거기다 이탈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인기 급상승 중이었던 나폴레옹을 견제하고자 하였던 총재 정부의 입장도 그대로 맞아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급한것은 돈이였다. 끝없는 전쟁과 반란에 시달리고 있던 프랑스 정부 입장에서는 돈이 바닥난지 오래였기 때문에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던것이다. 이탈리아 원정으로 뜯어온 돈이 다시금 떠오른 총재정부는 이번에도 대상만 바꿔서 돈을 뜯어오라고 시킨것이다.
물론 이런 계산은 속내에 숨기고 나폴레옹이 전면에 내세운 명분은 "오스만 제국 술탄의 명을 받들어 맘루크의 학정에서 고통받는 이집트 민중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1798년 7월 3일, 아부키르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다음날 알렉산드리아에 침공해 손쉽게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다. 이어 나폴레옹은 카이로를 함락시키기 위해 사막으로 행군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군은 유럽에서 입던 두꺼운 군복을 그대로 입고 왔고, 사막에서 꼭 필요한 식수와 신선한 식품을 준비하는데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는 등 사막 행군에 필요한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로 인해 따라서 더위와 갈증, 식중독으로 사망하거나 낙오한 병사들이 적지 않았고 전체 행군 속도도 매우 느려졌다. 따라서 되려 7월 21일에야 카이로 근처의 나일 강변의 마을인 엠바베에 도달할 수 있었고 엠바베에서 기다리고 있던 맘루크군 수비대를 격파했다.
기자의 피라미드가 보이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인 탓에 "피라미드 전투"라고 불리는 이 전투에서 맘루크군은 오래 전 몽골 군대를 격파한 경험이 있는 당대 최강의 기마병으로 영국제 신형 기병총으로 무장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변해버린지 오래였고 나폴레옹군의 머스킷 총검으로 만든 방진을 돌파하지 못하고 격파당했다. 결국 무려 3,000기에 달하는 맘루크군 기병이 전사하고 아랍 보병대도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프랑스군의 사망자는 29명에 불과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카이로는 나폴레옹에게 항복했고 나폴레옹은 7월 25일 카이로에 입성하여 이집트 정복은 3주 만에 끝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정복한 것에 격분하여 대프랑스 동맹에 가세하고 나폴레옹에 선전포고를 단행했다. 나폴레옹의 뒤를 쫓던 호레이쇼 넬슨은 8월 1일, 아부키르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해군을 습격했지만 이를 예상한 프랑스 해군이 전력의 90%를 자침하거나 본토로 돌려보내 피해를 최소화했다. 이 해전을 나일 해전이라 부르며 영국군은 이 해전 이후로 프랑스군을 얕보며 아예 이집트로 육군을 보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9월 6일 영국군 10만명이 알렉산드리아 해안가를 덥치며 대규모 상륙전이 시작됐다. 프랑스는 땅에서는 완전한 우위였지만 나폴레옹은 그때 알렉산드리아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당시 공격을 원했던 다른 지휘관들과 다툼이 일어나 사실상 퇴출되었고 카이로에서 프랑스로 돌아가길 기다리는 중이였다. 영국군은 혼란스럽던 프랑스군을 덥치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