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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회

영국 국민의회
원내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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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대 bbbb 내각
(18--년 -월 --일 ~ 현재)
국왕 폐하의 여당

국민당
187석
신임과 공급

자유당
64석
국왕 폐하의 가장 충성스러운 야당

노동당
154석
기타 야당

토리당
78석

휘그당
99석
무소속 18석
재적 600석 | 공석 0석

개요

1787년 스코틀랜드 분열 사태 이후 영국의 정치판은 매우 달라졌다. 기존엔 휘그당과 토리당의 양당체제였다면 현재는 개혁주의의 국민당이 여당이 되었고 휘그당과 토리당, 그리고 1884년 창당된 노동당과 함께 국민당을 견제하고 이는 상황이다.

심지어 국민당은 군주제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라 현 국왕인 알프레드 1세가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문제이다. 때문에 휘그당 - 토리당 - 노동당 3당연합이 잠깐 결성 된 적도 있지만 의견 차이가 심해 한달도 못가고 해산되었다.

유일하게 국민당과 의석 수를 나란히 했던 자유당도 --대 국민의회 선거 이후로 패배하고 성향이 완전히 뒤바뀌며 국민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국민의회

개요

1787년 스코틀랜드 분열 사태 이후 스코틀랜드와 협상을 통해 겨우겨우 통합했지만 귀족원에서 스코틀랜드 귀족을 차별하는 사건이 일어나며 또 다시 분열이 일어날 뻔 했다. 하지만 당시 국왕 조지 3세는 위기를 빠르게 수습하기 위해 귀족원, 서민원을 통합한 국민의회를 선포하며 귀족들의 의회를 아예 폐지해버렸다. 그런데 귀족원 의원 대다수는 국민의회로 통합되었기에 의원 직을 유지했으며 일부 의원에 한해 종신,세습이 허가되면서 잉글랜드 내에 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었다. 1899년 기준 종신직 의원은 57명이다.

국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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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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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브리튼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Kingdom of Great Britain
국기 국장
Dieu et mon droit
신과 나의 권리
1707년 5월 1일 ~ 1787년 7월 3일
노스햄프턴 조약 이전 스코틀랜드 탈퇴 이후
잉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국민국
상징
국가 God Save the King
지리
위치 브리튼 섬
수도 런던
인문환경
인구 1700년 8,500,000명
잉글랜드, 웨일스 5,600,000명
스코틀랜드 1,000,000명
총계 6,600,000명
1780년 15,300,000명
잉글랜드, 웨일스 8,600,000명
스코틀랜드 1,300,000명
총계 9,900,000명
언어 영어
종교 성공회, 장로회
민족 잉글랜드인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정치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국가원수
주요국왕 ---
---
---
주요수상 ---
---
주요사건 1707년 연합법 제정
1787년 연합법 폐지

개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Kingdom of Great Britain)은 제임스 1세의 집권 이후 동군연합 상태였던 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이 완전히 통합되어 1707년 5월 1일 앤 여왕 시기에 성립된 국가다.

1787년 연합법 폐지 사건으로 해체하였으며 이후 스코틀랜드 왕국없이 아일랜드와 함께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을 선포했다. 스코틀랜드 국민국이 합류한건 20년 이후이다.

구성국

그레이트브리튼이 성립될 시기에 가까웠던 1700년 잉글랜드, 웨일스의 인구는 5,600,000명, 스코틀랜드의 인구는 1,000,000명으로 합쳐서 6,600,000명이었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해체되기 직전 인구는 잉글랜드와 웨일스를 합쳐서 총 8,600,000명, 스코틀랜드는 1,300,000명으로 잉글랜드에 비해 인구가 매우 적었다.

잉글랜드의 수도였던 런던은 1600년에 인구가 200,000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했고 그레이트브리튼이 성립되었던 1700년에는 580,000명, 왕국이 해산되기 직전인 1785년에는 810,000명으로 증가해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번성했던 도시가 되었고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핵심적인 도시로 기능했다.

지역 수도 면적 인구 (1700년)
잉글랜드 런던 130,279㎢ 5,000,000명
웨일스 카디프 20,735㎢ 600,000명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77,933㎢ 1,000,000명
지역 수도 면적 인구 (1780년)
잉글랜드 런던 130,279㎢ 7,770,000명
웨일스 카디프 20,735㎢ 830,000명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77,933㎢ 1,300,000명

인구

1750년을 기준으로 영국의 지역별 인구는 다음과 같다.

지역 지역별 인구
잉글랜드/웨일스 7,200,000명
스코틀랜드 1,300,000명
아일랜드 3,150,000명
세인트키츠 20,000명
네비스 7000명
바베이도스 50,000명
앤티가 50,000명
자메이카 150,000명
기타 카리브 50,000명
뉴햄프셔 50,000명
매사추세츠 200,000명
코네티컷 100,000명
로드아일랜드 50,000명
뉴욕 100,000명
뉴저지 50,000명
펜실베이니아 100,000명
델라웨어 50,000명
메릴랜드 150,000명
버지니아 250,000명
노스캐롤라이나 50,000명
사우스캐롤라이나 50,000명
조지아 15,000명
합계 13,150,000명

체제

두 국가는 공동의 군대와 의회를 두기로 했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가 따로 존재하던 귀족 작위도 통합 이후 서임된 귀족부터는 그레이트브리튼 귀족으로 서임되었다. 법률은 스코틀랜드 법체계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1705년에 선출된 잉글랜드, 웨일스 출신 서민원(하원) 의원들 513명은 남은 임기를 그대로 이어갔지만, 독립국으로서의 마지막 선거가 1702년이었던 스코틀랜드 출신들은 1707년부터는 45명만이 통합 의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1787년 스코틀랜드에 대한 제정 지출이 심해지고 전쟁으로 인해 각 국가에 대한 불만이 심화됨에 따라 국왕이 폐지를 제안하고 서민원(하원),귀족원(상원)에서 폐지가 가결되며 스코틀랜드는 다시 분열되게 되었다. 때문에 각각 국가로 나뉘게 되면서 체제는 종료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스코틀랜드 의원들은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으며 스코틀랜드 국민국의 의원이 된다. 하지만 잉글랜드 왕국은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했다.

역사

산업 발전이 급격해지기 시작했고 7년 전쟁에서 프랑스의 식민지들을 점령해 본격적으로 대영제국이 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1798년 발발한 미국 독립전쟁에서 가까스로 승리해 군사적,경제적으로 피해를 받았던 시기도 있었다.

80년동안 본격적인 영국의 시작을 알리며 다양한 전쟁에서 승리했고 앞으로 승승장구만 할 줄 알았으나 기회를 노린 프랑스의 11월 전쟁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경제적으로 지원을 필요로 했던 스코틀랜드를 사실상 퇴출 시키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결과적으로 조지의 실패작이라 부르며 스코틀랜드를 버리며 분노를 사 통합에 장장 20년이나 걸린 것 또한 조지 왕의 무능력함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는 일명 조지의 걸작이라 부르는 시대가 도래하며 매우 크게 발전한다.

1899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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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 보기 ]
인물 국가 정치

1899는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다양한 국가들의 역사를 설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근대 시대 중심의 세계관 입니다.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국기 국장
Dieu et mon droit
신과 나의 권리
1789년 4월 16일 ~ 1805년 1월 9일
아일랜드 연합법 이전 스코틀랜드 재통합 이후
잉글랜드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
아일랜드 왕국
상징
국가 God Save the King
지리
위치 브리튼 섬,아일랜드 섬
수도 런던
인문환경
인구 잉글랜드 9,000,000명
웨일스 570,000명
아일랜드 4,000,000명
총 13,570,000명
언어 영어
종교 성공회, 장로회
민족 잉글랜드인
아일랜드인
웨일스인
정치
정치체제 입헌군주제 (1802년)
전제군주제 (1805년)
국가원수
주요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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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수상 ---
---
주요사건 1789년 아일랜드 연합법
1802년 군주제 강화

개요

스코틀랜드와 분열을 겪은 잉글랜드가 부랴부랴 아일랜드와 통합하여 출범한 국가이다. 국가 존속 기간동안 크고작은 잡음들이 많았으며 스코틀랜드와 통합 시도를 5차례나 시도하며 스코틀랜드가 합류함에 따라 국명을 변경했다.

1802년 의회가 스코틀랜드 통합에 대해 반대하자 조지 3세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군사들을 모아 친위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러한 조지 3세의 전제군주제는 그가 사망하는 1820년까지 유지되었다.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

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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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 보기 ]
인물 국가 정치

1899는 17세기부터 21세기까지 다양한 국가들의 역사를 설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근대 시대 중심의 세계관 입니다.
천팔백구십구
One thousand eight hundred and ninety-nine
공화제와 군주제는 결코 섞일 수 없다.
장르 대체역사
연재자 Qpxntm
연재 시작일 2023년 --월 --
진행도 0%
저작권 CC-0

개요

Qpxntm가 연재하고 있는 대체역사 세계관이며 16~17세기부터 달라진 역사로 인해 생기는 변경점을 다루고 있다.

소개

11월 전쟁은 영국을 더욱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아메리카 식민지 독립전쟁을 겨우 막았더니 이젠 프랑스가 달려들어 대륙의 영토까지 점령했다. 돈이 부족했다. 더이상 버틸 수 없다. 스코틀랜드를 버려 살 길을 찾아야만 했다.

스코틀랜드가 독립한 이후 잉글랜드는 프랑스와 평화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냈다. 1788년 12월, 첫번째로 재통합을 제의했으나 거절당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 1802년에도 재통합을 위해 지원을 약속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젠 국민이나 의회나 하나같이 통합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조지 3세는 친위쿠데타를 일으켜 국민의회를 해산시켰다. 1805년 스코틀랜드의 수상이 교체됨가 동시에 통합에 찬성하며 그레이트브리튼 연합왕국이 출범했다.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실패했다. 쿠데타 실패로 인해 나폴레옹은 전국민적으로 반감을 샀고 재차 쿠데타를 실행하며 겨우 승리했다. 하지만 2차 쿠데타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공화제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의원들이 의회에 있었으나 모두 학살당했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의 피의행진이 시작되었다.

빈에서 협상중이던 대타협이 갑작스러운 테러로 인해 중단되었다. 헝가리에선 독립을 주장하는 국민들이 늘어났다. 헝가리에게 임시자치권을 부여했다. 더이상 헝가리에서 군림 할 수 없다. 너무나 큰 구멍이 생겨버렸다. 도나우 강을 따라 군대가 들어섰고 이제 결과만 기다릴 뿐이다.

양시칠리아가 로마를 먼저 점령했다. 사르데나가 프랑스에게 점령당하며 반도의 주인은 결국 양시칠리아가 된 것이다. 프랑스가 공격해오기 전에 먼저 공격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