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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민공화국]]의 제3대 정부수석을 지낸 독재자 및 전쟁범죄자. | [[일본인민공화국]]의 제3대 정부수석을 지낸 독재자 및 전쟁범죄자. | ||
변호사로 활동하다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했으며, 일본인민공화국 초기에는 법무장관을 지냈다. 이후 경제성장을 이끈 아라하타 | 변호사로 활동하다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했으며, 일본인민공화국 초기에는 법무장관을 지냈다. 이후 경제성장을 이끈 [[아라하타 칸손 (빌레펠트)|아라하타 칸손]]과 공산당 내 온건파의 행보에 반발하던 군부를 회유하여 온건파를 압박,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브리튼 연방과 프랑스 코뮌과 3국동맹을 맺은 뒤 제2차 한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한 일이 워낙 잔혹하고 거대해서 본인이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일본 내 생티칼리스트들에게도 최악의 평가를 받고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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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 빌레펠트 연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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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일본인민공화국 정부수석 토쿠다 큐이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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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9월 12일 |
일본제국 오키나와현 나고시 (現 류큐국 나고특급시) | |
사망 | 1948년 12월 23일 (향년 54세) |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형무소 | |
재임기간 | 제3대 일본인민공화국 정부수석[1] |
1941년 10월 18일 ~ 1945년 8월 15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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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일본인민공화국의 제3대 정부수석을 지낸 독재자 및 전쟁범죄자.
변호사로 활동하다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했으며, 일본인민공화국 초기에는 법무장관을 지냈다. 이후 경제성장을 이끈 아라하타 칸손과 공산당 내 온건파의 행보에 반발하던 군부를 회유하여 온건파를 압박,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정권을 잡았고, 브리튼 연방과 프랑스 코뮌과 3국동맹을 맺은 뒤 제2차 한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한 일이 워낙 잔혹하고 거대해서 본인이 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후 일본 내 생티칼리스트들에게도 최악의 평가를 받고있다.
평가
토쿠다 큐이치는 태평양 전쟁과 제2차 한일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일 뿐만 아니라 일민공의 군국주의화를 주도한 원흉이었고, 그 결과 사형에 처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세계 질서에서 그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여지는 거의 없다. 즉, 당시 일민공은 전형적인 생티칼리즘 공화국이 아닌 막부가 통치하는 나라에 가까웠으며, 그것도 일본 역사상 가장 광기에 찬 막부였다. 막부가 있으면 쇼군이 존재하는 법인데, 이 일본공산당 막부 내에서 쇼군의 위치에 있던 사람이 바로 토쿠다 큐이치였다.
다만 일각에선 그가 개전 책임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인이 저지르지 않았던 악행조차 덤터기 쓰고 있는 억울함도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군 전체가 토쿠다 큐이치에게 복종했던 것도 아니었다. 민간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총리 토쿠다 큐이치가 일본군을 통제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측면도 있었고, 심지어 양군의 승패 여부조차도 모를 정도로 육군과 해군은 사실상 적군처럼 대립했다. 다만 이 사건 이후로 도쿠다도 국방장관을 경질하고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앉히는 등 나름대로 일본군을 통제하기 위한 압력을 넣기는 했다.
물론 토쿠다는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중일전쟁의 확대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인 만큼, 전쟁 중에 일어난 모든 참상에 대한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토쿠다가 사빈코프와 동일 선상에 놓일만큼 악랄한 독재자라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사빈코프는 본인이 직접 민간인 학살을 지시하고, 독러전쟁 당시 국제법을 어겨서라도 독일인 말살에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린 만큼 러시아군의 모든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희대의 학살자임이 명백하다. 그러나 토쿠다는 독재자에 군국주의자였을지언정 직접적으로 학살을 지시하거나 인종말살 따위를 외친 적은 없다. 마산 대학살을 비롯한 일본군의 학살 대부분은 현장 지휘관 혹은 휘하 장교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 토쿠다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사빈코프와 달리 토쿠다는 군부의 모든 악행에 관여한 인물은 결코 아니며, 당시 일본군에서 반인륜적인 악행을 저지른 미나미 지로, 오오이즈미 켄조, 미후네 토메키치, 미야모토 켄지 등에 비하면 그나마 상식적인 편에 속한다. 그렇기에 토쿠다 큐이치라는 인물을 단순히 같은 추축국의 수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빈코프 같은 인물들과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것은 지나치다는 주장도 꾸준히 나오는 편이다. 즉, 토쿠다는 개전 책임자로서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토쿠다를 사빈코프 같은 만악의 근원으로 취급하다 보면 더 악랄한 자들의 책임이 묻힐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딱 한 가지 확실한 건 악행의 여부를 떠나 본 문서에도 적혀있듯 최종 지휘관 측면에서 보자면 무능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의 행동이 결국 일본을 패망으로 이끌었으며 그의 사후 겨우 2년만에 일본 전쟁이 일어나며 일본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