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 계획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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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설중매"는 "현대까지 대한제국이 존속한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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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신무 계획(神武計畫)은 대한제국의 핵개발 핵개발 프로젝트이다.

암호명이자 프로젝트의 명칭인 신무(神武)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고황제의 시호인 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중 신성한 무장을 의미하는 신무(神武)에서 유래하였다.

상세

제2차 세계 대전

대한제국의 핵개발은 1940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한소전쟁의 패배로 인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재침을 우려하던 의화군혜종을 비롯한 육해군의 수뇌부들은 소련의 재침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결전 병기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이를 위해 핵분열에 따른 고온의 방사성 붕괴열을 이용한 폭탄을 제작한다는 발상에서 시작하였다.

1940년 육군항공기술연구소에서는 화학자 이승기에게 원자폭탄에 관하여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승기는 원자폭탄 생산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원자폭탄에 필요한 우라늄 광석이 대한제국 내지에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한 보고를 했다. 이에 이승기는 1941년 6월에 대한을 대표하는 물리학자 도상록에게 위임하여 원폭 개발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다만, 당시 원자폭탄의 개발에는 이학연구소의 몇 명밖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 계획이 극비리에 추진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규모의 개발 계획은 박사급의 핵심연구인력 4000여명, 지원인력까지 포함하면 최대 10여만 명을 동원한 맨해튼 계획에 비하여 터무니없이 적은 인원으로써, 당시 대한제국에서 추진한 원폭개발이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계획임을 객관적 수치로 잘 보여주는 것이다.

1944년 U235를 농축분리하기 위한 UF6 제조에는 성공하긴 하였으나 정작 중요한 우라늄 농축은 실패하여 개량과 보완을 진행하던 도중, 독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지자, 총리 의화군은 원자폭탄이 드레스덴에 처음 떨어진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1945년 8월 중순, 비밀리에 진행되던 핵폭탄의 개발 계획을 전면 수정하여, 핵개발에 국가적인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대한원자력연구소(KAERI)를 설립하여 핵무장 계획을 구체화한다. 신무 계획(神武計畫)이라는 이름도 이 때 붙은 것이다

전후 핵개발의 본격적인 진행

1946년, 본격적으로 대한원자력연구소에서 핵무기 연구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때, 독자적 핵개발의 한계를 직감한 정부는, 핵무기의 공동개발로 선회하여 핵무기 개발 과정에서 미국의 통수를 맞은 영국과 접촉하였으나, 전간기 대한의 호전성을 지켜본 영국은 한국의 제안을 거부한다. 이에 대한은 미국·영국·캐나다에 의해 핵개발을 방해 받던 불란서와 손을 잡았다. 1950년대부터 한불 양국은 긴밀한 협력을 갖고 핵무기 기술을 전수, 공유하고 같이 개발하였다.

대한이 불란서와 함께 공개적으로 핵개발을 시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기 시작하자, 유엔, 미국, 소련 등이 반발하면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양국의 핵개발 포기를 종용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기에 이르렀지만, 핵개발을 꼭 하고야 말겠다는 나라는 절대로 막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 미국과 영국과 소련의 대한 외교/경제 고립 전략은 대한과 불란서의 핵무장과 자국에 대한 핵우산 제공을 바라던 ECSE 국가들과 일본이 상호간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제공하면서 무력화됐다. 결국 대한제국은 1959년 3월 초 남양군도에서, 불란서는 1959년 3월 말 알제리(당시 프랑스 영토)에서 핵실험에 성공했다.

핵실험 직후 대한제국은 총력타격전략이라는 핵전략을 채택했다. 일단 어떤 국가가 대한제국과 핵전쟁을 시작한다면 (다시 말해 대한이 핵공격을 받는다면) 대한제국 사민들의 몰살은 기정사실이지만, 대한은 상대국가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핵을 쏟아부어 '최대한 많은 적국의 인간을 길동무로 끌고 가겠다'는 식의 무서운 전략이다.

이러한 대한의 핵전략은 불란서의 핵전략과 일치상통했고, 이러한 한불 양국의 핵전략에 대해 케네디 대통령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이 제안한 유연반응전략을 채택하면서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러나 쿠바 미사일 위기 이후 맥나마라도 "유연한 대응 그딴 거 없고 그냥 같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유연반응전략이 무엇인가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유럽전선에서 소련이 전술핵을 한 발 사용하면 미국도 한 발 사용한다. 소련이 두 발 사용하면 미국도 두 발 사용한다. 소련 공산당의 서기장도 미국 대통령도 사람이기에 죽고 싶지 않으므로, 이러한 핵전략은 결과적으로 미국과 소련을 직접적으로 겨누고 있는 장거리 전략핵의 사용가능성을 줄여 워싱턴과 모스크바의 안전을 보장해 준다. 허나 동시에, 이는 미국-소련 수뇌부가 전술핵사용을 결단하는데 따르는 부담감을 크게 낮춰주는 부작용이 있다. '핵을 사용하면 미국과 소련도 끝장이야. 그러니 유럽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도 핵은 최대한 자제해야지'가 아니라 '핵무기 사용을 '안전한' 유럽전선에 국한시킬 수 있다면, 전술핵 몇 발 쯤은 사용해도 괜찮지 않겠나?'로 상황이 바뀐다는 것.

미국과의 타협

이 갈등은 중경 원자로 공습이 성공한 1963년에 끝난다. 앞서 말했듯이, 맥나마라도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유연반응전략의 한계를 인지한데다가, 대한의 비핵화를 명분(...)으로 핵개발을 선언한 중국의 핵시설을 타격하면서까지 핵을 보유하겠다는 대한의 그 고집에 질려서(…) 결국 대한에게 기술지원을 해주기에 이른다. 어차피 대한이 독자적인 핵무장에 성공한 이상, 차라리 도와주고 관계개선을 시도하려고 한 것.

또한 미국은 과학자들을 파견해 대한의 남양군도 핵실험장의 건설을 지원했다.

당시 핵개발을 주도한 도상록 박사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대한의 핵무기 관계자들은 모두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황국의 국체를 호지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핵개발이 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핵개발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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