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개월 전

올해 연말에 쓸 남부맹방 승리한 세계관

<시놉시스>

1864년 대선을 앞두고 4년이나 지속되는 남북전쟁에 대한 회의 여론이 높아졌다. 1864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셔먼 장군이 이끄는 북부군이 애틀랜타 전역에서 참패하고 셔먼이 포로로 붙잡히면서 링컨의 지지율은 수직급하, 남부 유화파인 조지 매클레런이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1865년 4월 15일 남부맹방은 아메리카 합중국의 수도 워싱턴 D.C.를 점령하고 조지 매클레런 대통령으로부터 항복 선언을 받아낸다. 이로써 남북전쟁은 남부맹방의 승리로 마무리되며 미합중국은 멸망하고 아메리카 연합국이 출범한다.

 

<민주당 Democrats>

전쟁민주당과 평화민주당으로 나누어져있던 미국 민주당은 전후 로버트 E. 리 대통령을 필두로 하는 주류 남부민주당원이 앤드루 존슨 등의 전쟁민주당원(=노예제 폐지 민주당원)을 모두 숙청하고 평화민주당(=남부유화파)와의 동맹을 추구한다. 민주당은 제퍼슨 데이비스-로버트 리로 대표되는 남부의 강경 노예제 존속파를 지나, 1870년대에 접어들면서 알렉산더 롱, 클레멘트 발렌디검 등의 온건파 노예제 정당으로 그 성격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한편 이들도 미국의 막강한 공업 생산력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80년대에는 새뮤얼 틸던과 같이 뉴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금융민주당원들이 성장하였다.

 

<휘그당 Whigs>

1853년 노예제 폐지를 기치로 신생 창당된 정당인 공화당은 해체당한다. 그러나 非민주당 소속으로 대통령으로 재임했던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은 살아있었고 그는 공화당의 잔재들을 수습해 스카일러 콜팩스 등 일부 공화당원들을 모아 휘그당을 재창당한다. 이 당은 온건보수주의와 "북부의 권익"을 지지하면서 남북전쟁 직후 미국의 제2당으로 존속했다. 스카일러 콜팩스는 링컨의 잔재를 수습해 휘그당의 노선을 재정비하고 민주당에 맞서는 일부 진보 정책을 입안하나 부정부패로 인해 정계에서 물러난다. 이후, 187~80년대에는 로스코 콩글링과 제임스 블레인과 같은 지도자들이 활약하였다.

 

<급진사회당 Radical Socialists>

에이브러햄 링컨이 불명예스럽게 낙선한 이후, 그의 정치적 동지 찰스 섬너 상원의원은 잔악한 맹방의 정권을 피해 영국으로 망명을 가는 처지가 되었다. 그곳에서 그들은 페이비언 사회주의의 희망을 목격했으며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하며 자신의 자유주의 사상과 급진적 노예폐지론을 마르크스주의 해방론과 결합시킨 온건 사회주의 사상인 "마르크스-링컨주의"를 창안한다. 비록 찰스 섬너는 건강이 악화되어 영국에서 객사하고 말지만, 1856년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나선 바 있는 존 C. 프리몬트는 그의 사상을 수정, 계승해 보다 온건한 급진주의적 사회주의를 미국에 도입하였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반노예제 급진파 공화당원들이 창당한 당이 급진사회당이다.

 

<경제>

남부맹방이 승리하게 되면서 금융국제주의로 힘차게 나아가고 있던 미국은 큰 위기에 직면했다. 또한 중앙은행과 링컨의 "그린백" 화폐에 반대했던 민주당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미국은 남북전쟁 직후인 1871년 엄청난 공황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보불전쟁의 여파로 유럽 투자자들이 미국에 예치한 투자금을 빼가 전쟁 자본으로 사용했고, 또 링컨이 발행한 그린백 화폐가 모두 휴지조각이 되면서 화폐의 가치가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하에 강경한 노예제 유지론자들은 힘을 잃게 되며, 한편으로 J. P. 모건과 같은 신흥 금융 재벌들은 금융위기를 틈타 작은 기업들을 인수합병하는 식으로 자본을 확충하여 "강도귀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880년대 북부와 남부의 경제 격차 역전이 다시 발생하였고 노예제도 유지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이 부각된다.

 

<외교>

남부맹방은 영국 귀족주의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명분으로 영국과 친교 관계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노예제도의 유지는 미국의 국제적 위신을 크게 추락시켰으며 이는 남부맹방이 내부적으로는 쿠바를 합병하고 스페인을 공격하는 등의 제국주의를 추구함과 동시에 국제적으로는 보호무역을 추구하는 쇄국주의를 펼치는 이유가 되었다.

 

<노예제도의 운명>

금융 기반 경제가 발달하며 노예제도는 크게 경제적 가치에서 타격을 입었으나 여전히 남부에 있어서는 중요한 산업이었다. 1896년 대선 당시 노예제 폐지는 중요한 화두였다. 휘그당의 후보로 나선 윌리엄 매킨리는 노예제도의 불필요성을 부각하며 노예 해방을 소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반면, 민주당 후보였던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뉴욕의 소수 금융귀족이 노동자와 농민의 자산인 노예를 뺏으려 한다며 매킨리를 공격했다. 선거 결과 노예제 옹호론자인 브라이언이 당선되며 노예제도는 미국에 계속 유지되게 된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인 목적 등으로 인하여 도망노예법 등은 브라이언 행정부 시기 폐지되었으며 노예를 필요로 하는 산업의 범위도 축소되었다.

 

<휘그당의 몰락>

이런 배경 속에서 금융 기반 경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는 있지만 동시에 노예제도의 폐지도 지지했던 노동조합원과 도시 진보층은 급진사회당에 많은 표를 던졌다. 휘그당은 J. P. 모건 등 산업가들을 과하게 보호한다는 비판 속에서 연이어 터진 부정부패 스캔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대부분의 휘그당 지도자들이 노예제 지지 및 노동조합 지지 여부에 따라 급진당 혹은 민주당으로 뿔뿔이 흩어지며 휘그당은 뉴잉글랜드 지역의 지역정당으로 몰락한다.

 

이 이후는 생각 안해봄

 

<역대 대통령>

초대: 제퍼슨 데이비스 / 1861~1869 / 민주당

제2대: 로버트 E> 리 / 1869~1873 / 민주당

제3대: 알렉산더 롱 / 1873~1885 / 민주당

제4대: 제임스 블레인 / 1885~1889 / 휘그당

제5대: 새뮤얼 틸던 / 1889~1893 / 민주당

제6대: 제임스 블레인 / 1893~1897 / 휘그당

제7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 / 1897~1905 / 민주당

제8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 1905~1913 / 급진당

제9대: 우드로 윌슨 / 1913~1921 / 민주당

제10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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