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펼치기 · 접기 ]
|
개요
역사
개헌 사태~제7대 대선 이전
당시, 개헌 사태로 인하여 친태영호계와 친김종필계가 "피흘려 이룬 민주정당, 문민정부의 역사를 박근혜 본인이 직접적으로 파괴시키고 있다."라는 발언까지 하면서, 굉장한 갈등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약 100석 정도의 의원들이 대규모 탈당을 감행하게 된다. 그리고, 비박계들이 모여 현 국민전선을 창당하게 된다. 실제로 국민전선을 창당하자 마자, 박근혜에 실망한 지지자들, 민주계들이 합심하면서 지지율이 1위를 달성한 적이 있었다. 실제로 그 때 당시 지지율로 총선을 치르게 되면, 통합 대한민국이 과반도 못 먹는 참패의 역사가 시작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 한국-만주 분쟁을 통해 한민족 자치구를 한국에 편입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그러자, 국민전선에 갔던 지지율이 다시 통합 대한민국으로 옮겨지게 되고, 결국 국민전선은 순식간에 지지율이 18%로 폭삭 내려앉게 된다. 그리고, 대선에서 돌연 김종필 대표가 불출마 선언을 하게 되자, 사실상의 태영호 당선이 확실시 되었고, 실제로 78.12%로 당선이 되었다. 그리고, 지속적인 박근혜 정부 비판 및 보수 단체를 통한 박근혜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고자 하였다.
제7대 대선 이후
하지만, 선거를 말 그대로 개같이 말아먹게 된다. 결과는 20석, 겨우겨우 교섭단체를 만든 수준이다. 현역 국회의원도 전원 낙선하게 되면서, 사실상 당의 몰락이 결정화되었다고 평가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참패의 결과였다. 이 여파로 태영호 대선 후보 및 비박계들은 책임을 지고 대규모로 당대표 및 당의 고위직에 물러나게 되고, 그렇게 국민전선은 1년동안 매우 큰 수난기를 겪게 된다. 국민전선은 대선 이후동안 지지율이 2%대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고, 이대로 가면 1석도 못 얻을 전망이었다. 그러나, 국민전선에 난민, 동성애자, PC 반대파들이 주축으로 있는 강기훈계가 자기 단체원들을 데리고 국민전선의 주요 요직을 사실상 점거하게 되면서, 국민전선은 통합 대한민국과 완전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제1대 지선
통합 대한민국이 지지율 난국을 면하기 위해서 민주당과 노동당과 협치하여 지방자치제를 상정하게 되면서, 지방선거가 사실상의 중간선거처럼 열리게 되었다. 즉, 각 지역의 민심을 조사하기에 매우 적합한 선거였던 것이다. 강기훈계는 당권을 잡자마자, 남아있는 비박, 지역 중심의 의원들을 붙잡으면서 그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 지역구 관리를 더욱 더 철저히 하라고 사실상 명령하게 된다. 그리고, 기존의 비박계 의원들의 지역구에서 비박계 의원들을 다시 공천시킬 수 있도록 최대한 정치적 책임을 배제하기 위해, 강기훈계의 단체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만큼 정치 거물들이 일부는 복귀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되었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에서 일으킨 한만 전쟁으로 인하여 중화계 난민들이 지속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자, 반난민 정서가 강해지면서 강기훈 비상대책위원장도 반난민을 중심으로 정치를 해나가게 된다. 또한, 노동당 및 민주당 외 기타 야당들과 역시 협의를 통해 사실상의 전략공천을 하게 되었다.
제1대 지선 이후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노동당 9명, 국민전선 2명, 민주당 2명으로 야당연대가 여당을 10년만에 최초로 이겨버리는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심지어 지지율이 1% 미만까지 갔던 국민전선은 반난민 정서 및 함경북도, 함경남도 지역구 의원을 이용하여 지선에 출마시키게 되고, 결정적으로 민주당과 노동당과의 단일화까지 성공적으로 마무리 하게 되면서, 함경북도, 함경남도에서 당선자를 이끌어내게 되었다. 이 결과로 인하여 강기훈은 굉장한 정치적 입지를 얻게 되고, 국민전선 지지율도 함경도, 평안도, 자강도, 양강도 지역에서 크게 이끌어내게 되며, 지지율이 15%를 돌파하게 된다. 덕분에, 전 비박계들도 다시 정치로 돌아오게 되면서 사실상 제2의 전성기가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