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명국 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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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 초대 황제 경천제 | 慶天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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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71년 9월 16일 |
대청 복건성 장주부 (現 푸젠성 싼밍시 칭류현) | |
사망 | 1947년 2월 23일 |
난징시 위화타이구 수도 교도소 | |
묘소 | 쓰촨성 간쯔 티베트족 자치주 공동묘지[1] |
재위기간 | 위명국 황제 |
1940년 3월 30일 ~ 1945년 8월 1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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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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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중국의 정치인이자 상인, 한간으로 위명국의 유일한 황제였디.
생애
상하이의 권세가
1871년, 푸젠성에서 지역 유지인 주혁중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년기 푸젠성에 흔히 남양함대라고 불리는 남양수사가 창설되자 부친이 남양수사에 여러 물품들을 공급하며 가문이 번성하게 되었고 이때 모은 자금을 바탕으로 상하이로 상경하여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다양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상하이에 정착하여 부친과 마찬가지로 상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이 당시 첫째 부인 신씨와 결혼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이혼하였다. 당시 조계의 서양인들을 주 고객층으로 삼으며 사업의 덩치를 불렸으며 1900년 무렵에는 상하이 남부에서 손에 꼽히는 대부호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진허우링과 재혼함으로서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리게 되었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주융린은 혁명에 적극 동참하였다. 그 이유는 그가 만주족의 청나라, 즉 만청(滿淸)에 대하여 극도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어린 시절부터 명 황조의 후손이라는 주입식 교육을 아버지로부터 열심히 받은 그에게 있어서 이번 혁명은 그의 반청복명적인 사상을 실현 시킬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로 보였다.
그는 상하이 봉기군을 지원하여 혁명군의 상하이 남부 장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후 리위안훙의 공화당 소속으로 초대 국회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나 이후 진보당 창당에 반발하여 공화당을 탈당하였고 이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국회해산을 단행하면서 의원직을 상실하고 말았다.
이후 교통계에 가담하였으나 1915년 위안스카이가 중화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는 홍헌제제를 단행하고 교통계가 이를 옹호하자 격하게 반발하여 교통계와 결별하고 호국군에 가담하였다. 당시 주융린은 내심 상하이 시장 등의 직위를 받아 상하이의 수반이 되거나 안복계의 지지를 받아 국회에 입성하여 중앙 정계에 입문하는 등의 대가를 기대하였으나 기대와는 달리 돤치루이와 안복계는 교통계를 내치지 않고 그대로 기용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주융린은 이에 반발하였으나 별 다른 수는 없었고 결국 국민당의 2차 북벌 시기까지 그는 조용히 사업을 유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장제스의 주도하에 국민혁명이 발발하여 상하이에서 북양정부의 영향력이 거세되자 그는 누구보다도 국민정부를 열렬히 환영하였다.
한간의 길
비참한 말로
평가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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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공화당(중국) (민국 38) | 1912 - 1913 | 정계 입문 |
무소속 | 1937 - 1947 | 탈당[6] |
중국국민당 | 1929 - 1937 | 입당 |
무소속 | 1937 - 1947 | 제명 사망 |
여담
대중매체에서
둘러보기
- ↑ 본래 수도 교도소 내의 죄수묘지에 뭍혔다가 1951년 이장되었다.
- ↑ 공교롭게도 국민정부 3대 주석 린썬과 동창이다.
- ↑ 젊은 시절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듯 하였으나 한간의 길에 접어든 이후부터는 쇼와 천황을 찬양하는 말을 하는 등 사실상 배교자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다. 다만 전후 수감된 이후에는 간수에게 성경을 요구하는 등 신앙을 회복한 듯 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 ↑ 당대 기준은 물론 현대 중국인 기준으로도 장신이었다.
- ↑ 5.0 5.1 당연하게도 중국 정부는 그를 정통 황제로 인정하지 않으며 중국 본토의 대다수 주씨들도 그를 흑역사로 치부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시호나 묘효가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그는 중국에서 보통 참칭제(僭稱帝)나 위명제(偽明帝)로 불린다.
- ↑ 진보당 창당에 반발하여 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