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황제 직속 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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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밀원 枢密院 | Privy Council of Korea | |
설립일 | 1875년 6월 28일 |
전신 | 승정원 공사청 |
추밀원 의장 | 이회창 |
추밀원 부의장 | 김양 |
주소 | 지도를 불러오는 중... |
황성 한성부 종로구 경희궁로 1 | |
내부부국 | 외청 n개, 소속기관 n개, 산하 기관 n개 |
직원수 | 5245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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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추밀원(枢密院)은 황명의 출납과 황실 사무, 내각과 의회의 관계 조정등을 담당하는 대황제 직속의 행정기관이다.
역사
개항 전까지 조선 시대의 관제는 국정 사무와 왕실 사무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고, 역대 국왕의 계보와 초상화를 보관하며 국왕과 왕비의 의복을 관리하고 왕의 친척을 다스리던 종친부, 부마에 관한 사무를 담당한 의빈부, 왕친과 외척의 친목을 위한 사무를 관장하던 돈녕부 등 왕실 사무를 맡은 기관이 이리저리 나뉘어 있기도 하고 육조에 소속되어 있기도 해서 이중성을 지녔고, 고조 즉위 후인 1873년(개국 482년) 이후 2차례에 걸친 관제 개혁에서도 시정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일신 이후, 1879년 기존의 2성 7부[1]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대황제의 황권을 강화하고, 보필하기 위해 영국의 국왕 자문기구인 추밀원을 본따 만들어졌다. 이때 추밀원의 수장인 추밀원 의장은 대내사성의 수장인 대내사상 다음의 서열로 정하고 종래 명확한 구별이 없었던 국고와 왕실 재정의 분리를 실현했다. 그러나 국왕의 자문기관인 영국의 추밀원과 달리, 대한의 추밀원은 황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의 역할과 군령권, 황족 사무, 내각과 의회의 관계를 중재하는 등 매우 막강한 권한을 가졌다.
이렇듯 황제의 보좌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만큼, 상당히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황제독재정이 정점에 다다른 열종 시기 추밀원의 위세는 절정에 달해 황권과 관련된 사무를 추밀원에 배치해 자신이 직접 통제했다. 이 당시 추밀원은 소속 재관의 수만 무려 8천 명을 넘는 거대조직이었다.
이러한 추밀원은 고종 치하에서 추밀원은 정책의 큰 그림을 그리거나 정무적 연결기능을 담당했고 정책의 실무 집행은 내각이 맡는 형태로 축소되었고, 이후 인덕황제가 즉위한 현재까지도 고종에 의해 확립된 시스템은 그대로 두고 세부적인 직제만 조정하면서 유지되고 있다.
조직
역대 비서시중
특징
논란 및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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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3년 말, 고조가 3성 6부룰 부활 시킨 이후 1874년 초 천지춘하추동(天地春夏秋冬)의 육상(六象)에 따라 직제를 나누었던 상서성의 6부를 개편하여 우리가 흔히 아는 이호예병형공 형태로 원복한 직후, 병부를 육군부와 해군부로 나누었다. 이후 1875년에는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대내사성으로 개편하여 최종적으로 2성 7부의 형태로 정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