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 대황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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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5대 황제 고종 열황제 | 高宗 烈皇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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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경(李澃) → 이산(李澃)[1] | ||||||||||||||||||||||||||||||
자 | 천우(天祐) | ||||||||||||||||||||||||||||||
출생 | 1940년 1월 19일 | ||||||||||||||||||||||||||||||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 |||||||||||||||||||||||||||||||
붕어 | 2019년 4월 13일 (향년 79세) | ||||||||||||||||||||||||||||||
황성 한성부 덕수궁 석조전 | |||||||||||||||||||||||||||||||
재위기간 | 대한제국 제5대 황제 | ||||||||||||||||||||||||||||||
1971년 10월 23일 ~ 2017년 11월 27일 | |||||||||||||||||||||||||||||||
대한제국 태상황제 | |||||||||||||||||||||||||||||||
2017년 11월 27일 ~ 2019년 4월 13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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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고종 열황제(高宗 烈皇帝)는 대한제국의 제5대 황제이며 선정대원왕의 삼남이다.
휘는 산(澃)이며 자는 천우(天祐)이었다. 1940년 1월 19일에 태어나 2019년 4월 13일 붕어했다. 1971년 10월 23일부터 2017년 11월 27일까지 46년간 재위했고, 시호는 대성강덕문선신효열황제(大成康德文宣神孝烈皇帝)이다.
회종 사후 혼란스러운 정국속에서 9.18 사건을 진압하며 신종 효황제의 양자로 입적되어 황태자로 책봉되었고, 회종 사후 황제로 즉위하였다, 즉위 이후 1895년 반포된 이래 한번도 수정 없이 유지되던 대한국 국제를 폐지하고 대한제국 헌법(신 헌법)을 제정하여 대한제국에 한국적 입헌군주제를 뿌리내리게 했으며, 정치적 위기의 순간마다 중재자 역할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해 영명한 군주로써 존재감을 과시했다. 또한 '경제 기적'이라고 칭해지는 대한제국의 경제 성장을 스스로 주도했다.
이후 2017년 손자 이연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어 통수권과 일부 권한을 섭정하며 인덕황제의 치세를 공고히 다졌으며 중국과의 국경분쟁에서 단호한 모습을 보이며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황후인 현인열황후가 승하한 이후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2019년 4월 13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붕어한다.
생애
묘호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그러나 당연히 지금까지 업적과 행보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한국 정치에서 황제는 단순한 입헌군주가 아니다. 대한의 황제들은 능동적인 전제군주로써, 근대화와 열강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했고, 고종은 스스로 전제군주에서 대한제국 헌법이라는 신헌법을 제정해, 백성들에게 민주주의를 '하사'했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대한제국에 안착시켰다. 즉, 대한의 황제는 입헌군주정의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 군주로써의 역할을 훨씬 뛰어넘는, 민주주의의 수호자이자, 성리학적 통치질서의 정점으로 가장 중요한 정치적 행위자로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고종은 긴 재위기간 동안 70년대부터 꾸준하게 신성화된 절대적 권위를 이용해 국가의 조정권자라는 역할을 넘어서, 국왕이 만기친람했던 조선시대 처럼, 고종은 국정 그 자체를 주도하는 절대군주로 자리매김했다.
애초에 성군은 민주주의와 양립가능한 존재가 아니다. 성군이란 자신의 권력으로 나라를 이롭게 한 군주를 부르는 명칭인데, 민주주의에서 모든 권력은 사민으로부터 나와 선출된 대표자들에게 부여되고 세습군주는 어떠한 권력도 쥘 수 없으며 단지 상징으로 존재할 뿐이다. 정상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임금은 손에 쥔 권력이 없으니 당연히 성군도 될 수 없다.[2]
요컨대 힌국 정치에서 고종은 민주주의를 하사한 전제군주이자, 민주주의의 정체를 불러온 양면적인 성군이라는 점이다.
가계
- 증조부 : 고조 장황제(高祖 章皇帝, 1860년 ~ 1919년)
- 증조모 : 원명장황후(元明章皇后, 1859년 ~ 1888년)
- 황후 : 현인열황후(慧勝仁皇后, 1938년 ~ 2018년)
여담
- 외모가 준수하고 유머 감각과 언변이 좋으며 사교성이 활발하여 유년기부터 황실의 아이돌로 불렸고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재학 시절 고등문관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여 명실상부한 황실의 스타로 거듭났었다. 이러한 인기에 걸맞게 강학원대학 재학 시절 수많은 여성들의 구애를 받았으나 오직 훗날의 황후인 최씨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재학 시절부터 고종과 현인열황후는 대학을 대표하는 컴퍼스 커플로 유명했고 금슬이 좋았다.
- 최초로 평민과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한 최초의 황족이다. 이에 신종과 황족들이 이를 윤허하지 않자 "지희[3]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선언한다. 이에 황실은 발칵 뒤집어졌고 현인열황후는 주변의 엄청난 직ㆍ간접적 압력에 부담을 느껴 고종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에 한산공은 손을 붙잡고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쓰겠다"라며 청혼했다. 마침 한성제국대학을 취재하던 KBS가 이를 촬영하여 그날 저녁 뉴스에 대서특필 되었다.[4] 결국 당시 한산공의 고집에 신종이 결혼을 윤허하였다. 이러한 결혼 과정에서의 우여곡절은 젊은 미남 황족과 아름다운 평민 여성이 우연히 대학에서 만나 사랑에 빠져 연애 끝에 결혼하게 된 아름답고 낭만적인 로맨스 이야기로 화제가 되었다.
- 고종이 즉위 이후 신종의 은혜를 기리는 발언을 수시로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고종과 신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 신종은 고종의 자유분방함을 자신의 어린 시절처럼 여기며 총애했고, 황실 내의 반대 여론에도 고종을 종친사환금지법의 예외로 인정하여 고종이 권력에 다가서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고종 또한 신종을 몹시 따르며 '강녕전께서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교태전과 경근당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고 발언하거나 안기부장으로써 참석한 첫 어전회의에서 신종을 보고 “그 말투며 태도며 실로 경복하기에 부족한 것이 없다"고 칭송하기도 했다.
- 앞서 강녕전께서는 따뜻한 맛이 있는데 교태전과 경근당에는 냉담함만이 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 당시 황후였던 경신순황후와 황실의 대다수 종친들과의 관계는 냉담했다. 보수적인 황실의 이단아였던 고종과 폐습에 찌든 황족들과 종친들과의 관계는 당연히 좋지 않았고, 심지어는 방계 종친들과 주먹다짐까지 벌여 고종이 이들을 전부 때려눕히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고종이 황위에 오르자 상황이 역전되어 경신순황후는 평생을 별궁에 갇혀지냈고, 황족들의 특권과 재산은 고종에 의해 엄청나게 축소되었다.
- 대단한 애처가였다. 현인열황후와 금실이 매우 좋았고 여색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하길 원하던 황실의 관례를 깨고 외출 할 때도 항상 황후와 대동했고 국정에서도 그녀의 의견을 많이 참고했다. 현인열황후의 정치적 식견도 훌륭해서 어전회의에서 황후의 의견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애처가를 넘어서 후궁 제도에 매우 부정적이라 즉위 이후 친히 후궁 제도를 아에 폐지하기도 했다.
- 현대적이고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을 가졌던 황후가 가장 보수적인 황실에서 여성의 사회 생활은 엄격히 금지되며 단순히 남편을 내조하는 역할만을 요구받으며 황후가 했던 단순한 행동[5]까지 지적 받고 많은 황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며 궁중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자 "한번만 더 황후를 욕보이면 대역죄로 단죄하겠다"며 황후를 몸소 보호했다.
- 자식들과 손주들에게도 좋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였다. 고종의 장남인 인효태자의 성격은 자기 아버지와는 다르게 온화했고 착했다고 하는데 그런 아들의 성격을 질책하기보다는 아들의 성격을 그대로 존중해 주었다. 손자인 이연이 인효태자를 닮아 착하고 똑부러지자 크게 기뻐하기도 했으며, 이연이 강학원대학 대신 돈명대학에 진학하자 황실 내에서 존재하던 반대 여론에 직접 나도 강대[6] 안나와서 황제 하는데 니들은 꼴랑 강대 나와서 백성들 등골이나 뽑아 처먹으면서 헛소리 작작해라. 내 손주가 그딴데 안가도 니들보다 잘났다.라며 종친들을 갈구고, 이연을 감쌌다.
- 즉위 이후 아들을 잃는 불행을 당했다. 인효태자가 29세의 나이에 뇌출혈로 요절하자 고종은 국사도 제치고 황실병원에 무작정 달려가 한참을 오열했고 너무 슬퍼서 끼니를 거르자 대신들과 주치의들이 겨우 뜯어말렸다. 고종은 태자의 요절을 매우 비통해하며 직접 글을 지어 태자를 애도했다. 또한 며느리가 되는 인효태자의 비인 의선황태후 한씨를 안타깝게 여겨 남편을 일찍 여읜 한씨에게 궁궐에 머무르게 했고, 며느리가 착하고 효성이 깊다고 자주 칭찬했다. 그리고 훗날 손자 이연이 태자가 되자 본인이 직접 주도하여 인효태자를 연종 덕황제(衍宗 德皇帝)로 추존하고 장명승덕태흠이인돈효(章明勝德太欽彛仁敦孝)라는 시호를 내려 태자를 위로했다.
- 한산공 시절부터 황실의 고루한 관습에 불만이 많았고, 즉위 이후 황실의 관습을 현대적으로 개량하거나 철폐하였다. 대표적으로 고종이 즉위하고, 피휘가 너무 번거롭고 행정적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아에 피휘라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피휘로 가장 불편할 시민들이 '아름다운 고금의 전통을 페지하지 말아 달라'며 대규모 집회와 만인소, 유소를 벌이자, 어쩔 수 없이 피휘중 가장 수위가 약한 방식을 적용하여 어휘(御諱)의 음만 바꾸어 읽는 형태로 피휘의 관례를 수정하였다. 또한 직접 황족들과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황실에 적응하지 못하던 황후를 위해 황실의 악폐습을 과감하게 철폐하여 사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황족을 대표하여 강은군이 반대하자 격분하여 재떨이를 집어 던지고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고 고종실록에 적혀있다.
- 즉위 초기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30대에 흰머리가 되었다. 본래도 부친인 승경대원왕의 유전으로 새치가 많았고 30대가 넘어가자 아에 머리카락이 전부 흰머리가 되었다. 이로 인해 자신도 흰 머리를 여러 번 흑발로 염색했지만 흰머리가 너무 빨리 자라기도 하고 황후가 흰머리를 좋아해 황위에 오른 이후 염색을 포기했다. 그러나 70대가 넘어 흑발이 나자 신이 나서 대신들을 접견 할 때 이를 여러 번 자랑하기도 했다.
- 엄청난 애연가였다고 한다. 공식 석상에서 담배를 피워대는 모습은 당시 사진이나 방송영상에서 꽤 많이 보여왔고, 9.18 사건의 그날에는 사령부를 차린 을2호벙커 안에서 줄담배를 피울 정도였다. 당시 전매청(현 KT&G)에서 고종이 피는 담배는 최고급 연초만을 엄선해서 납품했다고 한다. 처음 담배를 피울때는 형 예친왕의 화랑 담배를 몰래 가져다 피웠고, 1958년부터는 아리랑을, 1969년부터는 당시 최초의 고급 담배였던 청자를 피웠고, 1982년 이후로는 장미를 피웠지만 2001년 인효태자가 훙서한 이후 나이도 많고 해서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었다.
- 유교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불교를 믿은 것으로 알려진 최초의 군주이다. 재위 말기 인효태자가 요절한 뒤 실의에 빠진 고종과 현인열황후는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명복을 빌었다. 그러다 아내 현인열황후마저 죽으면서 생애 종반에는 아예 불교로 개종했다. 대한제국의 국시는 성리학이지만 고종의 권위가 하늘을 찔렀으며 대한제국에서 신도가 제일 많은 종교가 불교이기에 호의적인 반응들이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한다. 다만 소수의 유학자들의 반발이 존재했지만, 그런 소수의 부류는 폐하를 비판했다며 극우파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대중 매체에서
- 1984년 MBC 드라마 《대한왕조 육백년》 - 한산군 왕자님에서는 배우 이정길이 연기했다. 한산군 왕자님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고종이 주인공이며, 강학원 고등과에서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고종의 모습이 1화, 고종이 황위에 오르는 것이 마지막회이다. 즉, 즉위 이전까지 고종의 일생을 다룬 작품. 고종 역의 이정길은 소름돋을 정도로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역할인 경신효황후와 제천공은은 각각 김혜자와 최상훈이 맡아 열연했다.
어록
내 일생을 널 지키는데 쓸게. 훗날의 현인열황후에게 청혼하며 |
이 개새끼들아! 세상이 안 무섭지? 너희가 망하는 것 똑똑히 볼 거야, 내가! 종친들의 전횡에 항의하며 종친들을 때려눕히면서, 이후 고종이 집권하자 이때 고종과 주먹다짐을 벌인 종친들은 응보의 단죄를 받게 된다. |
짐은 이 대한을 고쳐 종사의 만년 대계를 꾀하겠소. 폐습을 고치고 타국의 좋은 제도를 받아들이겠소. 이로써 황제가 황제의 책무를 다하고 대신이 대신의 책무를 다하여 억조창생이 편안한 나라를 만들겠소. 이곳이 바로 짐이 바라는 대한의 모습이오. 그리고 만약, 이 과업을 완성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자가 있다면 그게 누구든, 엄히 다스릴 것이오. 이를 가슴에 새기고, 잘 따라주길 바라오. 즉위칙서를 반포한 후 고종의 선언 |
제국은 고금을 통틀어 작금의 자유 민주 체제보다 더 훌륭한 제도를 아직 갖지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제도라 하더라도 이를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에는 이 민주 제도처럼 취약한 제도도 또한 없는 것이다. 신 헌법 공포에 관한 칙유 中 (1972.2.17.) |
한 세대의 생존은 유한하나, 조국과 민족의 생명은 영원하오. 오늘 나와 경이 그리고 만백성이 땀 흘려 이룩하는 모든 것이 결코 오늘을 잘 살고자 함이 아니요, 이를 후손 앞에 물려주어 겨레의 영원한 생명을 생동케 하고자 하는 것이오. 한성제국대학 총장에게 보내는 친서 中 (1976.3.16.) |
이 새끼 너 건방져! 황실의 악폐습을 철폐하려 하던 당시 돈녕원경이던 강은군의 반대에 재떨이를 강은군에게 던지며. |
역사적 사실과 유적은 영광스러운 것이든 굴욕적인 것이든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사민들은 영광스러운 사적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얻고, 굴욕적인 사건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역사적 유적은 어떤 것이든 소멸시켜서는 안 된다. 사민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도록 병자호란 때 인묘께서 청장(淸將)에게 항복했던 장소인 삼전도를 훌륭하게 복원하라. 1981년 4월 삼전도비 일대 재정비를 지시하며 |
우리 일본대사[7] 어디 갔어? 일본대사 축배 안 드나? 1981년 남경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고 경복궁 태극전에서 열린 환영만찬회 축사를 하며 |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바로 농민들이다. 1983년 삼남순행중 남경 전주부 인근의 농지를 시찰하며 |
토지가 백성이라면, 황제란 비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종자(種子)는 만백성의 이상이다. 1988년 신년사 |
천하에 내 뜻을 이어받을 사람은 오직 태손 너뿐이다. 인효태자 사후 후계 문제에 대한 논란 당시 이를 일소하며 |
나[8] 또한 인간인 이상 나라를 다스리는 데 시행착오가 없지 않았소. 그러나 짐은 지금 당장의 칭송을 받기 위해 일하지 않았고, 후세 사가(史家)들이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해 왔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당당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난 일이 없네. 생전 퇴위 기자회견에서 기자들과의 환담 中 (2017년 봄) |
성상, 이 대한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연의 즉위식에서 자신의 대원수 견장과 원수봉을 태손의 손에 쥐어준 후 절하며 |
연이가 문왕과 무왕처럼 똑부러지고 잘하는데 내가 뭘 걱정하고 아쉬해 이연의 나이가 어려 우려하는 순정군에게 이연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만족해하며 |
잘 해가라. 그럼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이연에게 남긴 마지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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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명은 이경이나 피휘를 위해 '맑을 경'의 발음을 '산'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개명하였다. 본래는 고리타분한 관례인 피휘를 폐지하려 하였으나, 사민들의 격렬한 반대와 애원으로 인하여, 빡빡한 피휘의 관례를 수정하여 피휘중 가장 수위가 낮은 방식인 발음을 바꾸는 형식의 개명을 하였다.
- ↑ 물론 입헌군주제의 군주도 상징으로써의 역할이 있으니 이 역할을 잘 수행하면 명군, 성군이라는 칭호가 붙을 수는 있다. 그런 방식으로 불리는 경우가 거의 없는게 사실이지만(...). 단, 민주주의를 이룩하면서도 치적을 남겨 성군 칭호를 받을수 있는 경우가 단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국왕 본인이 민주화를 성취시키거나 최소한 수용하는 경우이다. 부탄의 국왕인 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이 그 예시. 전제군주로써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겼으니 일반적인 의미의 성군이 맞고 동시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경우이다.
- ↑ 현인열황후의 휘
- ↑ 이 당시 황실은 KBS가 황족의 사생활을 유출했다며 격분했지만, 한산공의 간곡한 설득을 받은 신종이 선처를 베풀었다.
- ↑ 외국인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함 그 자체인 인터뷰 등이 오만한 것으로 지적받기까지 할 정도였다.
- ↑ 강학원대학의 약칭.
- ↑ 당시 주한일본대사는 마에다 토시카즈였다.
- ↑ 고종은 짐이라는 지칭을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공식 석상에서도 짐이라는 지칭과 나라는 지칭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