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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아름다운 나라)|북한]]이 [[통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중화인민공화국 (아름다운 나라)|공산중국]]으로 도망쳐 조선족 자치구에 세운 망명정부, 자치정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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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0일 (목) 19:11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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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관의 모든 인물, 사건, 단체, 국가는 가상이며 현실의 어떠한 인물이나 단체도 찬양하거나 비하할 의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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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국장.png | 대한민국의 현대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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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북한이 통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공산중국으로 도망쳐 조선족 자치구에 세운 망명정부, 자치정부.
역사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켰다가 유엔군에게 역관광당하자 북한 지도부는 김일성을 숙청하고[1] 박헌영을 2대 수상로 추대했다. 이후 북한 정부는 중공의 지원 하에 연변으로 이동,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이렇게 세워진 것이 바로 연변 정권이었는데, 연변 정권은 성격이 매우 독특했다.
연변 정권은 망명 정부이면서 동시에 중공의 자치 정부이었다. 연변 정권은 중국 공산당 정권으로부터 지린성 조선족 자치주에서의 제한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다. 경찰권, 징세권, 재판권, 군사권, 외교권 등 겉보기엔 일반적인 주권국과 비슷한 규모의 권한이 있었다. 하지만 사사건건 중공의 간섭을 받아야 했기에 실질 권한은 크지 않았다.
연변정권은 국토완정을 명목으로 한국에 수시로 테러를 저질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아웅산 묘소 테러다. 하지만 이 사건 뒤에 중공이 테러 중지를 연변 정권에 요구하면서 그 전과 같은 테러는 더이상 일으키지 못했다.
한 편, 연변정권은 여느 동구권 국가처럼 중공업 위주의 경제 건설을 추진했다. 그 결과 경제성장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지만 경공업이 뒷받침되지 않아 불안정한 상태였다. 또 생필품은 저질이었고 그마저도 늘 부족해 국민들은 국영상점 앞에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대 한국에 파견되어있던 연변 정보원들은 한국의 발전상을 상부에 보고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연변의 외교관, 경제관료들은 경제개혁이 필요함에 동의했다. 이에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리종옥이 숙청될 각오를 하고 박헌영 앞에서 경제개혁을 주장했다. 박헌영은 놀랍게도 이를 받아들였다. 박헌영의 이러한 정치, 경제적 정책은 박헌영주의라고 불렸다.[2]
하지만 1968년 경제개혁에 불만을 품은 계파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는 성공했고 박헌영과 리종옥은 추방되었다. 군인, 외교관 출신인 박성철이 이끈 새 정권은 이전의 정책을 뒤엎고 중공업 중심의 경제로 회귀했으며 시장은 다시 금지되었다. 1인 독재 체제는 소련식 집단지도체제로 대체되었다.
하지만 2년만인 1970년 동아시아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군은 하루만에 연변군을 격파, 수도 연길에 입성하며 연변 정권은 약 20여 년에 걸친 역사를 끝으로 사라졌다.
정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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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
수도는 연길이었다. 동아시아 전쟁 이후 파괴되어 현재는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군사
북한 시절과 마찬가지로 조선로동당의 당군인 조선인민군이 사실상 국군의 역할을 맡았다. 전체 병력이 군단급이었던 관계로 총참모부 바로 밑에 지상사단과 항공사단이 편제됐다. 사단장에는 소장(☆)이나 중장(☆☆), 총참모장에는 상장(☆☆☆)이 보임됐다. 문민통제는 개한테나 줘버렸기 때문에 민족보위상[3]에는 상장 계급의 현역 군인이 임명됐다.
박헌영은 나름 인민군의 훈련과 무장에 신경썼지만 국력의 한계로 대규모 군대의 건설은 힘들었고 결국 동아시아 전쟁 당시 개전 첫날 군 주력이 격파되면서 조선인민군은 와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