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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굳세어라 금순아)|제주]]의 제3대 | [[제주 (굳세어라 금순아)|제주]]의 제3대 대통령이자 군인, 정치인, 독재자. | ||
본래 평범한 공군 장교였지만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승장구하며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이후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병환에 시달리던 아버지 이승만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군림하며 세습을 준비하였다. 이승만 사후에는 부통령을 거쳐, 제주의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 |||
집권기, 제주를 동북아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킨 지도자라는 평가와 언론 탄압은 물론 정적과 반대파 숙청을 행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1970년부터 2023년까지 53년간 집권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독재자, 가장 오래 재임한 비(非) 왕실 국가원수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기도 하다.<ref> 기존에는 52년간 집권한 쿠바의 카스트로가 1위였지만 2023년에 이인수가 추월하여 2위가 되었다.</ref> 집권 말기에는 세습을 권하는 측근들의 권유와는 달리, 군인 출신인 [[김승겸 (굳세어라 금순아)|김승겸]]을 후계자로 낙점하여 3대 세습의 가능성을 차단한 바 있다. | |||
== 약력 == | == 약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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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9월 1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에서 이승용과 조은숙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경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생부 이승용(李承用)은 경기도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교육자였다. | 1931년 9월 1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에서 이승용과 조은숙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경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생부 이승용(李承用)은 경기도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교육자였다. | ||
1950년 서울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50년 4월부터 공군에 입대하여 정보작전 분야에서 근무하였다. | 1950년 서울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50년 4월부터 공군에 입대하여 정보작전 분야에서 근무하였다. | ||
=== 이승만의 양자가 되다 === | === 이승만의 양자가 되다 === | ||
평범한 공군 장교였던 | 평범한 공군 장교였던 이인수는 이승만이 제주로 파천한 뒤인 1953년 12월 8일 78세이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인수를 양자로 들이기 전인 1952년 무렵, 이승만은 마포경찰서장을 지낸 윤우경(尹宇景)의 소개로 의친왕의 차남 이우의 둘째아들 이종을 양자로 추진했다. 그런데 프란체스카가 양자 입적 이야기를 박 마리아에게 하자 박 마리아가 이를 결사 반대하는 바람에 이종의 양자 입적은 무산되었다. | ||
당시 박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인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키기 위해 이종의 양자 입적을 무산시키면서까지 추진하였지만, 당시 이강석이 너무 어렸고, 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다는 법률상의 문제점과 대를 이을 장남을 보내는 이기붕과 박마리아에 대한 비토 여론이 격렬하여 이강석의 양자 입적은 무산되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당시에는 입양 시 파가 같은 일족 중에서 항렬을 맞추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달리 이강석은 효령대군파였고, 달랐는데다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17대손, 이강석이 19대손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뻘이었기에 말이 많았던 점도 양자 입적에 문제점으로 작용하였다. | 당시 박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인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키기 위해 이종의 양자 입적을 무산시키면서까지 추진하였지만, 당시 이강석이 너무 어렸고, 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다는 법률상의 문제점과 대를 이을 장남을 보내는 이기붕과 박마리아에 대한 비토 여론이 격렬하여 이강석의 양자 입적은 무산되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당시에는 입양 시 파가 같은 일족 중에서 항렬을 맞추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달리 이강석은 효령대군파였고, 달랐는데다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17대손, 이강석이 19대손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뻘이었기에 말이 많았던 점도 양자 입적에 문제점으로 작용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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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53년 12월 13일 첫 상봉일, 처음으로 대면한 두 사람은 몇십 년 함께 살아온 부자지간(父子之間) 같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인수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 그리고 1953년 12월 13일 첫 상봉일, 처음으로 대면한 두 사람은 몇십 년 함께 살아온 부자지간(父子之間) 같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인수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인수를 따듯하게 맞이하였고, 이인수가 큰절을 올리니 "잘 왔다"라고 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 ||
=== 차기 대권 주자 === | === 차기 대권 주자 === | ||
양자 입적 이후로도 이인수는 1954년 8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공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공군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당시 이인수는 아버지인 이승만의 후광 없이 우수하게 복무를 끝마쳤는 한편, 1954년 전시연합대학에 진학하여 1957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 양자 입적 이후로도 이인수는 1954년 8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공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공군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당시 이인수는 아버지인 이승만의 후광 없이 우수하게 복무를 끝마쳤는 한편, 1954년 전시연합대학에 진학하여 1957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 ||
졸업 이후 9.15 후퇴 이후 부정부패를 엄단하던 이승만은 "믿을 것은 아들인 이인수밖에 없다"고 여겨 이인수를 | 졸업 이후 9.15 후퇴 이후 부정부패를 엄단하던 이승만은 "믿을 것은 아들인 이인수밖에 없다"고 여겨 이인수를 경무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등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인수는 공군 복무시절 인정받은 우수한 업무능력과 탁월한 두뇌를 이용해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승만과 군부, 자유당 간부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 1959년 이인수는 중앙보국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공안기관을 장악하고 반정부 인사들을 숙청했다. 1961년에는 민의원 의원으로 보선되었고, 중앙보국위원회 총정치부장, 자유당 개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 ||
1963년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어 자유당 독재를 지탱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당시의 이인수는 자유당 강경파의 상징으로, 이승만의 통치에 방해되는 인물을 닥치는 대로 숙청하고 온갖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수금하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 1963년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어 자유당 독재를 지탱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당시의 이인수는 자유당 강경파의 상징으로, 이승만의 통치에 방해되는 인물을 닥치는 대로 숙청하고 온갖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수금하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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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4대 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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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3대 대통령 이인수 李仁秀 | Rhee In-Soo | |
출생 | 1931년 9월 1일 |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 (現 경기도 의정부시) | |
사망 | 2023년 11월 1일 (향년 92세) |
제주직할시 아라구 아란동 전시연합대학병원 | |
묘소 | 국립묘지 이인수대통령묘소 |
재임기간 | 제3대 대통령 |
1970년 8월 15일 ~ 2023년 11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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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제3대 대한민국 대통령 취임 선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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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제3대 대통령이자 군인, 정치인, 독재자.
본래 평범한 공군 장교였지만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어 승승장구하며 후계자로 낙점되었다. 이후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병환에 시달리던 아버지 이승만을 대신하여 실질적인 국가원수로 군림하며 세습을 준비하였다. 이승만 사후에는 부통령을 거쳐, 제주의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집권기, 제주를 동북아의 경제 대국으로 발전시킨 지도자라는 평가와 언론 탄압은 물론 정적과 반대파 숙청을 행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1970년부터 2023년까지 53년간 집권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독재자, 가장 오래 재임한 비(非) 왕실 국가원수 기록을 보유한 인물이기도 하다.[1] 집권 말기에는 세습을 권하는 측근들의 권유와는 달리, 군인 출신인 김승겸을 후계자로 낙점하여 3대 세습의 가능성을 차단한 바 있다.
약력
일생
양자 입적 이전
1931년 9월 1일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주군 시둔면에서 이승용과 조은숙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경성부에서 성장하였다. 생부 이승용(李承用)은 경기도 양주군 교육감을 지낸 교육자였다.
1950년 서울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50년 4월부터 공군에 입대하여 정보작전 분야에서 근무하였다.
이승만의 양자가 되다
평범한 공군 장교였던 이인수는 이승만이 제주로 파천한 뒤인 1953년 12월 8일 78세이던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이인수를 양자로 들이기 전인 1952년 무렵, 이승만은 마포경찰서장을 지낸 윤우경(尹宇景)의 소개로 의친왕의 차남 이우의 둘째아들 이종을 양자로 추진했다. 그런데 프란체스카가 양자 입적 이야기를 박 마리아에게 하자 박 마리아가 이를 결사 반대하는 바람에 이종의 양자 입적은 무산되었다.
당시 박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인 이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키기 위해 이종의 양자 입적을 무산시키면서까지 추진하였지만, 당시 이강석이 너무 어렸고, 법상 장남은 타인의 양자가 될 수 없었다는 법률상의 문제점과 대를 이을 장남을 보내는 이기붕과 박마리아에 대한 비토 여론이 격렬하여 이강석의 양자 입적은 무산되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당시에는 입양 시 파가 같은 일족 중에서 항렬을 맞추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양녕대군파인 이승만과 달리 이강석은 효령대군파였고, 달랐는데다 이승만과 이기붕 일가의 마지막 공통 조상인 태종 이방원을 기준으로 할 때 이승만이 17대손, 이강석이 19대손으로 할아버지와 손자뻘이었기에 말이 많았던 점도 양자 입적에 문제점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후사를 구하여 대를 잇고자 미련이 강하였던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함께 한 이순용에게 부탁해 "이씨 종중(宗中)에서 양자를 천거하라"고 지시 했다. 이에 따라 전주 이씨 가문에서 이승만의 양자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을 물색하였고, 양녕대군의 16대손인 이 대통령과 계대(系代)가 맞는 17대손이며,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정보작전 분야에서 근무하며 영어에 능통하여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의사소통에 지장이 없으며 미혼이며 가정교육이 바른 집안이어야 한다는 조건에 딱 들어맞았는 인물인 이인수가 만 22세의 나이에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入籍)되었다.
처음에 이인수는 (이승만의 양자라는) 그 책임이 너무 중해 보여, 나보다는 좀 더 나은 사람을 택하라고 했다고 발언하며 양자 입적에 대하여 머뭇거렸으나, 주변에서 "전주이씨 종중에서 그동안 잘 모셨더라면 어른이 말년에 이렇게 고생하시지 않았을 텐데, 마지막으로 같은 혈손들이 도와드릴 의무가 있다. 자유를 존중하는 분이니 아들 노릇을 잘하라"라고 설득하여 이승만의 양자가 되기로 결정했다. 생부 이승용은 "정말 어려운 자리라 네 삶이 편치만은 않을 것이지만 열심히 모셔라"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당시 공군에서 복무하던 이인수는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후 인터뷰에서 이인수는 "이렇게 나라가 어려울 때, 그분들의 양자로 간다는 사실이 책임감을 느끼게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양자입적이 확정되는 그날부터 이승만은 양자인 이인수가 오기를 학수고대했다. 첫 상봉일이 다가오자“그놈이 정말로 나를 좋아한다면 더 서둘러 빨리 와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하며 일상에 새 활력을 느끼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도 곧잘 농담을 걸었다고 한다. 심지어 종종 거울까지 들여다보며, “그 녀석도 내가 저를 좋아하듯 나를 좋아하겠지"하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묻기도 했다.
1952년 12월 13일 경무대에서 이인수를 맞아 기뻐하는 이승만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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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53년 12월 13일 첫 상봉일, 처음으로 대면한 두 사람은 몇십 년 함께 살아온 부자지간(父子之間) 같았다고 한다. 이승만은 이인수의 손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코끼리는 아무리 코가 길어도 자기 코를 짐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자기 자식을 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며 이인수를 따듯하게 맞이하였고, 이인수가 큰절을 올리니 "잘 왔다"라고 하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차기 대권 주자
양자 입적 이후로도 이인수는 1954년 8월까지 4년 4개월 동안 공군 장교로 복무했으며 공군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당시 이인수는 아버지인 이승만의 후광 없이 우수하게 복무를 끝마쳤는 한편, 1954년 전시연합대학에 진학하여 1957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이후 9.15 후퇴 이후 부정부패를 엄단하던 이승만은 "믿을 것은 아들인 이인수밖에 없다"고 여겨 이인수를 경무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하는 등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인수는 공군 복무시절 인정받은 우수한 업무능력과 탁월한 두뇌를 이용해 20대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이승만과 군부, 자유당 간부들의 인정을 받았으며, 이후 1959년 이인수는 중앙보국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어 공안기관을 장악하고 반정부 인사들을 숙청했다. 1961년에는 민의원 의원으로 보선되었고, 중앙보국위원회 총정치부장, 자유당 개조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1963년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어 자유당 독재를 지탱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이 당시의 이인수는 자유당 강경파의 상징으로, 이승만의 통치에 방해되는 인물을 닥치는 대로 숙청하고 온갖 방식으로 정치자금을 수금하는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1964년 국방부장관으로 입각했으며 허정이 부통령에 임명되어 겸임하던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하자 국무총리에 임명되어 사실상 국가의 전권을 장악했다. 같은 해 7월 이승만이 사망하면서 이인수는 이승만의 후계자로 확정된다. 1965년 이승만이 사망하자 부통령 허정이 이승만의 임기가 만료되는 1970년까지 바지사장으로써 대통령직에 재임할 당시, 이인수는 국회에서 보궐선거를 통해 부총통과 자유당 총재직에 당선되어 실권을 행사했고, 1970년 국회에서 정식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현재까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재임중이다.
또한 국무총리 시절 주말이 되면 지방 시찰을 자주 나갔는데, 점퍼만 걸쳐 입고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 마냥 시장, 건설 현장, 농촌 등에 가서 지역 주민들과 스스럼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제주 사회의 실상을 직접 익혀나갔다. 더불어 이승만 시절부터 심각했던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1960 ~ 1970년에는 적극적으로 제주의 경제를 뒷받침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러한 이인수의 노력으로 제주의 경제 정책은 매우 고도화되었다.
이인수 정부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기타
각종 매체에서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지역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61 | 1961년 재보궐선거 | 서울 종로구 을 | XXX (XX.XX%) | 당선 (1위) | 초선[2] | |
1965 | 1964년 부통령 선거 | 대한민국 자유지구 | 초선[3] | |||
1970 | 1970년 제주 대통령 선거 | 재선[4] | ||||
1976 | 1976년 제주 대통령 선거 | 초선[5] | ||||
1982 | 1982년 제주 대통령 선거 | 재선[6] | ||||
1988 | 1988년 제주 대통령 선거 | 3선[7] | ||||
1994 | 1994년 제주 대통령 선거 | 4선[8] | ||||
2000 | 2000년 제주 대통령 선거 | 5선[9] | ||||
2006 | 2006년 제주 대통령 선거 | 6선[10] | ||||
2012 | 2012년 제주 대통령 선거 | 7선[11] | ||||
2018 | 2018년 제주 대통령 선거 | 8선[12] |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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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 현재 | 정계 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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