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종 인황제 이청

솔피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0일 (월) 01:26 판 (→개요)
[ 소개 ]
매화 핀 진목정엔 잔설이 누웠는데
화사하게 웃는 설중매 담장 너머로 매향을 흩뿌리며
고운 자태 뽐내고 오가는 마실사람 눈웃음치며 유혹하네
김씨네가 살다가 도회로 가버린 초가지붕 용마루는 세월의 횡포 속에
사르르 녹아내렸고 마당에는 지게 갈퀴 쟁기대가리 홀태
써레 홍두깨 호미자루
잡살뱅이들이 널부러져 푸서리 속에 나뒹굴고 있네
조상의 숨결이 열려있는 초가삼간 설중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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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대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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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제2대 황제
선종 효황제 | 宣宗 孝皇帝
이름 이선(李壇) → 이청(李壇)
출생 1879년 10월 23일
한성부 제중원
(現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즉위 1919년 4월 13일
황성 한성부 경복궁 근정전
천붕 1927년 2월 27일 (향년 47세)
황성 한성부 황실병원
재위기간 대한제국 황태자
1883년 10월 12일 ~ 1919년 4월 13일
대한제국 제2대 황제
1919년 4월 13일 ~ 1927년 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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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황 성조 태황제, 모후 원순태황후
형제자매 외아들
황후 정후 순공효황후
계후 순현효황후
후궁 성빈 강씨, 효빈 유씨, 숙빈 김씨
자녀 장남 혜종 순황제
차남 상친왕
삼남 제경군
사남 덕조 현황제
장녀 선경공주
차녀 선의공주
학력 강학원 유치원 (수료)
강학원 초등과 (졸업)
강학원 중등과 (졸업)
육군무관학교 (졸업)
병역 대한제국군 육해공군 대원수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준용(埈鎔)
대화(大和)
묘호 선종(宣宗)
존호 장혜상정화흠승렬
(莊惠商貞和欽勝烈)
시호 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
(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1]
연호 광정(光亨, 1920~1927)

개요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 휘는 청(壇)이며, 연호는 광정(光亨), 묘호는 선종(宣宗), 시호는 효황제(孝皇帝)이다.

1879년 성조 태황제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만 2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어린 시절 부터 아버지 성조가 다혈질인것에 비하면 온후하고 점잖아 성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성조가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신에 가까운 타입으로 경전과 서양의 지식, 잡기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이는 아들 혜종 순황제상친왕 또한 비슷했다.

선종 시기는 아버지 성조 시대에 이은 번성과 확장의 시기였다. 성조의 치세는 강력한 전제황권을 바탕으로 요동을 수복했고, 대마주를 편입하며, 유구와 일본을 대한의 영향권 하에 두었다면, 선종의 치세는 본격적인 열강국가로써 자신감을 표출하며 1차대전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경기가 활성화되어 신민들의 생활 수준이 향상된 시기였다. 이 시기 대한은 문화와 예술이 크게 성행했고, 전후 승전국으로써의 남양군도를 분할 받았다. 또한 선종은 적백내전에 개입하여 연해주와 화태를 대한제국의 영토로 편입하여 흔히 광정낭만으로 회자되는 대한제국의 첫번째 전성기를 열었다.

또한 선종은 아버지 성조가 고안한 서구식 정치체제를 대한제국의 실정에 알맞게 적용하여 외견적이지만, 의회정치가 꽃을 피웠고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덕에 성조와 선종의 치세는 연성지치라 불릴 정도로 현재까지도 대한의 전성기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찬란할 줄만 알았던 선종의 치세는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 1927년 2월 27일, 귀족원 개회사를 위해 마차를 탄 선종은 이동 도중 만주족 테러리스트의 폭탄 테러로 인해 향년 47세의 나이로 천붕했다. 이 사건으로 어린 황태자가 즉위했으나, 연성지치라 불린 성조와 선종의 치세와는 달리 새 황제 치하의 정치는 혼란에 빠졌고, 사회적으로는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으로 말미암은 육군 청년 장교들의 쿠데타와 한소전쟁의 패배로 이어지는 암흑기에 접어들고 만다.

생애

출생

1879년 성조 태황제 이엽의 장남이자 외아들로 태어났으며, 만 2세의 나이에 왕세자에 봉해졌다. 어린 시절 부터 아버지 성조가 다혈질인것에 비하면 온후하고 점잖아 성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성조가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던 것과는 달리, 문신에 가까운 타입으로 경전과 서양의 지식, 잡기에 모두 능했으며 음악과 예술에 조예가 높았다고 한다. 이는 선종의 아들들인 혜종 순황제상친왕 또한 비슷했다.

어린 선종은 강학원에 입학하여 기초 군사학을 익혔다. 7살 때는 성조 앞에서 군복을 빼입고는 거수 경례를 하며 군대식 보고를 하는 시늉을 하며, 부황을 기쁘게 했다. 선종은 프랑스어에도 능통했으며, 수학과 과학, 지리학, 역사, 예술도 빠르게 깨우쳤다.

청년기

성조는 이 같은 아들의 자유주의적, 선비 기질을 탐탁치 않게 보았다. 그런데 막상 러시아를 상대로 잇따라 전쟁을 벌일 때, 선종은 그의 군사적 능력을 마음껏 입증해 보였다. 선종은 한러전쟁에서 대한제국의 패배를 염려하여 전쟁에 우려하는 입장을 취했으나, 정작 전쟁에서 제3군을 지휘하며 여순 공방전에서 제3군이 고도로 요새화된 여순을 점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때 부황 성조가 고령에 엄청난 스트레스로 쓰러지자 선종은 섭정의 자격으로 대한제국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선종은 변하기 시작한다. 위 사건으로 선종은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억제할 수 밖에 없게 되며, 황실과 제국을 지키기 위해선 황제의 통제 밖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대담하고 관대한 마음가짐으로 남을 포용할 줄 알았던 부황 성조와는 전혀 다른, 너무나도 비정하고 냉혹한 전제군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즉위

사망

평가

여담

선종의 휘인 '壇'은 흔히 단 단자로 읽어지며 대부분의 백과사전도 '단'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단'이라는 발음은 태조의 휘인 단(旦)과 발음이 같아 성조가 선종의 휘를 정할 때, 아에 같은 한자를 쓰는 '소제할 선'이라는 한자로 정하였고, 즉위 이후 피휘를 위해 '소제할 선'의 발음을 '청'으로 고쳤다. 이는 당대부터 사전의 주석에 실렸으며, 이에는 어휘(御諱)라는 주석도 달려있다. 이는 피휘의 전례로 보건데 '선'이라는 발음이 들어간 단어를 전부 개칭하려 했으나 선이 들어간 단어가 너무 많아서 결국 그냥 선종이 소제할 선자의 피휘를 위해 '선'이라는 발음을 '청'으로 고쳤다. 즉, 선종은 피휘를 위해 단에서 선으로, 선에서 청으로 두번이나 한자를 고친 셈이다.

선종 즉위 당시 피휘 문제를 둘러싼 이후에도 대한제국에서 피휘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복잡하고 번거로운 관례에 학을 떼던 고조가 즉위하고, 피휘가 너무 번거롭고 행정적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아에 피휘라는 제도 자체를 폐지하려고 하였으나, 오히려 피휘러 가장 불편할 시민들이 '아름다운 고금의 전통을 페지하지 말아 달라'며 대규모 집회와 만인소, 유소를 벌이자, 어쩔 수 없이 피휘중 가장 수위가 약한 방식을 적용하여 어휘(御諱)의 음만 바꾸어 읽는 형태로 피휘의 관례를 수정하였다. 이러한 방식의 예를 들자면 고황제의 휘인 旦(단) 자를 피휘하지 못하는 경우, 같은 뜻인 朝의 발음인 조로 읽는 경우가 빈번한 것처럼 말이다.

가계

대중 매체에서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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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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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완전한 시호는 선종장혜상정화흠승렬문온무녕돈인성경양효황제(宣宗莊惠商貞和欽勝烈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