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조 성문태왕 이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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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오일 오늘인가 집집마다 창포주라
뱃노래 두어 가락에
멱라에서 빠져 죽은 굴원이 슬프구나
아마도 일년 중 좋은 계절에 생각나는 굴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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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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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국 초대 태왕
열조 성문태왕 | 烈祖 聖文太王
이름 이찬(李燦)
덕화(德化)
출생 1858년 11월 22일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現 경성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붕어 1920년 3월 29일 (향년 61세)
경성 한성부 덕수궁 석조전
재위기간 조선국 왕세자
1862년 4월 12일 ~ 1864년 1월 16일 (1년)
조선국 제26대 국왕
1864년 1월 16일 ~ 1895년 5월 14일 (31년)
대조선국 초대 태왕
1895년 5월 14일 ~ 1920년 3월 29일 (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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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모 부왕 원조 영효태왕 이변
모후 선인왕후 김씨
형제자매 1남 1녀 중 1남
왕후 성명왕후 최씨
자녀 장남 의종 효광태왕 이유
차남 연녕친왕 이부
장녀 순안공주 이안주
차녀 순녕공주 이안자
종교 유교 (성리학)
아명 융준(隆俊)
묘호 열조(烈祖)
존호 통천융운조극돈륜정성광의명공대덕
(統天隆運肇極敦倫正聖光義明功大德)
요준순휘우모탕경응명입기지화신열
(堯峻舜徽禹謨湯敬應命立紀至化神烈)
외훈홍업계기선력건행곤정영의홍휴수강
(巍勳洪業啓基宣曆乾行坤定英毅弘休壽康
시호 문헌무장인익성문태왕
(文憲武章仁翼聖文太王)
연호 건무(建武, 1895~1920)
계급 대조선국 육해군 대원수

개요

열조 성문태왕 이찬(烈祖 聖文太王 李燦)은 조선국의 제26대 국왕이자 대조선국의 초대 태왕이다. 아명은 융준(隆俊)이다.

조선 제25대 국왕인 원조와 그의 정비인 선인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자 유일한 적장자로 1864년 부왕이 승하하자 5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기 어리고 병약하여 섭정인 조대비와 종친 흥선군이 국사를 처리하였으나 장성하자 수렴청정을 거두고 친정에 나선다. 친정 이후 흥선군에 의해 장악된 조정을 견제하고자 개화파를 등용하여 이들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역으로 개화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열조 본인도 잔병치레로 국정을 돌보기 어려워지자 개화파에 국정을 일임하고 조정의 균형을 잡는 선으로만 왕권을 행사하였다.[1] 즉, 열조의 업적으로 알려진 대부분은 조대비와 흥선군, 개화파가 이룬 공적이다.

이렇듯 즉위 초중반에는 본인의 통제 실패와 잔병치레로 군약신강의 구도가 이루어지나, 제2차 동아대전 이후에는 군부를 통해 문민내각을 압박하며 능수능란하게 왕권을 회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이었을 뿐 말년에는 또 다시 잔병으로 인해 중재자의 역할만을 담당하였고, 1920년 향년 61세를 일기로 붕어한다.

생애

즉위 이전

1858년 11월 22일 신시[2] 창덕궁 대조전에서 적장자인 원자로 출생하였다. 부왕인 원조는 원자가 지낼 처소에 이극문이라는 휘호를 써서 현판으로 내리는 한편 백일을 맞은 아들을 위해 소명[3]을 고르는데 홍복(洪福), 장록(長祿), 윤중(胤重), 융준(隆俊) 중 융준을 택하였다.

열조는 어릴때부터 외모가 아름다우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한다는 칭송을 받았고 원조의 유일한 아들로써 큰 기대를 받으며 성장했다. 열조는 병으로 요절한 다른 이복형제들[4]과 달리 잔병치레 없이 잘 크는 듯했으나 생후 6개월이 된 1859년 5월 25일 급작스런 열병을 앓았고 이때의 휴유증으로 평생 허약하여 잔병치레가 잦았다.

내정 개혁과 개화

1864년 원조가 사망하자 세자였던 열조는 즉시 보위에 오른다. 열조가 즉위한 이후 조대비의 수렴청정이 시행되었다. 1871년 열조가 13세가 되던 해에 열조는 수렴청정을 거둔다. 이때부터 열조난 세도가를 견제하기 위해 종친 등용, 비변사 폐지, 전정 개혁과 서원 철폐등 굴직한 개혁을 펼친다. 이때 박규수, 이경하 등을 발탁했고, 이유원, 이최응, 김병국을 제수(除授)하여 세도가를 서서히 일소시키는데 성공한다.

1875년 운요호 사건이 강화도 영종진 앞바다에서 터진다. 운요호는 조선군이 위협 사격을 하자 즉각 공격을 감행했고 수비대는 일본 수병 36명의 상륙에 전멸한다. 열조는 나라의 방비를 태만히 하였다며 잔존 안동 김가의 영수인 김병국을 파직하여 운요호 사건을 왕권을 강화하는데 이용한다.

비록 일본의 무력에 놀라기는 했지만 개화파 대신들과 열조는 문호 개방에 관심이 있었기에 "나라 문(國門)을 열고 관(館)을 설치하여 통상(通商)을 하면 백성에게 이득이 될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강화도 조약을 조선 조정과 제대로 된 협의없이 체결한다. 개항 이후 잔존 세도가는 재집권을 위해 척화를 부르짖으며 막후에서 위정척사파를 조종하여 조정을 뒤흔든다. 이에 열조와 대신들은 안동 김문의 영수 김병학을 동남제도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에 임명하여 울릉도로 보내 사실상 유배형을 내리며 세도정치 척결을 완수한다.

이렇게 중용된 왕족들과 개화파는 열조의 수족으로써 잔존하는 세도가를 견제하기 위해 중용되어 빠르게 출세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개화파는 열조의 수족이었으나, 친정 이후 만기친람을 하며 병약했던 열조의 건강이 악화된다. 결국 열조는 중신들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자신은 막후에서 중신들을 서로 견제시키고 개혁의 방향을 결정하는 정도로만 나랏일을 돌보게 된다.

중흥군주

열조가 개화파에게 힘을 심어준 이후 개화파는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두 갈래로 찢어진다. 개화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지만, 개화의 진행방식을 두고 분열되기 시작한다. 온건파는 힘을 기르기 전까진 청과의 사대외교를 중단하지 않길 바랐고, 급진파는 청에의 사대를 신속히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급진 개화파들은 아편전쟁, 영토 할양 등으로 청나라가 이미 기울었고, 청나라는 저물어가는 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와중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등의 젊은 급진 개화파들은 일본의 지지를 받아 오밤중에 기습적으로 급집개화파들만 입궐하여 신정부를 수립하고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개혁정책을 제안하고 열조의 승인을 받아 이를 공포한다. 이를 임오중흥이라 한다. 급진 개화파들은 신 정부를 구성하고 혁신정강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개혁에 관한 14개 항목을 내세웠다. 그중의 첫 대목은 임금을 높히고 양이를 배척한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5]에 관한 대목이었다. 그 외에는 문벌 개혁(신분제 철폐), 환곡 폐지, 의정부와 6조, 특히 호조 중심의 재정 관할, 규장각 폐지 등이 주요 내용이었다.

이 시기 조선은 서양식 제복과 단발령 도입, 중앙정치기구, 군제, 사회문화의 여러 개혁이 급격하게 추진된다. 특히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구별을 폐지, 귀족과 평민 이외의 모든 신분을 폐지하여, '사민평등'을 구가하는 한편, 새롭게 성장한 보부상이나 조정 관료 등을 귀족으로 봉하여 특권 계급화 한다.

우발적인 전쟁

1884년 청불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배하며 다시 한 번 청나라의 취약함이 드러나자 영국, 러시아, 프랑스, 미국, 일본등이 중국에 대하여 야심을 품기 시작하였다. 이 가운데 조선도 호시탐탐 청나라를 노리게 된다.

1893년 2월 개화파는 대일본제국 헌법을 본딴 국제대요를 반포한다. [6] 그러나 1893년 헌법대요에서 광서 연호 대신 개국기원 연호를 사용한 사실을 청나라에 들켰고, 격분한 청은 조선에 엄중한 경고를 내리며 양국은 병자호란 이래 최악의 관계에 놓인다.

이렇듯 악화일로 속에서 1894년 6월 초, 이홍장은 북양함대 소속 진원과 위원, 양위를 제물포에 입항시켜 조선을 압박하려 한다. 청국 수병들은 1886년 나가사기처럼 제물포의 상점과 주점에서 행패를 부리다 조선 군경과 충돌한다. 이에 평소부터 청나라를 경멸하던 개화당 내각은 청국 수병들을 진압하고 진원과 양위를 나포한다.

북양함대의 최신형 전함인 진원과 양위가 나포당하자 뚜껑이 열린 청은 배와 수병을 인도하고 사죄사를 파견하라 요청하지만, 개화당 내각은 청국 상무위원을 추방하며 응수한다. 이에 서태후는 북양군을 파병하여 조청국경에서 무력시위를 벌이나, 이들이 조선을 침공하려는 것으로 오해한 조선군의 선제공격으로 청군이 궤멸당한다. 이 충돌에서 승리한 김가진 내각은 강경책을 결정하고 청나라와 일전에 돌입할 테세를 갖춘다. 조청간의 긴장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임오중흥 이래 맹방이나 다름 없던 일본의 외무대신 무쓰가 조선에 입국하여 청나라에 위협을 막기 위한 양국의 군사동맹을 제안하고, 외무대신 김옥균이 이를 승락하며 제1차 조일맹약이 채결되고 열조를 설득하여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을 선언한다.

이렇게 청과 조일 양국의 긴장이 높아지던 이때 7월 25일 황해 뤼순 부근에서 일본 해군이 청 해군을 기습 선제공격하며 전쟁이 시작된다. 일본군의 기습적인 공격이 성공하자, 전황은 조일연합군에 기울었다. 청나라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에게 반격을 시도하였지만, 서구화에 성공한 조선가 일본의 군대는 부패하고 전근대적인 청군의 싸움은 비교가 될 수 없었다.

육지에서는 조선은 남만주를 점령, 일본은 뤼순을 점령하고 해상에서는 연합함대[7]가 황해해전과 웨이하이 전투로 북양함대를 궤멸시켰다. 결국 청은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하고, 요동 반도, 대만과 부속 도서, 펑후를 일본에 할양하고 남만주를 조선에 넘기며 조선 정부 고평은 2억 냥을 배상금으로 지불하고 조일 양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하는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해진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 제국에 대대적인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고, 일본은 뤼순을, 조선은 간도를 제외한 남만주를 토해내게 된다. 이는 훗날 한노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두번째 도전

제1차 동아대전의 승리 이후 전국적으로 칭제건원에 대한 열망이 성조되었다. 이에 열조는 책봉의례를 통해 성립되는 '조선국왕'의 명칭을 폐지하고 당시 민족주의의 부흥과 함께 주목받던 고구려를 본따 왕의 위상을 초월한 '대조선국 태왕'으로 칭호를 바꾸고[8], 원구단을 축조하며, 연호를 건무(建武)로 정하고 원구단에서 태왕의 자격으로 고유제를 거행하여 즉위식을 거행하여 새로운 천자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이렇게 조선이 대조선국이라는 황제국의 지위에 올랐지만,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의화단 반란으로 조선이 남만주, 러시아가 북만주를 점령하며 긴장이 고조되었고, 제2차 동아대전이 발발한다. 기습적인 조일 연합군의 선공으로 시작된 전쟁은 무수한 피의 산을 쌓았으나 결국 조일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 전쟁으로 조선은 남만주를, 일본은 뤼순과 남사할린을 차지한다.

말년

열조는 나이가 들 수록 서구식 생활에 심취하였다. 이는 동시대 일본의 천황인 메이지 덴노도 비슷하였으나, 메이지 덴노가 식습관이 서구화 된것과 달리, 열조는 서구식 스포츠와 운동을 즐기며 건강이 호전되었고, 제2차 동아대전 이후로는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어 기존의 중재자에서 벗어나 직접 정사를 돌보게 되었다.

열조 즉위 말기인 이 시기 열조는 적극적으로 지방을 순행하고 현장을 돌아보며 두 전쟁과 급작스러운 근대화로 피폐해진 민중을 위문하고 수십년간 왕으로 즉위하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친위독재정을 강화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1913년 지방순행에서 폭우로 폐렴을 얻은 이후 다시 열조는 병으로 골골되며 정치에 손을 놓게 된다. 결국 1920년 3월 29일 왕은 자신이 중건한 경복궁의 거대한 서양식 전각인 태극전에서 붕어한다. 사후 덕(德)을 지켜 업(業)을 높였다 하여 열조의 묘호를 받는다.

평가

열조는 평생 잔병을 달고 살며 실제로 친정을 한 것은 10년도 안될 정도였다. 그러나 열조가 즉위하던 시절은 조선의 왕이 아닌 천지개벽의 시대였고, 능력있는 신하들을 믿어주며 매우 험난한 조선의 근대화를 방해 없이 추진되도록 하였고, 젊었던 급진 개화파가 폭주하는 것을 능숙하게 조정하고 비록 모두가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받아들일 수준의 타협점을 제시함으로써 분란을 최대한 방지하였다.

상단의 내용만 본다면 열조는 허수아비 군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자신의 병이 났자 곧바로 전제왕권을 휘둘렀고, 전제왕권을 휘두름에도 조정 중신들이 넢죽 기었다. 이는 국민교육을 통해 이 나라의 나랏님이자 성군으로 추앙받게 된 막강한 권위도 존재하지만, 열조의 중재 능력이나 탁월한 국제정치적 견해와 판단력을 신하들이 경외시한 점도 있다.

여담

  • 아버지 원조를 상당히 그리워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요절하자 자식으로써 아버지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하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렸고, 원조의 잠저인 용흥궁을 성대하게 복원하고 아버지 원조의 위패를 태묘 정전의 불천위로 지정하는 등 사후라도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원조의 첫 묘호는 철종이었고, 칭제건원 이후 철조(哲祖)로 올라갈 예정이었으나, 열조가 이를 극력 거부하고 직접 "인(仁)을 체행(體行)하여 백성들의 어른이 되었다"하여 원조(元祖)로 추존하기도 했다.
  • 외모가 뛰어났다. 이는 모후인 선인왕후의 영향이 컸다고 하며, 열조의 후손들인 조선의 제족들은 외모가 빼어난 경우가 굉장히 많다.

가계

어록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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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조 본인은 이를 두고두고 한탄하였으나 이는 오히려 청나라처럼 보수파의 반발로 개혁이 둔화되는 것을 막으며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2. 15~17시.
  3. 어린 아이일 때 쓸 이름.
  4. 원조의 후궁 소생 자식들을 말한다.
  5. 본래 급진개화파는 청나라와의 종주 관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열조는 시기상조라며 왕을 떠받들어 오랑캐들을 물리친다는(명목상으로는 양이를 배척하자는 의미이지만, 청나라도 오랑캐로 보던 조선의 시작으로 보면 상당히 묘책이다.)
  6. 정확하게 말하자면 국제대요는 예비헌법으로, 입헌방침을 채택한 상황에서 완전한 입헌주의로 나가기 전에 우선 헌법상 기본적인 내용들을 미리 선언한 것이었기에 법문 끝에 대요라는 말이 붙었다.
  7. 일본의 연합함대와 조선 해군이 연합한 함대
  8. 이때 '주상 전하'는 '태왕 폐하'로, '왕대비 전하'는 '태후 폐하'로, '왕비 전하'는 '왕후 폐하'로, '왕세자 저하'는 '태자 전하'로, '왕세자빈 저하'는 '태자비 전하'로, '전문(箋文)'은 '표문(表文)'으로 바뀌었다. 또 국왕의 자칭인 '과인(寡人)'은 '짐(朕)'으로 바꾸고, 대군주의 명령은 제후의 '교(敎/教)'가 아니라 황제와 마찬가지로 '칙(勅/敕)'이라고 부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