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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오일 오늘인가 집집마다 창포주라 뱃노래 두어 가락에 멱라에서 빠져 죽은 굴원이 슬프구나 아마도 일년 중 좋은 계절에 생각나는 굴원인가. 풍아는 "조선 왕조가 현대까지 살아남았다면?" 이라는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브위키의 대체역사 세계관입니다. |
대조선국 태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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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5대 대왕ㅣ대조선국 추존태왕 원조 영효태왕 | 元祖 英孝太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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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원범(李元範) → 이변(李昪)[1] |
자 | 도승(道升) |
출생 | 1831년 7월 25일 |
한성부 경행방 향교동 사저 (現 경성 한성부 종로구 경운동·낙원동 일대) | |
붕어 | 1864년 1월 16일 (향년 32세) |
경성 한성부 창덕궁 대조전 별채 | |
재위기간 | 조선 제25대 국왕 |
1849년 7월 28일 ~ 1864년 1월 16일 (14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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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원조 영효태왕 이변(元祖 英孝太王 李昪)은 조선국의 제25대 국왕이자 대조선국의 추존황제이다. 본래 이름은 이원범(李元範)이었으나 즉위 이후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익종의 향렬자인 날 일(日)자 향렬에 맞춰 이변(李昪)으로 개명하였다.
국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낸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그를 칭하는 별명은 '강화도령'이다. 헌종 사후 종통이 단절되며 종친 가운데 안동 김가에 의해 옹립된 방계 군주이다. 즉위 이후 강화 시절의 기억으로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을 도출하여 민생을 돌보려 하였으나 제왕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탓에 정치적 감각의 부족으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했고 32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사후 철종(哲宗)이라는 묘호를 받았지만, 평소 이를 탐탁치 않게 여긴[4] 열조가 칭제건원 이후 원조(元祖)로 추존하였다.
생애
평가
원조는 명암이 분명한 군주이다. 원조는 역대 조선왕조의 왕들 중 태종, 세종 정도를 제외하면 피지배층 백성들의 삶과 그 고통을 가장 잘 알고 공감하고 있는 왕이었기에[5] 백성들에게 동정적이었고 무너져가던 조선을 되살리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나 선대 왕인 헌종이 외가나 처가 등을 통해 정치적인 기반을 가지고 세도 가문을 견제해가며 나름 왕권을 구축했던 것에 비해 방계 왕족 출신인 원조는 그런 정치적 기반이 없었기에 개혁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6]
기본적으로 정통성이 매우 약했기 때문에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선 양모인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엄청난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오히려 이만한 핸디캡을 안고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의 설치 및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의 도출 등의 성과를 낸 것만으로도 역량이 없는 인물은 전혀 아니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선대인 헌종에 비해 정치적인 역량은 많이 뒤쳐졌다고 볼 수 있다. 세도 정치라고는 하지만 세도 가문들이 고려시대 무신정권도 아니고 국왕의 역량에 따라 충분히 통제할 수도 있었다는 게 중론이기 때문이다. 헌종 때에는 국왕이 세도 가문끼리 경쟁 구도를 만들어 세도가들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모습이 있었으나 원조 때에는 이러한 모습 없이 사실상 안동 김씨가 독주하는 모습이 만들어졌던 것도 그만큼 역량 면에서 원조이 선대보다 뒤떨어졌던 것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다.[7][8]
치세 후반으로 갈수록 자포자기하듯 문란한 생활을 하며 정치에서 손을 뗐던 것을 두고 명백한 암군이라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딱히 왕으로서 뭘 더 해볼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다소 가혹한 잣대를 들이미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다. 명군이고 암군이고 간에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지극히 제한되어있는 마당에, 이분법적인 평가를 들이미는 것은 비합리적일뿐더러 학술적으로 큰 의미도 없다. 오히려 지극히 취약한 권력기반을 가지고도 개혁을 시도라도 해봤다는 것을 어느정도 감안해줄 필요가 있다.[9]
종합해보면 왕으로서의 역량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나 정조 말년부터 터져 나온 조선 사회의 모순이나 문제점들을 수습해나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인물이며 애시당초 왕권과 멀었던 인물이란 것도 고려해야 한다.
어진
가계
여담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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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금으로 즉위하기 전에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의 하교에 따라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피휘 문제에 따른 휘를 정할 때 같은 항렬대에 있는 익종의 이름과 항렬자를 맞춘 글자로 이름을 개명했다.
- ↑ 굵은 글씨은 원조 3년에 추가한 존호이다.
- ↑ 1895년(건무 원년), 대조선국 태왕 추존과 동시에 폐지
- ↑ 철종의 철(哲)은 꺾을 절(折) 자가 들어있어 취급이 좋지않은 묘호다.
- ↑ 조선 역사상 평민과 같은 삶을 살고 그 애환을 몸소 체험한 임금은 원조이 유일하다. 그나마도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마주해본 임금은 임진왜란 시기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 정도이나 광해군도 당시엔 세자 신분으로서 대우를 받았다.
- ↑ 적서의 구분이 심하던 조선에서 따지고 따지자면 원조는 정통성이 심하게 약했다. 본인도 전계대원군의 서자, 전계대원군도 은언군의 서자, 은언군도 사도세자의 서자, 사도세자도 영조의 서자, 영조도 숙종의 서자이다. 그나마 사도세자까지는 서자일지라도 왕세자였기 때문에 희석이 될 순 있으나 3대째 서자인 방계 왕족은 힘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기엔 불리한 출신이다.
- ↑ 사실 원조는 방계 왕족이기에 순조의 적장손인 헌종에 비해 정통성 면에서 큰 핸디캡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헌종 때에 세도 가문 간에 균형이 맞추어졌던 것에 비해 원조 치세의 모습은 갭이 너무 심하기는 했다. 이는 정통성 외에 국왕 스스로의 역량이 선대에 비해 낮아진 것도 한몫할 수밖에 없다.
- ↑ 사실 조선에서 왕이 되기 위해선 엄청난 양의 공부를 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맨투맨으로 붙어 공부와 시험을 계속 치러야했고, 일정 이상의 학문과 무예를 갖추지 않으면 안됐다. 실제로 원조 전까지 왕들은 대부분 짧게나마 세자 기간을 거쳤고, 방계 왕들도 선대 왕의 조카거나 동생인 식이라 왕자로서 예법이나 교양은 갖췄다. 그러나 출생부터 즉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겨지던 방계 왕족으로 19세까지 평범하게 살던 원조에게 이런 복잡한 정치판을 개혁할 역량을 기대하긴 애초에 무리이다. 원조의 뒤를 이은 고종도 방계 왕족 A에 불과한 신분으로 즉위했으나 아직 12세의 어린 나이였고, 머리가 좋고 준비도 철저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보좌를 받을 수 있었다.
- ↑ 이는 선대 왕인 헌종도 마찬가지였다. 두 왕 모두 집권 후반으로 갈수록 문란한 성생활을 하며 정치와 멀어지다가 요절했다는 것이 공통점이다. 허나 헌종의 경우 정말 여색에 빠졌던 게 아니라 안동 김씨의 전횡에 질려서 다음 후대만큼은 안동 김씨 출신 왕비에게서 자식을 보지 않겠다는 의지를 무언으로 표명했다는 말도 있고 또 저러면서도 나랏일은 나랏일대로 성실히 보았다. 헌종은 친정 이후 꾸준히 왕권 회복을 시도했으며 죽기 직전에는 외척들에게 넘어가있던 병권의 상당수를 회수했을 정도였다. 병권은 어느 시대나 권력에 직결되어 있는 만큼 헌종이 왕권강화를 위히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49년(헌종 15년)에는 병조의 수장인 병조판서나 오군영의 수장들을 모두 외척이 아닌 사람들로 앉히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