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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태공 전하 만세
1863:고종 즉위 및 대원군 섭정체제 시작
1864~:서원 철폐, 비변사 폐지 등등
1866:제너럴 셔먼호 사건, 병인박해, 병인양요
- 정족산성마저 프랑스군에게 넘어가고 강화도 전역이 프랑스의 점령하에 떨어지자 조정에서 김홍집을 보내 협상을 진행,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
1867: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 제물포,원산,부산이 개항됐으며 개항지의 천주교 포교가 허용됨. 이외 치외법권 및 최혜국 등 기타 불평등 조항
~:병인양요의 여파로 유림의 여론이 악화되고 입지가 좁아지자 위험을 느낀 대원군이 개화파 세력을 지원함. 이때 흥인군과 박규수 등이 중용됨.
- 1867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됨. 박규수가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며, 흥인군, 김홍집, 김병국, 이경하 및 여타 개화파와 친대원군파가 입각함.
청의 양무운동을 본떠 외국어 교육과 무기공장 설립 및 생산에 집중된 개혁이 시작. 단 공장 등은 효과가 크지 않았음. 외국어 교육에 서얼과 중인계층이 수혜를 입었으며, 우수한 일부는 프랑스 등지에 유학생으로 파견되어 무기와 군사, 과학기술 등에 관한 지식을 연구함 - 군 체제가 2군영으로 개편, 프랑스에서 교관이 파견되어 서양식 군사훈련이 시작되었으며, 이를 통해 별기군이 양성됨
- 1867년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됨. 박규수가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며, 흥인군, 김홍집, 김병국, 이경하 및 여타 개화파와 친대원군파가 입각함.
1869:메이지 정부와의 국교가 정상화되고 조일수호조규가 체결되어 양국이 상호 개항함
1871: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1873: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을 탄핵하였으나 국문을 당하고 유배당함. 흥선대원군의 섭정체제가 지속되었으며, 민씨 세력이 척화파 세력과 결탁함
1876:고종의 묵인 아래 민씨 세력과 척화파가 구식군인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킴. 양헌수를 주축으로 별기군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실각시키는데 성공, 통리기무아문이 폐지되었으나 청과 프랑스가 개입하여 진압되고 흥선대원군이 복귀함.(병자군란)[1]
이 여파로 척화파 세력이 조정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나, 프랑스 교관 살해가 문제가 되어 한성조약이 체결됨.
- 복귀한 흥선대원군이 기존 통리기무아문을 대신하여 군국기무처를 설립, 스스로 총재에 올라 권력을 확고히 하였으며, 김병국이 부총재를 맡아 대원군을 보좌하였으며, 김홍집, 박정양 등 온건개화파가 위원으로 임명됨
- 근대화 정책이 강화되어 통리기무아문 설립 이래 양성된 유학파를 등용하여 서구식 교육을 시작. 과거시험의 역과가 확대되어 서기과(西器科)[2]로 개편되어 유학파들이 성리학 공부에 관계 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종친과 양반 자제들에게 서구식 교육을 하기 위해 수학원이 설립, 공업화를 위해 광산업이 국가주도로 발전됨.
- 이외에도 청과 일본, 미국, 프랑스 등에 영선사와 수신사, 보빙사를 파견했는데, 이를 기점으로 유학파 및 관료들 사이에 대원군의 지원을 받는 온건개화파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해 전면적인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급진개화파가 분화되기 시작함
1877~:이때 영국과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등과 추가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함. 후에 이곳 국가들에도 시찰단이 파견됨
1878:이제까지의 개혁을 통해 어느정도 체계를 정비하는데 성공한 군국기무처에서 내정개혁을 단행함
- 무인개혁
- -의정부가 3정승 체제에서 총리대신 및 8아문 체제로 개편됨. 이때 궁내부가 의정부와 분리되며 고종의 개입을 완전히 차단함.[3]
- -연좌제, 조혼제도, 노비세습제 폐지
- -도량형이 통일됨
- -세금을 돈으로 걷도록 함[4]
- -포도청이 폐지되고 한성에 경무청이 설립되어 경찰제도가 시행됨
- -군제개혁이 단행되어 기존의 친군영이 혁파되고 금위영[5]과 시위영[6], 진위영[7]이 설치되었으며, 군무아문 산하에 삼군영학당[8]과 통제영학당[9]이 설립됨
- -무과가 폐지되고 무관직은 삼군영학당과 통제영학당의 교육 후에 제수하도록 정함
- -13도제가 시행됨
- 또한 이때 태극기가 국기로 처음으로 제정됨
1880:중앙정계에서 온건개화파에 비해 힘이 밀린 급진개화파가 청과의 관계를 해소하고 자주국화를 주장하며 독립협회(獨立協會)를 창설함. 김옥균과 서재필이 주도하였으며, 주로 친미, 친일 성향을 보임
- 입지 확대를 위해 독립협회에서 만민공동회를 주관, 지식인과 서민계층이 모였으며, 이후 입헌운동과 사회개혁 요구에 영향을 줌
- 독립협회가 출범하자 온건개화파에서 이에 대응해 보국협회(輔國協會)를 창설함. 총리대신 김병국이 수장이었으나 참정대신 겸 내부대신 김홍집이 주도. 대원군의 후원을 받음
1882:만민공동회의 규모가 날로 커지자 흥선대원군이 친림하여 1881년 말 관민공동회를 개최, 독립협회와 협의하여 1882년 개혁을 선포
- 1차 임오개혁
- 독립협회에서 임오개혁 발표 직후 의회 설립과 입헌군주제 시행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다만 1882년 말 자주성을 강화하기 위해 선포한 2차 임오개혁에서 의회 설립이 일정 부분 반영됨
- 2차 임오개혁
1884:건양양전이 선포되고 양지아문이 설립되어 전국단위의 토지조사사업이 시행, 지계가 발급되기 시작하고 역·둔토와 주인이 모호한 땅들이 국유지로 전환됨
1885:독립협회에서 중추원의 강화와 헌법 제정을 요구함. 박정양(보국협회)과 서재필(독립협회)를 필두로 한 시찰단을 일본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로 파견하여 근대식 헌법제도를 연구하도록 함
1886:청불전쟁 이후 베트남에 대한 권리를 상실한 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지키고자 종속관계를 규정한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였으나 거부함. 이후 독립협회에서 청을 규탄하였으며 보국협회 내에서도 반청여론이 생김
- 독립협회에서 이때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건립하는 운동을 벌였으며, 군국기무처와 내각의 지원 아래 독립문이 건립됨
1887: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일본과 조일동맹을 체결. 일본과의 관계가 강화되 독립협회의 영향력 또한 늘어남
1889:2월 11일 창덕궁에 유폐되있던 고종을 꺼내와서 칭제건원을 하고 황제국을 선포, 대한국이 세워짐. 파견되었던 시찰단이 귀국하여 7월 17일 근대식 헌법인 대한국 국제가 반포됨[15]. 헌법이 반포되며 군국기무처가 폐지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이 헌법에 따른 섭정 자리에 오르며 권력이 유지됨
1890:4월 17일 한청전쟁이 한일동맹의 승리로 종결. 청과 한국의 종속관계가 공식적으로 청산되었으며, 전쟁 이후 한국은 간도를, 일본은 대만을 할양받았으며 각각 배상금을 지불받음
- 7월 7일 초대 중추원 선거가 개최됨.[19]
원수부
권세지가
공신 등등을 귀족으로 임명하고 수훈자 본인 아래로 4대까지 작위를 세습함. 방계 황족의 경우 황제로부터 아래로 4대까지 황실 작위를 가지고 이후로 4대를 귀족작위를 세습한 다음 평민으로 편입
앉은거
- 경기:21 독립;보국
- 독립:11, 보국:7, 기타:3
- 강원:14 기타
- 기타:9, 수구:4, 보국:1
- 충북:9 독립;보국
- 독립:6, 보국:2, 기타:1
- 충남:13 독립;보국
- 독립:7, 보국:4, 기타:2
- 전북:14 보국;수구
- 보국:8, 수구:5, 기타:1[20]
- 전남:22 보국;수구
- 보국:13, 수구:7, 기타:2
- 경북:24 보국;수구
- 보국:11, 수구:9, 기타:4
- 경남:21 보국;독립
- 보국:10, 독립:8, 기타:3
- 황해:15 보국;독립
- 보국:7, 독립:4, 기타:4
- 평북:14 독립;보국
- 독립:9, 보국:4, 기타:1
- 평남:13 독립;보국
- 독립:7, 보국:4. 기타:2[21]
- 함북:6 기타
- 기타:5, 독립:1
- 함남:14 기타
- 기타:7, 보국:5. 독립:2
- ↑ 이때 청의 개입으로 친군영 체제로 군제가 바뀜
- ↑ 말 그대로 서양기술과 관련된 과
- ↑ 김병국이 흥선대원군의 후원 아래 의정부 총리대신에 임명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이 주도하는 군국기무처가 초월적 기구로서 실권을 유지함
- ↑ 이 영향으로 화폐개혁이 시작되어 전환국이 설치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와 합작하여 조불은행을 설립함
- ↑ 궁내부 소속으로 국왕의 근접경호 담당
- ↑ 궁궐과 한성의 경비를 맡은 중앙군
- ↑ 지방군
- ↑ 훗날의 육군무관학교
- ↑ 훗날의 해군무관학교
- ↑ 이때 성균관 또한 개편되어 성리학 교육이 아닌 서구식 교육을 하며 서양의 대학과 유사하게 변경됨
- ↑ 이후 많은 노비들이 머슴으로 전환됨
- ↑ 대원군 또한 이때 호칭이 전하로 격상되었음
- ↑ 20명 정원으로 설립되었으나, 의관의 절반이 군국기무처(대원군)가 인선하는 형식이었고 나머지 절반 또한 각각 보국협회와 독립협회가 양분하였으며, 역할 또한 내각의 사무에 대한 자문과 백성들의 여론 수집 정도로 제한되어 실권은 적었음
- ↑ 김홍집이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됨
- ↑ 헌법이 공포된 이후 총리로는 김홍집이 재임명됨
- ↑ 연간 일정 이상의 세금을 납부한 25세 이상 성인 남성(종친, 귀족, 현역군인 제외)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짐
- ↑ 종친과 귀족, 기타 칙선 의원들로서 구성됨
- ↑ 조선시대 언론기관과 같이 내각을 탄핵할수는 있었으나 여타 내각제의 내각불신임보다는 내각규탄에 가까운 것이라, 말 그대로 "이새끼 순 나쁜새끼에요"라고 하는것 이상의 영향은 없었다.
- ↑ 보국협회 76석, 독립협회 55석, 위정척사회 25석, 기타44석
- ↑ 호남신민회
- ↑ 관서구락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