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화원 六花園 | Yukhwaw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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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일 | 1902년 5월 12일 (천사희화점) | |
명칭 변경 | 1915년 1월 25일 (육화원) | |
원장 | 주원장 / 제32대 | |
원감 | 비공개[1] | |
주소 | 한성부 서초구 내곡동 | |
소속 | 대한민국 국무총리 | |
원훈 | 꽃잎이 떨어질 제 나라를 지켰다 말하리라 |
개요
육화원(六花園 / Yukhwawon)은 대한민국 국무총리 직속 정보기관이다.
각 기관에 분산되어있던 정보기관들을 통합하여 정보 수집과 방첩을 더욱 효과적으로 행하기 위해 1902년 김홍집 총리가 비밀리에 조직한 천사희화점을 전신으로 둔다. 육화원은 꽃집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위장명칭으로, 정식 명칭은 경위정보부(Department of Security and Intelligence / 警衛情報部)이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상징
로고
원훈
꽃잎이 떨어질 제 나라를 지켰다 말하리라 |
1905년 설립 당시 채택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원훈.
역사
창설과 발전
1902년 이전까지 대한민국 국무원는 체계적인 정보기관을 운영하지 않았다. 다만 각 부서가 필요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소규모 정보조직을 만들 뿐이었다. 각 정보조직들은 규모가 작았고 체계적이지 못했으며 정보조직 간의 연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당시 총리였던 김홍집은 흩어져 있는 임시 정보조직들을 하나의 상설기구로 통합할 목적으로 1902년 천사희화점(千紗希花店)이라는 이름의 정부의 중추적 정보기관을 비밀리에 설립했다. 국무원 정보조사국이라는 정식 명칭을 두고도 대외적으로 천사희화점이라는 이름을 쓴 것은 꽃집으로 위장시켜 첩보 활동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천사희화점의 수장은 점장이라고 불렸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첩보와 방첩의 중요성이 더욱 대두되었다. 따라서 당시 총리였던 서재필은 기존에는 국급 기관이었언 천사희화점을 성급 기관으로 두 단계 올려 확대개편하였으며, 비교적 더 큰 기관이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 원을 붙여 육화원으로 개칭하여 총리 직속에 두었다. 물론 이 때까지도 육화원은 비밀 조직이었으며 외부적으로는 평범한 꽃집인 것처럼 위장하였다. 육화원은 1차 세계대전 말기 러시아에서 혁명의 낌새를 알아채 한국이 북방 출병을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출병 이후에도 회유, 암살, 파괴 등의 각종 공작을 벌여 한국의 북방 지역 장악에 이바지했다.
1920년대 한국은 본격적으로 만주 내륙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한국 정부는 만주에 친한 성향의 위성국을 건국하고자 하였고, 청 황실을 복고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육화원은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베이징에서 탈출시켜 만주로 데려왔고, 정샤오쉬 등 복벽파 인사들을 포섭해 만주로 불러들렸다. 또한 만주 지역에 현지인으로 위장한 요원들을 침투시켜 당시 만주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장쭤린의 봉천군벌의 기밀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위조화폐를 살포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등의 방법을 통해 만주 지역민들 사이에서 반장쭤린, 친한, 친복벽 여론을 퍼뜨렸다.
3차 극동전 - 2차 세계대전
1930년대 중반부터 육화원은 총리부와 국무원에 지속적으로 소련과 일본의 전면적인 침공 위험에 대해 경고하였다. 이를 받아들인 안창호 내각은 재무장을 실시하는 한편 와교력을 동원해 전쟁을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고, 결국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은 소련과 일본 양측과 동시에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수도 한성부가 함락되기 일보직전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육화원은 일본과 소련을 상대로 활발하게 첩보전을 펼치며 여러 성과를 냈다. 특히 육화원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생김새가 유사하다는 점을 이용해 일본에서 대활약을 펼쳤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미인계를 통해 일본 해군 장교로부터 일본 해군의 서해에서의 상륙작전 계획을 확보하여 바닷빛 작전 성공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과 폭탄 투척을 통해 일본군 고위 장성을 제거한 운봉길, 이봉창 요원의 거사 등이 있다.
국외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육화원은 전쟁 내내 여러 주요한 역할을 해내었다. 국내 경찰과 연계하여 소련과 일본의 간첩을 체포하고 소련군의 보급 현황을 확보하는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분투하였다. 또 육화원은 당시 준적성단체였던 조선공산당 의원들과 주요 인사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감시하였으며 박헌영, 김두봉 등 공산당 지도부를 체포하여 가택연금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육화원은 소련의 침공을 지지해 사보타주와 게릴라 등 친소 지하활동을 벌이던 조선공산당 혁명파를 제압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1941년 3월에는 혁명파의 두 수장 중 한 명인 이주하를 경기도 개성에서 시가지 교전 끝에 사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앵커리지 조약으로 표면상으로는 같은 연합국이 된 소련에 대한 공작도 시행되었다. 앵커리지 조약으로 소련에 강제 병탄당한 녹우크라이나에서 소련에 저항하는 반공유격대를 암암리에 지원하였고, 요원을 파견해 녹우크라이나 지역의 소련 정부기관과 군부대를 상대로 직접 사보타주를 벌이기도 했다.
냉전기
2차 대전이 한국을 비롯한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후에도 육화원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46년에는 스위스에서 조선공산당 혁명파의 수장이자 2차 대전 당시 소련에 붙은 반역자인 김삼룡을 암살하였고 1955년 한중전쟁이 발생하기 몇 달 전에 미리 중국의 작계를 입수해 중국의 침공 계획을 탐지하기도 하였다.
만주 내전과 베트남 전쟁에서는 한국군의 공군 및 특수부대와 함께 현지에 파견되어 각종 작전을 펼쳤다. 육화원 요원들은 만주에서는 반란군의 작계를 확보해 정부군에게 제공하거나 위험분자를 제거하였고, 베트남에서는 현지 동향을 조사하고 베트콩과 월맹의 프로파간다에 대응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직
육화원의 조직도는 철저한 기밀이며 이를 유포할 시에는 국가보안법의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또한 100년이 넘는 기간동안 계속해서 조직이 변동했기 때문에 이를 추측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다만 언론을 통해 단편적으로 공개된 부서들이 있는데 해외총국, 통신총국, 총무국 등이 바로 그들이다. 현재 육화원에는 5~10개의 총국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문판매단
육화원 방문판매단은 육화원 산하의 특수작전부서이다. 정식 명칭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직접 행동한다는 의미에서 "방문판매단"이라는 위장명칭이 붙었다고 알려져있다. 조직과 규모는 기밀이다.
방문판매단의 주 업무는 암살, 납치, 테러공작 등 비합법적, 비윤리적인 무력을 동반한 흑색작전이다. 만주 건국 초기 반군을 상대로 한 파괴공작을 실행하기 위해 처음 창설됐다고 알려져 있다. 방문판매단은 만주와 녹우크라이나 등지에서 반정부 무장세력에 대한 파괴공작과 지도자 암살, 포로 심문고문 등을 담당했다고 한다.
업무와 권한
육화원의 업무는 방첩·해외정보수집·사이버전·대테러·정보기관 조율·총리 판단 보좌 등이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업무 내용은 극비이며, 이를 함부로 외부에 공개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런 비밀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육화원은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다. 독립적으로 예산늘 편성할 수 있기 때문에 재무성의 예산 칼질로부터 자유로우며 '문관의 저승사자'라고 불리는 감리부조차 육화원은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감찰할 수 있다. 또한 국무회의의 승인이 있다면 특정 사안에 대해 '국가 안보에 필수적인 업무를 위해'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통신망을 감시할 수 있다.
청사
한성부 서초구 내곡동에 본청이 위치한다. 육화원 본청은 지상 10층과 여러 층의 지하[2]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본청은 실탄으로 무장한 경비원들에 의해 24시간 삼엄한 경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보안등급이 갑호로 청와대와 같은 최고 등급이다.
지청 밑 분서의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를 함부로 공개하는 것은 불법이다. 다만 육화원 공식 사이트에 따르면 '국내와 국외 곳곳'에 출장소를 두고 있다고 한다. 육화원 내부에서는 지청과 분서를 "꽃집"이라는 은어로 부른다고 알려져 있다.
원장
육화원장 혹은 경위정보부 총판은 육화원의 수장이다. 이름 그대로 총판급 고위 문관이며 육화원 성원 중 유일하게 대중에 신원이 공개되어있다. 총리에게 직접 보고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국무위원이 아니기 때문에 국무원 회의에 반드시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
주요 원장
- 초대 택풍화 (1902~1907)
- 6대 김창암 (1918~1922)
- 23대 김종필 (1977~1989)
여담
- 성원들의 안전을 위해 원장을 제외한 모든 성원의 신상정보는 비밀이다. 이로 인해 육화원 성원 중 국정감사에 출석할 수 있는 이는 육화원장 뿐이며, 원장이 출석할 수 없을 경우에는 서면 질의응답으로 감사를 진행한다. 다만 임무 중 순국한 성원은 순국 50년째 되는 날 신상이 공개된다. 2차 세계대전 중 순국한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도 이러한 케이스.
- 꽃집 느낌의 위장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육화원 요원들이 꽃집 직원으로만 위장해온 것은 아니다. 현재는 어떨지 알 수 없지만 과거에는 군밤 장수, 신문팔이, 이발사, 간호사, 배관공, 심지어는 유흥업소 접대부 등으로도 위장하였다고 알려져 았다. 김종필 원장은 "육화원 성원은 육화원 성원을 제외한 모든 직업으로 위장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대중매체에서
육화원이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방향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민국을 위해 음지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애국자의 이미지이며, 두 번째는 무언가 음흉한 계략을 꾸미는 악역의 이미지이다. 육화원의 역사를 살펴 보았을 때 둘 다 이유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