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국 총리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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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 초대 총리대신 정샤오쉬 郑孝胥 | Jeng Syaoswi[1] | |||||||||||||||||
출생 | 1860년 5월 2일 | ||||||||||||||||
청나라 강소현 소주부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만주국 | ||||||||||||||||
사망 | 1936년 11월 24일 (향년 76세) | ||||||||||||||||
만주국 장춘특별시 총리대신공관 | |||||||||||||||||
직업 | 외교관, 서예가, 정치가, 사상가 | ||||||||||||||||
임기 | 초대 만주국 총리대신 | ||||||||||||||||
1927년 3월 9일 ~ 1936년 11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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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오늘 우리 나라를 세움에 있어, 도덕과 인애를 주로 하여 종족 간의 마찰과 국제 간의 분쟁을 해소하여 왕도낙토를 이루고자 하니 마땅히 이를 실행할 것이라. 무릇 모든 국민은 이를 위해 힘쓸지어다. 정샤오쉬, 내각총리대신 취임연설 (1932) |
만주의 초대 수상. 만주가 국가로서 자리잡는 데에 큰 공헌을 세웠으며 현재도 만주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생애
정샤오쉬 |
정샤오쉬는 1860년 청나라 강소현 소주부[3]에서 태어났다. 1882년 청나라 향시에 급제한 그는 외교관이 되어 주한청국공사관 서기, 동래 영사 등을 맡았으며 한국의 중국인 커뮤니티를 이끌기도 했다. 귀국 후에는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입헌군주정과 변법자강운동, 양무운동을 지지했다.
민국 성립 후에도 여전히 입헌군주정을 지지하며 낙향해 서예가 일을 하며 지내다가 (…) 그는 곧장 만주로 가 복벽파 정당인 만주건국연합에 합류했다. (…) 이후 만주건국연합이 전만연합임시정부로 개편되자 임시정부의 비서장(사무총장)에 취임해 임시정부의 전반적 행정과 후원자인 한국과의 관계 조율을 맡았다.
이후 정샤오쉬는 장징후이와 함께 만주 지방의 복벽파를 이끌었고 자금성에서도 쫓겨난 선통제 푸이가 청나라 황릉 도굴사건에 격노해 만주 복벽주의 세력에 전격적으로 합류하면서 푸이를 황제로 하는 군주국인 만주국이 건국되었다. 그와 동시에 정샤오쉬는 임시 총리대신에 임명되었다.
정국을 장악한 정샤오쉬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의무교육제도가 도입되었고 민권과 민주주의가 헌법에 명시되었으며 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가 이루어졌다. 또 한국의 지원을 받아[4] 장징후이와 기타 복벽주의 군벌의 군대를 기반으로 만주국군을 창건하였다.
1927년에 총리대신에 취임한 정샤오쉬는 장장 10년에 가까운 장기집권에 성공하였으나 1860년생인 노령의 그의 건강은 점점더 안 좋아지고 있었다. 결국 정샤오쉬는 1936년 총리대신공관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 판정을 받았다. 그의 죽음으로 국장이 선포되었으며 장례식에는 강덕제, 야당 대표 장징후이, 신임 수상 아이신기오로 시치아, 한국 부총리 이동녕, 전 녹우크라이나 대통령 유리 흘루슈코 등이 참석하였다.
사상
이상주의
정샤오쉬는 전반적으로 유교적 이상주의자였던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의 전통적 이상향을 따라 자비롭고 지혜로운 군주의 지배 하에서의 태평성대를 꿈꾼 것이나 왕도정치에는 군대가 필요 없다며 경찰만으로 치안과 안보를 유지하고 군에 쓸 돈은 국민교육에 투자하려고 했었던 것들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수상이 된 후에는 현실정치를 맞닥뜨리며 정책 노선이 좀 더 현실주의적으로 변하였으나 여전히 전반적으로는 유학적 이상에 따른 정책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다.
현능정제
현능정제의 정부가 아니라면 난을 평정하고 논쟁을 무마시키기에는 부족하다. 입헌군주정체는 20년 만에 이룰 수 있지만 공화정체를 하고자 할 경우 수 십 년이 걸린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정샤오쉬는 입헌군주정을 지지하였다. 이에 정샤오쉬는 의회제를 기본으로 하여 황제의 권한이 영국식 입헌군주제와 독일식 입헌군주제의 중간 쯤에 있는 '현능정제'라는 체제를 고안하였다. 그는 국가가 왕도를 통해 다스려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현능정제를 통해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안정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만주의 복벽파를 지원하던 이웃나라 한국의 영향으로 의회민주주의에도 어느 정도 긍정적이었다.
이후 정샤오쉬가 만주의 초대 총리대신이 되면서 그의 사상이 만주 건국정신에 크게 반영되어 만주는 군주의 권력이 강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고, 그의 사후 그가 생전에 이끌었던 정당인 건국회의 주도로 현능정제는 만주 헌법 전문에 명시되었다.
만주라는 국민
정샤오쉬는 황제의 통치 하에서는 민족의 구별 없이 모든 인민이 평등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인종을 초월한 민족성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날의 용어로 설명하자면 시민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정샤오쉬는 이를 위해 사어(死語)가 된 여진이라는 용어를 부활시켜 만주인과 여진인의 개념을 분리시켜 여진인은 인종적 의미만을, 만주인은 국민적 의미만을 남겨 만주에 사는 한족 등 여진족이 아닌 만주국민들이 "여진인은 아니지만 만주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기를 원했다. 결국 그의 바람대로 만주는 여러 민족이자 하나의 민족이 사는 나라가 되었다.
평가
만주
중국
여담
- 강덕제와 막역한 사이였다. 정샤오쉬는 강덕제가 유아기에 청나라 황제였던 시절부터 공화파로부터 황정을 지키려고 애쓴 것도 있을 뿐더러 신생 만주국의 안정화에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이에 고마웠던 것인지 강덕제는 정샤오쉬의 크고작은 경조사를 꼬박꼬박 챙겨주었다.
- 1934년, 한 미국인 기자가 그를 인터뷰했는데, 기자는 위안스카이가 칭제하였을 때 전국적 저항에 부딪쳐 퇴위했는데 또다시 군주정을 수립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정샤오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那是因爲一個無根之人,竟肆意妄爲地自稱皇帝。 因爲張勳復辟,的皇帝陛下復辟的時候,沒有民衆的抵抗。 그것은 근본없는 자가 무엄하게도 황제를 참칭했기 때문이오. 장훈복벽으로 황제폐하께서 복위하셨을 때에는 백성의 저항이 없었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