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초대교회로부터의 기독교 정신과 마르크스의 관계

* 본 글은 교양수준의 관점에서 작성되었음을 양해바랍니다.

최근 초대교회의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고, 또 나름의 생각을 하면서 문득 생각난 사람이 있다. 바로 잊을 수 없고, 거부하고 싶지만 저항할 수 없이 알아야만 하는 몇가지 이름중 하나, 마르크스이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지금 시대에 거부하는것이 가능할까? 최근까지만 해도 색안경으로 심리적으로 거부하고 있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마르크스를 거부한다는건 현대사회의 문명을 거부한다는것과 같은-어쩌면 중세인과 다름이 없을 수도 있다.- 상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마르크스를 떠올린 이유는 왜일까? 이는 우리가 다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바람에 그럴 수 있지만, 기독교란 종교는 바리새인(현 유대인의 조상이 되는 유대교의 교파이다, 생활에서 613가지의 규율을 명시하고 지키는것을 강제하였다.) 의 문화 안에서 허례허식을 청산하고 직접 사랑(아가페)를 실천하는, 그런 개혁적이고 다소 혁명적인 움직임에서 시작된게 기독교의 원론이다. 비록 지금 사회에서는 기복신앙적 면모가 강조되지만, 초대교회만 해도 바실레이아(카이사레이아의 바실레이오스의 자선사업)와 같은 다소 행동적인 자선사업,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구제사업과 같은 실천적인 행동이 분명히 나타난다. 초대교회는 대단히 바울신학의 영향으로 금욕적이고, 행동을 중시한 실천적 모습과 성직매매와 교회분열의 움직임(마르키온, 아리우스 등의 이단세력을 의미한다.)이 동시에 존재하는 이중적 면모가 나타난다.

 

여기서, 초대교회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신학적으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태복음, 16:15~16)" 라는 질문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태복음, 16:15~16)" 라고 고백하기 위하여 논쟁하였다. 그렇게 탄생한 교리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어머니(테오도코스), 동일본질과 같은 교리들이 있다. 그리고 교회가 끊임없이 사투한것이 있다면 더이상 목숨을 걸고 사제직을 행하지 않는 부패한 자들에 대한 투쟁, 정치권력에 종속되지 않기 위한 투쟁등이 있었다. 이를 위해 성취된것은 교회내 불가침(동로마 제국에서는 범죄자일지라도 교회 내로 들어간 사람을 함부로 끌어내거나 해할 수 없었다.), 성직자 서임권 등이 있다.

 

이 모든 노력의 목적은 다소 심플하다. "세상을 더욱 이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불의한 세상을 바꾸기 위함이었고, 세리와 창녀들에게 찾아간 하나님의 아들의 일을 계속하기 위함이었다. 예수의 의지인 구원사역이라 불리는, 구원을 위하여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투쟁하고 있다. 이는 고대의 카타콤에서 현재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동일하다.

 

여기서 다시금 붉은 유령의 창시자를 끌어낼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언급한 명언이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말의 파급력은 예수의 말 한마디 만큼이나 힘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말은 실제로 세상을 바꾸었다! 비록 마르크스가 신을 죽인 신살자라지만, 이 업적을 무시하는것은 도리가 아니다. 교회의 목적인 구원을 위한 세상의 복음화, 즉 인간에게 더욱 이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목표는 실로 동질감을 느낀다.

 

적절한 비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역사철학자 E.H.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학과 물리학의 동질성을 찾는것과 유사하다! 본질적으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요구하는 가르침이 기독교인데, 공산주의자라고 증오할 필요가 있는가. 그들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면 묵인하던, 아니면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던 할 수 있는것이다. 로마 가톨릭의 현대 신학자인 칼 라너( Karl Rahner, 1904~1984)는 "익명의 그리스도인" 이라는 개념을 말하였다. 다소 복잡한 개념이지만, 성령의 사역(복음을 전하는 힘)을 교회 안에서만 한정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이는 많은 교파가 받아들인 개념이기도 하다.-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혹은 기독교와 전혀 무관한 문화권에서 살아가더라도 그들이 복음적이고, 행위로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인다면 그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다소 기독교의 우선적인 교만한 측면이 있지만, 이정도만 해도 많은 진보를 이루었다는 점을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비그리스도인에게도 은총을 주고 그들의 구원을 원하기에 기꺼이 진리를 준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물론 무신론자를 이러한 이유로 믿게 만들어야 한다는건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을 전할때 칼을 들고 협박한 법이 없다. 오히려 그저 내버려두었다. 초대교회의 탄압받는 이들의 종교, 그리스도교는 칼과 창보다는 헌신과 행동을 통한 감동으로 전파시켰다. "저들은 누구인데 걸인과 저들과 다른 이들에게 밥을 주고 잠을 재워주는가? (리바니우스, 안티오키아의 수사학자)" 라고 말할 정도로 호구적인 면모를 보였기에,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으로 전염병처럼 그 가르침을 퍼트린 것이다.

 

이제 다시 생각할 때이다. 누가 누구를 심판하는가? 시대의 명령은 하늘의 명령이란 말이 있다. 로마서는 이렇게도 말한다. "이방인들에겐 그 올바른 양심이 율법의 노릇을 합니다." 이방인으로 시작하여, 이방인에게 넘어간 이 가르침으로 이방인을 심판하는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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