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국가

개화 세계관
등장 국가
대한민국 녹우크라이나

개요

개화 세계관에서 주로 다뤄지는 세 국가. 각각 대한민국, 만주국, 우크라이나 극동공화국이다.

대한민국

동아시아에 위치한 의원내각제 공화국. 현 대통령은 ###, 현 국무총리는 유승민이다. 국민의당과 새천년민주당이 연정을 이루어 집권하고 있다. GDP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중국, 일본과 함께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강국이다.

1392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로 조선은 성리학적 질서를 중심으로 한 전제군주국이었으나, 1884년 갑신혁명으로 김옥균으로 대표되는 급진개화파가 국정을 장악하였고 문명개화론에 입각한 대대적인 개혁정책이 펼쳐지게 되었다. 1894년, 한국은 일본과 동맹을 맺고 청나라를 공격, 제1차 극동전쟁을 이르켰다. 전쟁에서 한일 동맹군이 승리하면서 한국은 간도 합병과 남만주 철도 부설권 등을 얻어냈다. 또 청과의 사대관계를 완전히 정리하고 칭제건원을 실시하여 대한국의 성립을 선포했다.

1895년, 황권이 사실상 무력화되고 개화파 내각이 국가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것에 불만을 품은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개화당을 제거하고 친러 성향의 근왕파 내각을 구성해 황권을 되찾는 것이 고종의 목표였지만 김옥균 내각은 근왕파의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하였다. 중추원은 이 사건을 고종의 반역이라고 판단, 고종을 폐위하고 국체를 공화정으로 전환하여 대한민국을 선포하였다.

1904년 제3차 극동전쟁에서 전통적인 열강 러시아까지 제압한 한국은 만주에 대한 이권을 공고히하였으며, 일본과 함께 서구 열강들로부터 열강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한국은 협상국의 편에 서서 참전, 독일령 칭다오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한국은 전장인 유럽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사실상 전무하였고, 총력전을 치르고 있는 유럽 국가들에 막대한 군수품을 수출하면서 경제가 대호황을 맞이했다.

1930년대 세계대공황 속에서 한국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1920년대부터 이루어진 복지 확충과 대공황 시기에 이루어진 강력한 경제 부흥 정책 덕에 타국에 비해 타격을 덜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적인 흐름에서 따라 부흥한 극단주의의 출현을 완전히 봉쇄할 수 없었고, 민족단결연맹과 대한공산당 등의 극단주의 정당이 출현해 정치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기성 정당들의 주도로 국가보안법을 제정, 해당 정당들의 활동에 제약을 가하여 극단주의의 발호를 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1940년, 소련과 일본이 한국, 만주, 녹오를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하면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했다. 대공황과 경제 재건의 과정에서 강력한 군축을 시행해 군사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던 한만오 3국은 소련과 일본의 침공에 맥없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창호 총리가 초기 대응 실패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였고, 김창암을 총리로 하는 전시 거국내각이 출범하였다.

만주와 녹오가 완전히 패퇴한 암울한 상황 속에서, 한국군은 북으로는 압록강과 마천령 산맥을, 남으로는 한강을 최후 방어선 삼아 결사항전하였다. 다행히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한국과 소련은 미국의 중재로 앵커리지 조약을 체결, 양국 사이에 휴전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빼앗긴 한반도 남부 영토를 수복하고 영국에게 할양했던 제주도에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등의 작전을 전개하였다.

1945년 8월,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한국은 승전국의 대열에 들 수 있었다. 전후 한국은 황폐화된 국토를 재건하며 경제 부흥을 이루어냈고, 1980년대 말부터 진행된 동유럽의 탈공산화와 냉전의 종언은 한국이 막대했던 군사비를 경제와 복지에 돌릴 수 있게 해주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경제위기로 경제가 침체기에 빠져들기도 하였으나 다행히도 큰 피해는 없었고, 현재는 GDP 세계 3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만주국

녹우크라이나

동아시아의 동해와 오호츠크 해 연안에 위치한 이원집정부제 공화국. 현 대통령은 세르히 푸르할이며 총리는 ###이다. 국민당과 민주연합으로 구성된 미래를 향한 연합이 여권 동맹으로 집권하고 있다. 인구는 3천만 명이 조금 넘으며 경제적으로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중진국으로 분류된다.

녹우크라이나의 영토는 역사적으로는 만주 유목민족의 영역이었으나 1860년 베이징 조약에서 청나라가 제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후 영국 및 프랑스와의 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러시아에 할양하였다. 부동항과 극동 진출의 교두보를 얻은 러시아 제국은 유럽령 러시아에서 연해주로의 대규모로 이주를 장려해 연해주를 개척하였는데, 이 때 연해주 지방에 대거 이주한 민족 중에는 우크라이나인도 있었다. 20세기 초 우크라이나인들은 연해주 등의 극동 지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을 벌였으나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받았다.

러시아 제국이 1917년 러시아 2월 혁명으로 붕괴하고 그해 10월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러시아 전역은 혼란에 빠졌고, 중앙정부의 부재 속이 극동은 권력 공백의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때마침 우크라이나 본토에서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건국하자 이에 극동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의 궁극적인 통일을 목표로 극동에 우크라이나 민족국가 건설을 시작했다. 시베리아 전쟁의 결과로써 하바리우스크 조약이 맺어지면서 녹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1920년대 녹우크라이나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번영의 시대를 누렸다. 인접한 한국이 전쟁 특수로 엄청난 호황을 누리면서 부가 녹우크라이나에까지 흘러들어온 것이었다. 중부와 남부에 수많은 공장들이 들어섰고 전국토를 연결하는 철도가 깔리며 국토가 개발되었으며 항구도시 볼로디스히드에는 부가 몰렸다.

하지만 세계 경제 대공황이 몰아닥치며 1930년대 녹우크라이나는 극심한 사회 혼란을 겪었다. 물가가 폭등하고 실업자들이 거리에 가득했으며 은행과 기업들이 연쇄적으로 파산했다. 이러한 경제적 혼란은 1930년대 중반 수정자본주의 정책이 실행되면서 다소 진정되었지만 정치적 혼란은 더욱 극심해졌다. 구소련의 지원을 받은 극동공산당이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1930년대 내내 안보 사건이 계속되었다. 심지어 1937년에는 현직 총리 베네딕트 야코벤코가 소련 정보기관인 NKVD에 의해 암살되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

1940년 구소련과 일본의 기습 침공으로 제3차 극동전쟁이 발발하였다. 녹우크라이나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군사력의 차이를 극복해내지 못한 녹우크라이나는 국토 전역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결국 이듬해 앵커리지 조약으로 구소련이 녹우크라이나를 완전히 병합하면서 녹우크라이나 제1공화국은 종언을 고했다.

공화국 정부는 한성으로 피신해 녹우크라이나 망명정부를 수립하였고 녹우크라이나 해방을 위한 각종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구소련에 병합된 녹우크라이나는 극동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구소련의 18개 구성국 중 하나가 되었고, 우크라이나 민족운동은 철저한 탄압을 받았다. 이후 구소련의 부동항 노릇을 하다가 1980년대가 되면서 극심한 경기 침체를 겪었다. 1980년대 말 구소련에 개혁의 바람이 불고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붕괴하면서 억눌려있던 민족주의자들이 활동을 개시하였다. 1990년, 극동 SSR 최초의 직선 대통령제 선거에서 망명정부 출신의 올렉산드르 루덴코데스냐크가 귀국해 당선되면서 녹우크라이나는 독립 여부를 묻는 투표를 개최하였고 찬성률이 68%를 기록하면서 녹우크라이나는 40년만에 독립하였다.

망명정부의 귀국과 함께 치러진 초대 총선의 결과로 최고의회에서 1991년 헌법이 제정되었고, 그와 동시에 녹우크라이나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