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적 대체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회주의적 대체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
: 마르크스-레닌주의 미학 이론에 근거하여
공산1968
I. 루카치의 사회주의 리얼리즘론
루카치 리얼리즘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총체성(總體性, totality)이다. 그에게 현실은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사실들의 무작위적 집합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개인의 내면 등 모든 요소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 유기적이고 통일된 전체다. 위대한 리얼리즘 문학의 임무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현실의 총체성을 작품 속에 구현하는 것이다. 작가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 너머에 있는 본질적인 사회적 관계와 역사적 동력을 포착하여, 독자가 세계를 하나의 전체로서 이해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총체성을 문학적으로 구현하는 방법론이 바로 전형(典型, Type)의 창조다. 루카치가 말하는 ‘전형적 인물’이나 ‘전형적 상황’은 결코 통계적인 평균이나 보편적 추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사회적·역사적 모순과 경향들이 한 개인의 운명과 갈등 속에서 극적으로 응축되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발자크나 톨스토이의 소설 속 인물들처럼, 전형적 인물은 지극히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에 그들이 속한 시대와 계급의 역사적 필연성을 온몸으로 체현한다. 이들을 통해 독자는 개인의 삶이 어떻게 거대한 사회 구조와 맞물려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루카치에게 예술적 ‘반영(反影, Reflection)’은 현실을 수동적으로 모사하는 기계적 복제가 아니다. 이는 현실의 본질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과정이다. 작가는 무수한 현실의 디테일 속에서 전형성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본질적 측면들을 선택하고, 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여 하나의 예술적 세계를 창조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술은 현실보다 더 현실의 본질을 깊이 있게 드러내는 인식이 된다. 즉, 리얼리즘은 현실의 표면이 아닌 심층을 비추는 거울이다. 루카치는 이러한 관점에서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문예의 주요한 흐름으로 자리잡혔던 자연주의와 모더니즘을 비판한다. ① 자연주의는 현실의 표면을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하지만, 현상들의 인과관계나 그 이면에 숨은 사회적 동력을 파악하지 못하고 파편적 사실의 나열에 그친다고 비판한다. 이는 총체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죽은 리얼리즘’이다. ② 모더니즘은 사회의 파편화와 소외를 인간의 보편적 조건으로 절대화하고, 객관적 현실로부터 도피하여 작가의 주관적이고 병리적인 내면세계에만 몰두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을 포착할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현실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본다.
요컨대, 루카치의 리얼리즘은 문학이 사회적 현실의 총체성을 전형적인 인물과 상황을 통해 예술적으로 반영함으로써,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고 역사의 방향을 조망하는 중요한 인식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에 기반한다. 이 역사의 방향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역사적 필연성을 의미하며, 예술의 역할은 미적(美的) 수단을 통해 역사적 필연의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 이행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그가 높이 평가했던 19세기 비판적 리얼리즘을 넘어서는, 더욱 목적의식적인 예술의 기능을 요구한다. 루카치에게 예술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에 그치지 않고, 현실을 변화시키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도구여야만 한다.
그가 말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Socialist realism)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폭로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역사적 힘의 성장을 포착하고 그려내야 한다. 이를 위해 작가는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에서 현실의 총체성을 파악해야 한다. 즉, 역사의 발전을 이끄는 주체인 노동계급의 시각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고, 그들의 투쟁 속에 내재된 사회주의의 필연적 승리를 작품 속에 형상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에서 ‘긍정적 영웅(Positive Hero)’의 창조는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된다. 이 영웅은 단순히 고뇌하는 개인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법칙을 체득하고 계급적 사명을 자각하여 새로운 사회를 향한 투쟁 속에서 성장하는 전형적 인물, 곧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다. 그의 개인적 운명은 계급의 집단적 운명과 분리되지 않으며, 그의 성장 과정 자체가 곧 사회주의를 향한 역사의 전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로 루카치에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예술의 궁극적 사명과 같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몰락과 사회주의의 도래가 단순한 가능성이 아닌 역사의 법칙이자 필연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술은 독자의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고, 그들을 혁명적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추동하는, 역사의 진보를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된다.
II. 대체역사가 갖는 잠재성: 대안적 현실의 창조
그렇다면 역사적 우연성을 핵심 동력으로 삼는 대체역사는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적 필연성의 과정을 모사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장르의 본질적 특성과 이론적 목표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나, 그 해답은 단계적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 가장 기초적인 첫 단계는 자본주의적 현실이 아닌 대안적(alternative) 현실, 즉 탈자본주의(post-capitalism)의 체제를 구체적이면서 전일적(全一的)으로 모사하는 것이다.
현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스스로를 역사 발전의 최종 단계이자 유일하고 자연스러운 질서로 제시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대중은 자본주의 외의 다른 사회 시스템을 상상하는 것 자체를 비현실적이거나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게 될 수 있다. 대체역사는 바로 이 견고한 인식의 틀에 균열을 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역사의 특정 분기점(Juncture)을 비틀어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거나, 자본주의의 맹아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 세계를 서사적으로 구현함으로써, 대체역사는 자본주의가 결코 인류 역사의 최후적 과정으로서의 유일무이한 체제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독자는 작품을 통해 ‘만약 역사가 다르게 흘러갔다면’이라는 가정 아래 펼쳐지는 대안적 세계를 체험하며,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수많은 가능성 중 단지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은 아직 사회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을 직접적으로 논증하는 단계는 아니다. 그보다 선행하여,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절대적인 것에서 역사적인 것(historical)으로 격하시키는 인식론적 전환을 이끌어낸다. 즉, 대체역사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의 '거짓된 필연성'을 폭로하고 해체함으로써, 독자가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비판적 거리를 확보하게 만든다. 이는 진정한 역사적 필연을 파악하기 위한 필수적인 지적 준비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대안적 현실을 창조하는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한 분석적 기능을 수행한다. 설득력 있는 대체역사 서사는 단순히 역사의 한 사건을 바꾸는 데 그치지 않고, 변화가 경제 구조, 정치 체제, 사회 관계, 나아가 대중의 일상과 문화에 어떤 연쇄적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전일적으로 재구성해야만 비로소 생명력을 얻기 때문이다. 이 창작의 과정은 총체성의 원리를 실천하는 행위와 맞닿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체역사는 현존하는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역학이 결코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불변의 요소가 아님을 폭로하는 부분적 기능을 수행한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이 특수한 역사적 단계에서 나타나는 파생물(Derivative)임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 혁명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된 세계를 그린다고 가정해 보자. 작가는 그 세계의 법률, 예술, 가족 제도와 같은 상부구조가 그 사회의 새로운 물질적 토대 및 생산 양식으로부터 어떻게 필연적으로 파생되는지를 그려내야 한다.
이를 통해 독자는 역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현실의 제도와 문화 역시 자본주의라는 특정 역사 단계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상대적 산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우리의 정치 체계, 소비문화, 개인주의적 가치관 등은 영원한 인간 본성이 아니라 특수한 역사적 체제의 토대 위에서만 그 필연성을 획득하는 특수한 현상임을 깨닫는 것이다. 따라서 대안적 현실의 창조 작업은 단순한 공상을 넘어, 사회 시스템의 각 부문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총체를 형성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사고 실험(Thought Experiment)이 된다. 이는 현실의 복잡한 구조를 해부하고 그 역사적 특수성을 조명하는, 리얼리즘 문학의 본질적인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III. 대체역사와 자본주의 비판
대체역사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전유하는 것은 단순히 장르의 형식을 빌리는 것을 넘어, 그 내용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 첫 번째 전제는 엄밀한 윤리적, 도덕적 기준을 서사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인류가 야만에서 문명으로, 억압에서 해방으로 나아가려는 도덕적 진보의 실존을 인정하고 그것을 역사를 평가하는 척도로 삼아야 함을 의미한다. 요컨대, 자본주의의 명확한 진보적 성격인 “보편적 인권”이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상대주의가 대체역사에 있어 가장 주의해야할 대상이 된다. 사회주의적 대체역사는 무한한 상상력의 유희라는 명목 아래 나치즘의 승리나 특정 전근대적 폭압 체제의 영속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거나 그 체제에 어떠한 형태의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나치의 승리가 가져올 세계가 더 효율적이거나 안정적일 수 있다는 식의 가정은, 그 자체로 파시즘이 자행한 반인류적 범죄와 역사적 퇴행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위험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이는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을 폐기하고 인간 해방이라는 목표를 조롱하는 행위다. 이런 점에서 대체역사라는 매체는 말초적인 쾌락과 파시즘을 찬양하는 반동적인 기능 역시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부면은 파시즘의 서사나 제국주의의 서사 역시 해방의 서사와 동등한 텍스트로 취급될 수 있다는 냉소적 허무주의(cynical nihilism)로 귀결될 위험을 내포한다. 역사를 도덕적 판단이 불가능한 미학적 놀이의 장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역사는 결코 가치중립적인 텍스트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착취와 저항, 억압과 해방을 향한 투쟁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현실이다. 따라서 대체역사의 사회주의적 전유는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를 거부하고, 인류의 도덕적 진보라는 확고한 기준 위에서 어떤 역사가 더 나은 역사인지를 판단하고 그려내는 책임을 져야 한다.
대체역사의 가장 강력하고 전복적인 비판적 기능 중 하나는 파시즘을 다루면서도 그것을 그 자체로서 가치중립적으로 다루거나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파시즘의 면면을 냉정하게 다루면서 그것을 자본주의 – 제국주의와 등치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반(反)-파시즘과 반(反)-자본주의 서사로서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전근대적이고 야만적인 폭력 체제로 보이는 파시즘이, 사실상 후기 자본주의 체제의 내적 논리와 기능적으로 다르지 않음을 대치(substitution)와 병치(juxtaposition)를 통해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전략은 두 체제 사이의 구조적 동질성(structural homology)을 폭로함으로써,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파시즘의 적으로 규정하며 획득하는 도덕적 우월성이 기만임을 드러낸다.
예컨대 나치가 지배하는 미국 동부 지역을 그린 드라마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을 보자: 드라마는 미국 매체에서 미화되는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풍경을 교묘하게 이식한다. 작품 속에서 나치 체제하의 백인 중산층은 교외의 안락한 삶, 최신 기술 제품에 대한 열망, 사회적 지위와 체면에 대한 불안 등 당대 미국 중산층의 신화와 욕망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 순응 속에서 물질적 안정을 추구하며, 현실의 문제로부터 눈을 돌린다. 드라마는 나치즘의 지배를 끔찍한 폭력으로만 그리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럼으로써 자본주의 매체가 숭상하는 1960년대 미국의 중산층 신화가 파시즘적 체제와 다를바가 없음을 폭로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즉, 60년대 미국 중산층이 짓밟히는 흑인과 반전운동가들을 냉소하며 자신들만의 소비주의적 풍요를 누렸듯, 나치가 승리했더라도 미국의 중산층은 똑같이 유대인과 민주운동가들을 냉소하며 풍요를 누렸을 것이라는 폭로이다.
이러한 대체역사 서사는 파시즘이나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암울한 세계를 그림으로써,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사회 전체에 하나의 전형성을 부여하며 비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극단적 억압과 착취, 무한한 팽창 논리는 결코 우리의 현실과 무관한 가상의 산물이 아니라, 평상시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의 외피 속에 교묘히 은폐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경향인 제국주의와 파시즘을 가장 응축되고 선명한 형태로 드러낸 전형적인 모습이다. 따라서 독자는 파시즘 – 제국주의라는 극단적이고도 전형적인 형태를 통해, 현재 우리가 속한 ‘정상적인’ 자본주의 사회 역시 그와 같은 야만성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으며, 언제든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냉엄한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이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이끌어내는 강력한 리얼리즘의 방법이 된다.
IV. 사회주의적 청사진을 제공하는 대체역사
그러나 파시즘이나 제국주의의 ‘야만성’을 그저 폭로하고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만약 대체역사 서사가 극단적 억압과 민중의 패배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는 데서 멈추는 자연주의적 기능만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결국 독자를 깊은 역사적 허무주의(historical nihilism)와 역사 상대주의의 함정으로 이끌 가능성이 높다. 역사가 극복 불가능한 암흑의 힘에 의해 지배되며 모든 저항은 무의미하기에 이에 순응해야한다는 냉소적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진보의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역사적 선택을 단지 더 끔찍한 것과 덜 끔찍한 것 사이의 임의적 문제로 전락시키며, 19-20세기 리얼리즘과 자연주의가 극복 불가능했던 허무주의로의 귀결이다.
사회주의적 대체역사가 지향해야 할 바는 바로 이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그것은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역사적 흐름 속에서도 결코 꺼지지 않는 민중의 저항과 투쟁을 그려내고, 마침내 그들의 승리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 ‘민중의 승리’는 갑작스러운 행운이나 영웅의 변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사 발전의 진정한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핵심적인 장치여야 한다. 파시즘이라는 가장 노골적인 자본주의의 폭력에 맞서, 민중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연대하여 새로운 사회를 향한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 바로 이것이 사회주의의 역사적 진보성을 형상화하는 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서사 속에서 사회주의의 승리는 추상적인 구호나 외부에서 주어진 선물로 묘사되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고통받는 주체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실천을 통해 쟁취해내는 구체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로서 그려진다. 이를 통해 대체역사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역사에 진정한 의미와 해방의 방향성을 재부여하는 리얼리즘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대체역사는 다른 매체와 차별화되는, 독점적이고도 효과적인 진보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 세계라는 구체적인 이상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민중의 승리를 그리는 것을 넘어, 그 승리 이후에 도래할 세계의 모습을 민중에게 하나의 청사진(blueprint)으로서 감각적으로 제공하는 가장 능동적인 단계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적 승리 그 자체에 하나의 전형성(a typicality)을 부여하는 작업이 핵심이 된다. 승리로 탄생한 사회주의 체제는 추상적인 이념의 집합이 아닌, 생산력이 인간의 필요를 위해 복무하고, 소외와 착취가 지양되며, 개인이 공동체 속에서 온전히 실현되는 사회의 모습이 구체적인 서사를 통해 제시되는, 살아있는 전형적 세계로서 그려진다. 작품은 독자가 그 세계의 합리성과 인간성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것이 단순한 공상이나 흘러간 과거가 아닌 실현 가능한 미래임을 설득해야 한다.
이러한 전형적 이상향의 제시는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가 된다. 그것은 독자에게 현재 체제의 모순을 견디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그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할 이유를 명확히 보여준다. 단순히 ‘자본주의는 나쁘다’는 비판적 인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우월하고 인간적인 대안이 가능하며, 이를 위해 투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하고 필연적이다’라는 긍정적이고 실천적인 전망을 부여하는 것! 이로써 대체역사는 현실 비판의 도구에서 나아가, 혁명적 의식을 고취하고 역사의 진보를 추동하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기능하게 된다.
더 이상은 이런 약탈적인 역사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역사에서 사는 것이 가능하는 것, 그러한 필연적 조건을 인식시키는 것이 대체역사의 최종적이고도 유일한 목적이 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