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개월 전

국민당 중앙과 지방파의 관계 - 통제에서 의존으로

20세기 중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국민당은 대만섬 전역에서 절대적으로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존재였다. 명목상의 헌정 속에서 당국(黨國)체제로 "중화민국 정부"와 완전히 일체화 된 국민당 중앙은 과거 우리나라 독재정권들의 집권 여당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수준의 존재였다. 대만섬은 국민당의 것이었다.

 

그러나 2025년 현재 그 위상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2024년 국민당은 민중당과 연대하여 여당인 민주진보당의 과반을 저지하고 여소야대 국면을 만드는데 성공하며 2016년 이후 치뤄진 6번의 중앙선거 중 처음으로 승리를 거머졌다. 이것은 역으로 말하자면 16년 이후 치뤄진 5번의 중앙선거(정부총통 선거, 입법위원 선거)에서 모두 국민당이 패배하였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민당은 아직도 대만의 정계를 주름잡는 주요 양당이지만 나는 최소한 중앙에서 국민당은 완전히 몰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국민당은 대선에서 3연패(敗)를 기록하여 과거의 위상이 무색할 정도의 처참한 성적을 보여주었고 2030 청년층에서의 지지율은 럭키 안철수와 심상정이 이끄는 민중당에게 추월당해 국민의힘 이상의 "틀딱정당"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지방단위 선거에서 국민당의 위상은 여전하다. 민진당 정부의 실책에 힘입어 국민당은 2018년과 2022년의 지방선거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이를 기반으로 중앙권력을 탈환할 수 있다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철저히 짓밟혔고 국민당은 아직도 야당에 머무르고 있다. 이쯤되면 한가지 의문이 든다. 중앙에서 반쯤 공중분해 된 이 당이 어떻게 지방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가? 혹은 지방권력을 이토록 탄탄히 잡고 있는 이 당이 왜 중앙권력을 탈환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바로 중앙의 "국민당 중앙과 지방의 국민당은 다른 존재이기 때문이다."라는것이다. 이게 뭔 헛소리인가, 정부총통 선거에 출마하는 허우유이나 산간지역 촌장에 출마하는 왕씨나 국민당의 이름 하에 출마하여 표를 얻는데 말이다. 

 

1945년 종전 이후 대만섬의 영유권을 넘겨받은 국민정부는 대만섬의 현지민을 무시하고 대륙 출신의 인사들 내지는 대만 출신이지만 대륙에서 활동하던 반산(半山)들을 파견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대만섬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49년 국부천대로 중화민국 정부와 함께 외성인들이 때거지로 밀려들어오면서 대만의 모든 권력은 국민당의 외성인 엘리트 집단이 장악하였고 대만 현지의 본성인들은 정치권력에서 소외받았다. 

 

"반공대륙(反攻大陸)"의 구호 아래 외성인들의 정당인 국민당과 중국청년당, 중국민주사회당의 3당 외의 야당의 창당은 금지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반정부 행위라는 명목으로 정부 기관과 외성인계 흑방(黑幫, 삼합회) 조직에 의해 죽어나가는 백색공포 시대에 토착 본성인 정치 세력은 끊임없이 억압당했다. 그러나 외성인 수가 본성인의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밀리는 상황에서 아무리 서슬퍼런 국민당 정부라 한들 이들을 무시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국민당은 점차 대만섬의 향촌 토착세력을 포섭하는 길을 택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민당 지방파, 즉 토호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당의 공권력과 친국민당 성향 외성인계 흑방 조직과도 연을 맺게된 토호세력은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였고 국민당 중앙은 충성을 댓가로 그들의 지방장악을 무시하였다. 이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았다. 상술했듯 장제스-장징궈 집권기간 동안 대만의 권력은 오로지 국민당의 소유였고 토호가 되었든 흑방 조직이 되었든 국민당 중앙의 어르신들 눈에 밉보이는 순간 그대로 이승과의 고별사를 읊어야 했기 때문에 국민당의 철저한 통제하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철저히 억제되었다.

 

그러나 1988년 장징궈가 서거하고 본성인 출신의 리덩후이가 집권하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만 정계와 사회에는 자유화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계엄령이 해제되었으며 야당의 결성이 전면적으로 허용되었다. 통제가 약화되자 흑방과 결탁한(혹은 흑방 그 자체인) 토호들은 지방선거와 입법위원 선거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또한 당국 자본주의가 해체되어 경제의 자유화가 진행되면서 흑방의 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 총통선거에서 민주진보당 소속 천수이볜에 의한 최초의 정권 교체 이후 충격을 받은 국민당은 정권을 되찾기 위해 탄탄한 기반을 갖춘 지방 토호-흑방 세력에 의존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대 중반 대만 토착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왕진핑 입법원장과 외성인 엘리트의 대표주자인 마잉주 간의 갈등이 확대된 토착 세력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국민당이 정권을 되찾아오는 과정에서 국민당 중앙은 토호 및 흑방 세력과 적극적으로 연대하였다. 마잉주와 그의 누나 마이난, 국민당 비서장을 지내던 우둔이 등이 토호들과 연계된 흑방 조직의 거두들과 식사 자리나 모임을 가지고 여행을 가는 등 적극적으로 그들과 유착하였고 지방파의 영향력과 민진당 정권의 실책에 힘입이 마잉주와 국민당은 2008년 대선에서 정권을 되찾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2012년 대선에서 마잉주는 낙선 할 것이라는 외부의 관측을 뒤엎고 정권 연장에 성공하였으나 지방조직에 대한 의존도는 더욱 커졌고 국민당 정권의 친중 정책으로 인한 부동산 가격 폭등은 서민층과 젊은층에서의 민심 이반을 낳아 2016년 다시금 정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010년대 중후반기 이후 중국의 패권 추구가 본격화 되면서 대만내에서 중국에 대한 공포심이 증대되자 국가정책에 있어 중국과의 통일을 지지하는 친중 정당인 국민당 중앙은 중앙 단위 선거에서 항상 죽을 쑨 반면 지속적인 중국과의 교류로 부를 축적한 흑방 세력 및 오랜 기간 힘을 키워온 토호 세력은 정권 심판 성향을 띄는 중간선거 역할을 하는 대만의 지방선거(대선과 지선은 2년 간격으로 치루어지며 총선은 대선과 동시에 치루어진다.)에서 국민당 간판을 걸고 나가 민진당 정권의 실정과 기존의 지역 영향력에 힘입어 연거푸 당선되었다.

 

2025년 현재 국민당 중앙과 지방의 관계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중앙정계에서 크게 쇠퇴한 기성 엘리트 중앙 정치인들은 이제 당을 유지하기 위해서 한때 자신들이 통제하던 지방 토호들과 범죄조직(흑방)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읍소해야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국민당 중앙은 토호세력으로부터 주도권을 가져와 당을 혁신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놓혀버렸으며 국민당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롄잔계 정치인들은 애초에 개혁을 할 생각조차 없다. 

 

물론 전면적인 개혁을 하지 않더라도 70여년의 세월을 거치며 쌓아온 막대한 자산과 지금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은 토호세력 및 기득권과의 끈끈한 연계, 중국의 공작이 있기에 그리고 대안 야당이라 자부하던 민중당의 헛발질과 콘크리트 지지층 덕에 국민당이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약간 다른 방향을 걸어왔지만 비슷하게 토호화의 길을 택한 우리나라의 국민의힘을 본다면 국민당의 미래가 그다지 밝지 않을거라는 사실 하나만은 확실히 알 수 있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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