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고어 슈트라서



라트 연방 최고 지도자
[ 펼치기 · 접기 ]
초대
인민위원장
로자 룩셈부르크
2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그레고어 슈트라서
3대
중앙위원회 의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
4대
서기장 대행
발터 셸
5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6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헤르베르트 프람
7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
8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보이트케 야루첼스키
9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니콜라스 네메트
10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그레고어 기지
11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게르하르트 슈뢰더
12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앙겔라 메르켈
13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자라 바겐크네히트
프랑크 · 동프랑크 · 신성 로마 · 라인 동맹 · 독일 연방 · 북독일 연방 · 독일 제국 · 바이마르

최고 지도자 · 의장 (국가원수) · 서기장 (정부수반) · 당대회 의장
그레고어 슈트라서 관련 둘러보기 틀
[ 펼치기 · 접기 ]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서기국 서기장
[ 펼치기 · 접기 ]


연합국 주요 지도자
[ 펼치기 · 접기 ]

연합국
[ 펼치기 · 접기 ]

선정 라트 연방의 인물
[ 펼치기 · 접기 ]
2022년 개국 100주년을 맞아 지상파 방송사 ARR이 전체 언어 사용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라트 연방의 인물’을 선정.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해 투표가 진행됐으며 라트 연방 인구 3억 5,000만 명 중 2억 명 이상이 투표에 참가했다. 1919년 이전에 활동한 인물의 경우 후보에서 배제되었다.
상위 10인
1위 2위 3위 4위 5위
로자 룩셈부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게오르크 루카치 발터 벤야민 안드레이 사하로프
6위 7위 8위 9위 10위
카렐 코지크 아돌프 히틀러 헤르베르트 프람 에르빈 롬멜 클라라 체트킨
11위 ~ 100위
[ 펼치기 · 접기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위대한 독일인 (ZDF)

라트 연방 제2대 최고 지도자
그레고어 슈트라서
Gregor Strasser
출생 1892년 5월 31일
바이에른 왕국 가이젠펠트
사망 1949년 7월 17일 (향년 57세)
프로이센 FSRR 베를린
국적 독일제국 ( 바이에른 왕국)
라트 연방 ( 바이에른 SRR)
묘지 베를린 노이엔펠트 공립묘지
재임기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제6대 중앙서기국 서기장
1938년 9월 16일 ~ 1949년 7월 17일
서명
링크
[ 펼치기 · 접기 ]

개요

라트 연방의 정치가, 혁명가, 사상가. 라트 연방의 제2대 최고 지도자를 역임했다. 그의 사상은 사후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로 정립되어 현재도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보수파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생애

청년기

1892년 독일 제국의 바이에른 왕국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에서 시험을 치른 뒤 1910년부터 약사 견습생으로 일하였고, 뮌헨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학업을 중단하여 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 현지임관하여 중위로 복무하고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는다. 종전 후 전역해 1918년 뮌헨 대학을 졸업하며 본격적으로 약사로 일했다.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1차 대전 참전과 제대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그의 성향은 우익 민족주의자에 지나지 않았고, 반자본주의 성향을 보였으나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 성향을 더 강하게 드러냈다. 종전 후, 그는 우익 재향군인 단체에 가입했다가 이탈했다. 1919년 독일 혁명의 여파로 바이에른에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지자, 슈트라서는 독점자본의 영향력을 감퇴시켜야한다는 판단 하에 사회민주당 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극우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슈트라서를 배반자로 보이게 했는데, 그는 군국주의 단체로부터 공개적으로 비방당했고, 바이에른 파쇼의 공적이 되었다.

결국 배를 더이상 갈아탈 수 없다고 판단한 슈트라서는 1920년 공식적으로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바이에른 지역에서의 붉은 군대를 이끌었다. 그의 군사 경험은 보수적인 바이에른 지역에서 붉은 군대가 승기를 잡는데 어느정도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으며, 흑적 내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자 그는 바이에른 사민당의 전후 재건 담당 공무원 겸 오버바이에른 지방의 전위대 지도자로 임명되었다.

1924년, 그는 최고 라트의 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때 그의 성향은 반자본주의, 사회주의자였을지언정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념에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등이 이끄는 온건파와도 거리를 두었다. 그의 급진적 민족-사회주의 사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 그의 이념은 마르크스주의로 급격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당대 주류 맑시즘의 영향을 그대로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첫째, 그는 오토 바우어나 룩셈부르크 같은 당대 주류 마르크스주의자와 달리 민족 관념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다. 예컨대 바우어는 민족을 같은 경제 권역에서의 거주민으로 규정하고 자치를 주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는데, 이와 달리 슈트라서는 같은 문화, 언어, 생활권역이 같은 경제권역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라트 연방을 범게르만 민족의 사회주의 국가로 상정했으며, 더 나아가 슬라브 민족, 라틴 민족 등의 해방을 라트 연방이 촉진해야한다고 보았다. 즉, 민족해방주의를 추구한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국가와 당의 역할을 매우 강조했는데, 이는 룩셈부르크가 인민대중의 자발적 능력을 강조했던 것을 감안하면 이질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겉으로는 룩셈부르크와 동맹을 맺는듯 하였다. 의회 투쟁을 강조한 에베르트, 레너, 아들러 등의 보수파가 건재했고, 다른 한편으로 당의 역할을 의심하는 급진파도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룩셈부르크는 어쨌든 전위당 자체는 인정하고 있었다.

비슷한 시기 슈트라서는 베를린 관구에서 크게 영향을 넓히고 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 빈 지역에서 작가 노조동맹을 이끈 아돌프 히틀러 등과 긴밀한 동맹을 맺었다. 둘은 연설과 선전선동에 있어 큰 재능을 보였는데, 이는 연설 능력이나 작문 능력이 형편 없었던 슈트라서를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슈트라서 개인의 능력만으로 그가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었을지에 대해 의심한다. 즉, 그의 집권에는 괴벨스의 보조가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집권에 성공하다

1930년대 들어 대공황의 물결이 라트 연방을 휩쓸자, 라트 연방의 경제는 큰 위기에 처했고, 자연스럽게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슈트라서의 국가-민족 사회주의적 입장이 주목을 받았다. 더불어 에베르트나 벨스 등의 온건파가 사망하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사학자 이언 커쇼는 슈트라서의 강력한 주장대로 4개년 경제개발 정책이 이행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온건파의 영수 오토 브라운이 프로이센 지방 서기장 직위에서 해임된 1933년부터 슈트라서의 리더십이 확고해졌으며 차기 지도자로 확정되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타당한 분석이다.

1934년 당대회에서 서기장으로 선출된 것은 에른스트 텔만이었으나 텔만은 슈트라서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강력한 역할을 강조하던 인물이었다. 텔만의 체제 하에서 그는 당의 서열 3위인 감찰위원장으로 지명되었다. 감찰위원장으로서 그는 권력 획책을 위해 대테러라는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슈트라서 일인의 권력 확보를 위한 투쟁으로만 보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수정주의적 평가도 있다.

1920년대 중반 니콜라이 부하린을 위시로 한 일부 우익파는 국가 경제 회복을 이유로 신경제정책을 추진했는데, 시장 논리를 일부 수용한 이 정책으로 인하여 부르주아 계급이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1930년대에 들어서 라트 연방의 혁명기가 지나감에 따라 형성된 바이에른, 작센, 튀링겐, 외스터라이히 등 지방의 사민당 조직은 점차 세습 관료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토호처럼 활동하며 중앙당의 활동을 제약했는데, 이는 강한 중앙권력 집중론자인 슈트라서에게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1930년대 강력한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국가단위로 내세우고자 한 슈트라서에게 있어서 농민과 한몸이 되어 소부르주아적 권익을 주창하는 지방 당 조직은 숙청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공식적 통계만으로 이 기간 동안 11만명의 당원이 투옥되거나 사망한 것으로 나타난다. 로버트 서비스는 최대 70만명까지 사망했을 것이라 판단하는데, 이는 과장이다. 하지만 오토 벨스, 헤르만 뮐러, 니콜라이 부하린과 같은, 슈트라서의 대항마로 부각되었던 우익주의자 혹은 온건파가 축출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다른 한편으로 벨라 쿤과 같은 극좌파도 숙청되었고, 빈 예술작가동맹의 회장 아돌프 히틀러도 숙청에 휘말려 총살되었는데, 이는 히틀러가 1968년 평화주의 대학생 사이에서 숭상되는 하나의 이유가 된다. 대테러의 기간은 공식적으로 1934년~1936년으로 규정된다.

1938년 텔만이 퇴임하자, 슈트라서는 공식적으로 서기장으로 지명되었다. 반대표는 없었다. 이로서 그는 확고한 독일의 2인자이자 실질적 지도자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계를 앞으로 돌려 1930년대 유럽은 그야말로 대혼돈의 도가니인 상태였다. 우선, 프랑스의 경우 사회당과 급진당의 분열로 불의 십자단을 이끈 프랑수아 드라로크의 파시즘 정권이 수립된 상황이었다. 동유럽도 상황이 좋지 못했다. 루마니아의 이온 일리에스쿠 정권 등 파시스트 정권이 곳곳에 포진되어있었고, 러시아 2월 혁명의 여파로 수립된 러시아 공화국 역시 우익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러시아, 일본은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동맹을 체결하였는데 이를 추축국이라 한다.

공산주의 국가로는 이탈리아가 있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이끄는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22년 붉은 셔츠단의 로마 진군으로 성립된 국가였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전통적으로 유럽의 약체 국가였으며 군사력은 터무니 없는 수준으로 플러스가 아닌 마이너스만 되는 상황이었다. 영국은 애매했다. 파시즘에 대항해 시간을 벌자는 네빌 체임벌린의 온건파 세력도 있었지만, 윈스턴 처칠 등 일부는 프랑스와의 노골적 군사동맹을 주장했다.

쟁점은 베르사유 조약의 이행 여부였다. 1922년 라트 연방은 독일제국과 자국의 연속성을 부인하며 베르사유 조약 이행에 확답을 내놓지 않았다. 급기야 1934년 텔만 서기장은 프랑스와 영국에게 베르사유 조약을 불이행할 것을 선언했다. 더불어 폴란드와의 무역전쟁도 이슈였다. 이렇듯 갈등이 누적되던 때, 프랑스가 불법점거하고 있던 라인 땅에서 공산주의 성향 노조가 총파업을 벌이고 라트 연방이 여기에 개입해 라인란트 땅에서 프랑스가 내쫓기는 일이 발생했다. 프랑스는 이를 조약 미이행이라 소리높였고 라트 연방은 정당한 주권 행사라고 선언했다.

1939년 9월 1일, 프랑스는 라트 연방에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개시했다. 라트 연방은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고 불과 3주만에 쾰른 등 주요 도시를 빼앗겼다. 라트 연방의 동맹이었던 이탈리아는 상황이 더욱 나빴는데, 비돌리오 장군이 이끄는 이탈리아군의 반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혔다. 프랑스 산악사단은 내친김에 이탈리아 본토 습격작전을 감행해 밀라노 등 주요 도시를 빼앗았고 불과 6주만에 로마가 함락되며 이탈리아가 빠르게 리타이어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일어났다.

얼마 안가 러시아마저 전쟁에 참전했다. 러시아-폴란드 연합군은 슐레지엔과 프로이센 땅을 함락시켰고 베를린 앞 50km까지 도달했다. 이때가 1940년 6월의 일로, 슈트라서 본인도 베를린에서 빠져나갈 것을 고민할 정도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긴가민가하고 있던 영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면서 숨통이 트였다. 상황을 설명하자면 급진파였던 처칠은 노르웨이 공습을 주장하다가 당 내에서 힘을 잃은 상태였다. 체임벌린의 경우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을 고려하고 있었다. 총리로 취임한 핼리팩스 경은 참전 반대파였으나, 거국내각에 참여한 애틀리 당수 및 노동당 의원들은 라트 연방에 동정적이었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라트 연방을 공격함에 따라, 전통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한 영국의 외교적인 입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입장 하에 라트 연방과 영국이 임시 동맹을 맺었던 것이다.

게다가 프랑스 군은 라인강 유역에서 더 진격하지 못하고 있었고, 무의미한 참호전이 다시 독일 땅 내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프랑스 내 반전 여론은 폭발했고 프랑스 공산당은 주요 도시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여기에다 1941년 12월 프랑스-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이 미국을 기습공격하는 일까지 일어나며 미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1942년 2월, 라트 연방군은 반격을 시작해 부르고뉴 지방까지 프랑스군을 밀어냈으며, 동쪽으로도 폴란드를 무너트리고 우크라이나 땅까지 진격했다. 이듬해 라트 연방군은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냄과 동시에 러시아 영토 내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사상자를 낸 채 1944년 12월 모스크바가 라트 연방군의 손에 들어왔다. 러시아는 우랄로 수도를 옮겼지만, 이미 전세는 역전된 상태였고, 라트 연방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1945년 5월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고 2차 대전 유럽 전선의 종식을 선언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중심에 선 것은 슈트라서였으며, 따라서 슈트라서에 대한 라트 연방 내의 지지가 강화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전후 처리

1945년 9월 2일, 도쿄만에서 일본이 미국에 공식적으로 항복함에 따라 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었다. 슈트라서는 곧장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대영제국, 미국, 중국과 함께 전후 처리에 나섰다. 가장 먼저 논의된 것은 영토의 분할이었다. 우선 러시아 서부와 프랑스, 이탈리아 등은 모두 라트 연방의 것이 되어야한다고 슈트라서는 강력하게 주장했다. 유럽 전선에서 가장 격렬하게 싸운 것은 라트 연방의 붉은 군대였기에 영국이나 미국이 많은 의견을 낼 수 없었다. 결국,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에 자본주의 정권이 들어서고 그리스를 중립지대로 하는 것 이외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슈트라서의 주장대로 관철되었다. 이로서 라트 연방은 동쪽으로는 페트로그라드를, 서쪽으로는 부르고뉴를 차지한 유럽 최대의 영토, 인구, 경제 대국이 되었는데, 슈트라서는 이를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 권역"이라는 의미에서 레벤스라움(Lebensraum)이라 불렀다.

반면 동아시아 전선에서 라트 연방군의 역할은 제한되어있었으므로 몽골, 위구르와 만주 일대를 차지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만큼은 분할통치가 결정되었으므로 도호쿠, 홋카이도, 가라후토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 1949년, 슈트라서는 일본 점령지를 묶어 "일본 인민공화국"을 구성하였다.

1945~1947년 사이 동유럽의 라트 연방 점령 지역에서 급속하게 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동유럽 지역의 안정을 위한 인민, 노동자, 농민들의 자발적 기구였는데, 실제로는 동유럽 전체를 라트 연방의 땅으로 편입시키기 위한 술책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실제 인민의 지지도 컸던 것은 사실이다. 폴란드 지방에서 농민들이 반항하긴 했으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발트 3국 등 러시아와 사이가 좋지 못했던 여러 국가에서 라트 연방은 해방자로 인식되었고, 라트 연방의 영토 확장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폐허가 된 라트 연방의 경제 재건을 비롯한 "재건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시기 라트 연방의 공업은 빠른 성장을 보였는데, 폴란드 지역에 대규모의 중화학공업지대(이른바 "중부 공업 집단")이 설립되는 등 전국 단위의 중공업 육성 정책이 시행되었다. 1946-1949년 사이 라트 연방의 연간 경제 성장률은 20%대에 달했고, 인구와 경제가 빠른 속도로 전전의 그것으로 복구되었다. 특히 전체 시가지의 80% 이상이 파괴된 바르샤바는 3년만에 거의 원형과 같은 수준으로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이면으로, 시오니즘 운동으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 민족의 국가를 건설해야한다는 의견이 높아지자, 슈트라서는 시온주의를 반동적 사상으로 규정하고 유대인들을 페트로그라드 일대의 북서부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는 후대 라트 연방 정부에 의해 국가폭력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유럽에 거주하고 있던 1,100만명의 유대인 중 절반에 가까운 470만명이 1946년부터 1949년 사이 단번에 페트로그라드 일대로 이주되었다. 후대 역사가들은 이것이 슈트라서의 내면 속에 존재했던 반유대주의적 망상의 결과라고 평가하고 있다.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은 후임자 괴벨스가 집권한 1950년부터 중단되었다.

급작스런 사망

1949년 7월 17일, 슈트라서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져있는채 발견되었다. 그는 곧바로 베를린 중심에 위치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불과 57세의 나이였기에, 많은 이들은 독살의 가능성을 의심했다. 가장 유력한 배후로 파울 요제프 괴벨스쿠르트 슈마허가 지목되었다. 괴벨스는 슈트라서의 파벌에 속했으나 전후 슈트라서의 폭주로 인해 그와 사실상 결별한 상태였다. 한편 온건파의 영수였던 슈마허는 공개적으로 슈트라서와 반목하던 사이였다. 이들이 추후 최고지도자의 직책을 노리고 슈트라서를 독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음모론이 돌았다.

그러나 슈트라서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6년간 2차대전 관련 업무에 하루 20시간씩 매달렸기에 과로한 상태였으며, 전후에도 경제재건을 위해 주말도 없이 일했으므로 건강이 크게 악화된 상태였다. 의사들은 그의 신체 상태가 57세가 아닌 75세의 것에 더 가깝다고 진단했다. 즉, 현재로서는 그가 과로사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때맞춘 슈트라서의 사망으로 인해 경직된 사회분위기는 다소 완화되었으며, 특히 유대인에 유화적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집권으로 유대인에 대한 국가 차원의 탄압은 중단된다.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소속 정당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