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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회주의 정당 | ||||
→ | 노동당 |
labor party/ 勞動黨 | |
노동의 정당한 보상을 위해 | |
1992년 | |
서울특별시 | |
마르크스-레닌주의 스탈린주의 트로츠키주의 | |
극좌~좌익 | |
이석기 | |
김재연 | |
장경수 | |
김종훈 | |
송명숙 | |
180[1]석 / 600석 (30%) | |
9석 / 24석 (37.5%) | |
적색 (#C9151E) | |
틀: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무궁화의 나라) | |
79만명 | |
학생노동위원회 | |
청년노동위원회 | |
노동과 LGBT | |
여성노동투쟁위원회 | |
노동정책연구소 |
개요
대한민국의 좌익정당이자 제1야당. 1991년 소련의 해체한 후 199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해체하게 되면서 조선로동당을 해체하고 새로 창당한 정당이다.
역사
소련 붕괴 이후(1991년~1992년)
1991년 소련의 해체로 인해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인 "소련의 지원"이 사라지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에서도 민주화의 물결이 불기 시작하며 슬슬 민주화가 이루어지는 듯 하였으나, 당시 이재오 주석은 4.13 호헌 조치를 선언하면서 당시 최연소 주석이었던 이재오에 대한 기대가 훅 사그라들게 된다. 그리고,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 중 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이 학생이 물고문으로 인해 숨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며, 시위의 열풍은 더욱 더 커지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92년 6월 29일, 이재오 주석과 조선로동당 총비서 및 책임자들은 총 사퇴를 하게 됨과 동시에 조선로동당을 해체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건국 이후 조선로동당 총비서 및 좌익 계열 운동권 및 노동조합은 조선로동당을 대체하기 위한 정당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현 노동당이다.
제1대 대통령 선거, 제1대 총선 이전
노동당은 당시 노회찬을 중심으로 한 신운동권 세력, 그리고 당시 전 조선로동당 총비서들 세력이 민 김정일이 대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노동당 당원 및 대의원들은 당시 여론이 민주화 이후로 심상치 않게 돌아가게 되자, 노회찬에게 손을 들어주게 되었고, 그 결과로 노회찬이 대선 후보로 당선이 된다.
제1대 대통령 선거, 제1대 총선 이후
하지만, 노회찬이 20%도 아닌 고작 12.3%의 득표만 하게 됨으로서 신운동권 세력은 엄청난 책임을 물게 되었고, 결국 노회찬 대선 후보 및 이정희 당대표는 이 사태 이후 정계에 거의 발도 못 디디는 수준까지 갔다. 결국, 이 이후 국민민심 파악을 위해 당시 대선후보에 낙선한 김정일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임명되게 된다. 그리고, 당의 전면적인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우선, 당시 대선위원장이었던 신운동권 세력들이 지속적인 이념 설파 및 민주화 정신 폄하 등 각종 망언을 하게 되면서 지지율이 떨어졌다는 시각이 많다. 이를 계기로 김정일 비대위원장은 막말을 지극히 경계하며 막말하는 의원들을 즉각적인 윤리위원회 회부 등 매우 강경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2대 대선, 제2대 총선 이전
김정일의 지속적인 신운동권 탄압 및 막말 의원 탄압으로 인하여 당원 및 대의원들은 확정적으로 전 조선로동당계이자, 민주파였던 김문수를 대선 후보로 내세우게 된다. 당시 대선위원장이었던 김정일은 지속적인 막말과 지나친 극좌 행보를 경계,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던 민심을 굳이 자극하지 않기 위해 대선 공약 역시 상당히 우클릭했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매우 중도화시킬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김문수 대선 후보는 현재 6.29 민주화 운동 뿐만 아닌 4.19 사태, 5.18 사태 등에 대한 사과도 전면적으로 할 만큼 당시 과거의 행보를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제2대 대선, 총선 이후
비록 대선에서는 낙선했으나, 저번 선거와는 다르게 중도층들의 민심을 획득하면서, 27.3%를 차지하게 된다. 실제로 총선에서도 저번 총선보다 무려 50석이 늘어났으며(89석), 당당히 제2야당으로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노동당의 선전을 특히 잘 보이게 해준 김문수와 김정일에 대한 당원들의 평가도 매우 호의적으로 바뀌었고, 궁극적으로 조선로동당계의 몰락을 면할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극좌 운동권에서는 "당장 총선에서는 승리했지만, 좌익의 뿌리는 뽑혔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반응이 안 좋은 것을 보아 극좌 운동권 세력과 노동당 현 당직 세력과 큰 마찰이 예상 될 모양이다. 결국 1998년, 아시아 경제위기로 인해 경제가 -5% 성장을 기록해, 현 여당이 참패할 것으로 예상되는 보궐선거에서도, 노동당이 무난히 이길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심상정 후보와 이정희 후보가 각각 무소속으로 보궐선거에서 출마하는 바람에 표가 갈라지게 되면서, 압도적인 참패를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당 내부의 분열을 막지 못한 탓으로 김정일 당대표가 사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3대 대선 이전
김정일 당대표가 사퇴하고 나서 노동당은 매우 큰 혼란기를 맞이한다. 보궐선거의 참패와 그리고 노동당 내부의 분열. 결국 지지율이 20%였던 노동당은 순식간에 10%로 추락하고야 만다. 결국 이러한 분란을 해결하기 위해 친이재오계였으면서, 동시에 친운동권 세력이기도 한 장기표가 이 둘의 갈등 봉합을 약속하며 당대표가 된다. 그리고, 이 둘의 분란을 해소하기 위해 운동권이 요구한 좌익 정체성 되찾기에도 귀를 기울이게 되고 이에 따라 김정일 당대표 이후 결별한 민주노총과도 다시 연합하게 되고, 주로 노동당의 향수가 퍼져있는 노인들을 대상으로 어필을 하기 위해 노령연금 도입과 같은 포퓰리즘 정책의 도입 역시 시작하게 된다. 동시에 청년층을 공략하기 위해 청년지원금 1000만원 지급, 청년주택 등 다양한 정책을 도입 중에 있다. 그리고, 1997년의 경기 침체를 극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당시 김영삼 정부에게 책임을 집중적으로 물게 되면서 반정부 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김문수 후보가 반김영삼, 노인, 청년 복지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경선을 무난히 통과하게 되고, 대선 내내 김영삼 정부의 실책과 공약을 언급하고 다니면서 반김영삼층의 결집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민주당보다 더 강경하게 반김영삼적인 행보를 보이며, 민주당 지지자들의 지지 역시 몰게 된다. 여론조사에서도 이를 여실히 보여주게 되는데, 대선 2달 전 5월 여론조사를 보면, 김문수 45% 김영삼 40% 김대중 10%로 지지율 1위까지 달성하고야 만다.
김문수 정권 탄생과 그 이후
득표율 48%로 김문수 후보가 당선되고, 노동당이 단독으로 304석을 확보하게 되면서, 노동당의 입지는 매우 커지게 됐다. 이에 따라, 아주 잠시 조선로동당계와 운동권 세력의 전쟁이 사실상 휴전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노령연금 제도와 청년주택, 청년지원금 1000만원 지급 등의 공약은 매우 빠르게 통과되면서 청년들과 노인들의 지지를 얻어냈다. 하지만, 내정에만 신경 쓴 첫 1년은 그나마 나았으나, 외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 악재가 시작된다. 외교에서 노동당이 친미로 가야하나 아니면 다시 친공산주의 노선을 타야하냐의 문제에 대해서 운동권과 로동당 출신할 것 없이 각자 생각에 따라 파벌이 나뉘어 엄청난 논쟁을 불러왔다. 결국 김문수 정권은 이를 중재하기 위해 소극적인 친미 노선을 타는 것으로 협의하고 이를 추진하게 되었으나, 결국 서방세계의 냉소적인 반응만 계속적으로 불러일으키게 되지만, 오히려 서방의 노선을 맞추기 위해 김문수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로 일본과 수교를 정상화하고, 당시 국민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한일회담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좌익계는 친김문수계와 반김문수계로 갈라지게 된다.
제4대 대선 이전
하지만, 대선 앞에서는 통합이 우선이었나 보다. 실제로 반김문수, 친김문수로 나뉘어 싸우던 계파들도 대선 앞에서는 일단 최대한 김문수의 실책을 덮기에 급급하게 됐다. 그리고, 김문수 정권의 청년주택, 노령연금으로 인한 빈곤층 저하로 지속적인 정권 선전을 하게 되고, 외교에 대해서 비판을 할 때도 철저히 무시로 일관하거나, 김영삼 정권을 들먹이는 등 계속된 회피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결국, 한일회담의 무리수 및 지속적인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게 되자 대선 1년 전 지지율 35% 였던 김문수는 아예 22%까지 하락하는 등 아예 갱생불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제4대 대선 이후~제6대 대선 이전
결국, 김문수는 현직 대통령이라는 아주 강력한 버프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8.3%만 득표하게 되고 노동당의 의석 수 역시 38석에 그쳐 결국 좌익계의 몰락을 불러오게 된다. 이를 계기로 반김문수계로 가장한 운동권 세력이 당을 장악하게 되고, 사실상 조선로동당계 인사들은 정치적 사망선고가 내려지게 된다. 그나마 상황이 나은 인사들은 대개 거대 야당에 들어가게 되고, 이는 제5대 대선 때 박근혜의 장기집권에 토대를 마련해 주게 된다. 그리고, 운동권들이 계속 노동당을 장악하게 되자, 제5대 대선, 제6대 대선에서 줄줄이 낙선, 게다가 50석 위로 계속해서 정당이 올라오지 못하면서 사망선고가 사실상 내려지게 된다.
제7대 대선 이후~현재
그러나, 서방의 지속적인 제재 및 한국-만주 전쟁에서의 절반의 승리 등으로 인한 민생이 조금씩 악화되자, 노령층의 향수로 인하여 지지율이 다시금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덕분에 친조선로동당계 인사들이 부활해서 다시금 당을 장악하는 중. 실제로 이석기가 대선 출마를 하자 28.9%까지 득표까지 할 정도로 굉장히 지지율이 높아졌다. 심지어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9곳이나 차지할 정도. 게다가, 현 여당에 대한 반감으로 매주 탄핵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원은 50만명 정도.
- ↑ 지역구 90석 + 비례대표 90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