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라트 연방의 역사를 다룬 문서.
1910년대: 구 제국의 모순과 혁명
1870년 보불전쟁을 통해 성립된 독일제국은 외양상으로 유럽에서 떠오르는 신흥 강대국처럼 보였다. 군사력은 세계 2위였고, 육군력은 프랑스와 영국을 합친것만큼 강대했다. 또한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독재 아래 국가자본주의가 도입되어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업화는 동시에 여러 사회적 모순을 야기했다. 우선 카를 마르크스가 지적한대로, 자본가 계급은 산업화 하에서 급속하게 부를 축적했지만, 절대다수 농민들은 농업의 산업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빈곤층으로 전락하거나 노동자 계급으로 전화되었다. 도시 노동자 계급은 빈곤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했다.
결국 독일제국의 성립은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 대립을 필연적으로 야기한 것이었다. 독일 제국은 사회보험 제도 등 일부 사회적 개혁을 도입했으나, 이는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비스마르크 시기의 사회 보험 제도는 노동 계급의 불만을 다소 완화했지만, 이는 근본적인 변혁이 아닌 자본주의적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러한 모순을 내재한 채 급속한 공업화를 이루었으므로 독일제국은 여러차례의 경제적 위기를 맞이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독일제국은 빌헬름 2세 시기에 들어 비스마르크 시대의 현실주의(realpolitik)를 포기하고 세계정치(Weltpolitik)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세계정치는 실질적으로 독일의 제국주의, 즉 자본의 수출이었다. 독일 제국 말기는 제국주의적 팽창과 군국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독일은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아프리카와 아시아로의 식민지 확장을 추구했고, 이를 위한 군사력 증강과 전쟁 준비에 막대한 자원을 투자했다. 이는 독일 노동자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더욱 악화시켰을 뿐 아니라 국제적, 외교적 대립을 더 심화시켰다.
게다가, 독일은 외양상으로 의회제를 선택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구 봉건시대의 귀족과 일부 재벌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황제는 마음대로 총리를 임명, 해임할 수 있었고 의회를 해산할 권리가 있었다. 따라서 독일은 이 시기 사실상 전제군주제 처럼 작동하였다. 이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결여된 채,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요구가 억압되었음을 의미했다.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 시기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정치적 자유와 노동운동을 억압했으며, 이는 노동 계급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많은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모든 체제 모순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성급히 전쟁에 참여한 채 사실상 패전하는 결과에 이르게 하였다. 독일은 "슐리펜 계획" 등 군국주의적 정책을 수립하였고,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사회민주당(SPD)의 총파업을 무력진압했다. 그러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전쟁에서 독일은 승리할 수 없었다. 전쟁은 기약 없는 참호전으로 귀결되었고, 자원이 바닥난 독일제국은 "순무의 계절"이라 부르는 혹독한 기근에 접어들게 되었다. 보다못한 독일 해군 수병들이 1918년 11월 봉기한 킬 군항의 반란으로 연쇄혁명이 일어나 독일 전역에서 전쟁 반대와 황제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도주하려다가 혁명군에게 붙잡혀 포로로 구금되었고, 독일제국은 멸망하여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를 1918년 독일 혁명이라 부른다.
뒤이은 1919년 1월, 부르주아 혁명에 이른 사회주의 혁명의 즉각이행을 주장한 독일 사회민주당 다수파에 의해 1919년 독일 혁명이 일어났다. 주도자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였다. 공화국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이들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혁명의 이행에 반대하지도 않았고 혁명은 사실상 무혈로 끝났다. 그러나 베를린 밖에서는 귀족과 재벌이 이에 반대하는 봉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참전용사로 구성된 극우 근황주의 집단은 내전을 일으켰다. 이렇게 가톨릭 중앙당, 근황주의자, 일부 사민당 보수파가 연합한 반동배인 흑군과, 변혁을 추동하고자 한 독일 사회민주당 다수파가 구성한 적군이 대립한 정국을 흑적내전이라고 부른다.
1920년대: 사회주의 대조국의 태동기
흑적내전 초기에는 참전용사가 주축을 이룬 흑군이 유리했지만, 대부분의 민중은 흑군에 지지를 보태지 않았다. 더구나 사회민주주의 우파, 자유주의자, 근황주의자, 가톨릭신도 등 여러 이해관계로 얽힌 흑군은 적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합력이 떨어졌다. 결국 흑군은 패주를 거듭하다가 1922년 말 사실상 붕괴되었고, 소수 근황주의자들은 영국으로 도피해 독일제국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한편 빌헬름 2세는 러시아로 탈출하려 하다 실패하자 적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했다.
이로서 3년간의 내전은 적군의 승리로 끝났고, 적군은 유럽 각지에서 일어난 여러 혁명 세력과 연대하고자 했다. 우선 오스트리아에서도 흑적내전의 연장선상으로서 독일계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세력이 정권을 잡은 상태였다. 유럽에서 여러 연쇄혁명이 일어났으나, 성공한 곳은 쿤 벨러가 이끈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과 핀란드 내전에서 승전한 핀란드 사회주의 공화국 뿐이었다. 독일은 아쉬울대로 이들과 연합하여 국제 사회주의 연방체를 수립하고자 했고, 1922년 10월부터 12월까지 열띤 논쟁과 토론 끝에 헌법이 완성되었다. 이로서 1922년 12월 30일, 독일, 오스트리아, 핀란드, 헝가리 4개국의 혁명정부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토대가 될 평의회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이른바 라트 연방을 수립하였다.
라트 연방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결착지을 책무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23년 1월, 뒤늦게나마 라트 연방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을 통하여 협상국과 제대로 된 조약을 맺을 수 있었다. 라트 연방은 독일 제국을 멸망시키고 나온 국가이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프랑스와 영국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유화론과 프랑스의 강경론 중에서는 미국의 유화적인 입장이 받아들여져, 라인 지역의 비무장과 엘자스-로트링겐 지역의 프랑스 할양, 폴란드 접경 지대의 폴란드 편입, 그리고 320억 마르크 가량의 배상금이 부과되었다.
3년간의 내전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 부담으로 인해 신생 라트 연방의 경제는 말이 아닌 수준이었다. 엄청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고, 막대한 기근으로 인해 전국 각지에서 사망자가 속출했다. 또한 혁명가 레프 트로츠키가 단행한 전쟁 공산주의는 내전에서 군사적 승리를 가져왔지만,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생산성이 크게 하락했고, 특히 집단농장화에 대한 농민들의 반발로 식량 생산이 감소하면서 대규모 기근(1921-1922)이 발생했다. 이러한 경제적 붕괴는 결국 전쟁 공산주의 정책의 실패로 이어졌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는 러시아 혁명 실패 후 망명한 경제학자 니콜라이 부하린을 책임자로 하여 신경제정책(Neue Wirtschaftspolitik; NWP 엔베페)을 수립하였다. 이 정책은 라트 연방에 부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시킴으로서 경기를 회복하고 국제적 고립을 회피하고자 한 것이었다. 농업 생산량과 산업 생산량이 점차 회복되었으며, 소비재 시장도 활성화되었다. 농민들과 도시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도 개선되었다. 그러나 득보다 실이 더 큼에 따라 이 정책은 폐기되었다. 무엇보다 이것은 자본주의와의 일시적인 타협으로 간주되었다. 이 시기에는 얄마르 샤흐트가 새로운 경제 정책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부르주아 경제학을 전공했고, 엔베페의 실질 책임자 중 한명이었다. 그는 우선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기 위해 마르크를 폐지하고 탈러화를 도입했는데, 이것으로 인플레이션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를 탈러화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그는 1925년 연방은행(Unionsbank)의 총재로 취임했다. 재무장관 루돌프 힐퍼딩 역시 사회주의 경제정책의 수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이 시기 라트 연방은 개혁파와 혁명파가 거의 대등한 역할을 부담하던 시기로, 에베르트와 브라운, 힐퍼딩, 레너, 벨스 등의 개혁파가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내세우면서 급진파였던 리프크네히트, 룩셈부르크 등과 대립했다. 엔베페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1930년대: 슈트라서의 독재
1920년대 신경제정책의 마무리와 함께 시작된 국가 주도의 경제 계획은 국가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정책 변화를 의미했다. 때맞춰 터진 미국발 세계 대공황은 라트 연방이 더욱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에 매진하도록 만들었다. 에베르트의 사망과 로자 룩셈부르크의 실권 장악을 통하여 점차 개혁파의 권위가 약해지고, 혁명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러한 경향성은 1933년 온건파의 영수 중 한명이었던 오토 브라운 프로이센 FRSS 서기장이 경제 실적 미진을 이유로 해임당하고 그 자리에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임명됨으로서 더욱 확실해졌다. 슈트라서와 함께 혁명파에 속했던 에른스트 텔만이 서기장 직위에 오르면서, 슈트라서는 룩셈부르크에 이은 2인자이자 사실상 은퇴 수순을 밟던 룩셈부르크를 대체하는 최고지도자로서 두각을 드러냈다.
우선 슈트라서는 1933년부터 1937년까지 제1차 4개년 경제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는 중공업(철강, 석탄, 기계, 화학 등)을 중심으로 생산성을 극대화하여 서전쟁으로 망가진 경제를 완전히 복구하고, 구 자본주의 국가를 뛰어넘는 것과 동시에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전파하기 위한 군사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국가가 경제 목표를 설정하고 각 부문별로 자원과 노동력을 할당하는 방식이었다. 시장은 사실상 폐지되고, 경제 활동은 계획 수립에 의해 조직되었다. 또한 발트해 연안에 대규모 중화학공업단지를 조성하였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정치를 안정화할 이유도 있었다. 이 과정에서 나타난 대규모 숙청을 대테러(1934-1938)라고 한다. 대테러의 원인에 대해 일반적으로 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정치적 권위 확립을 드는 시각이 있어왔다. 그러나 근 30년간의 연구에 의하면 부차적으로 보였던 요인이 사실은 본질적 원인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흑적내전을 거치면서 군부가 일종의 이익집단화되었고, 프로이센 군대의 전통과 맞물려 군대가 하나의 파벌을 형성하면서 당의 목적 달성을 방해하기도 했다. 일부는 부정부패도 저질렀다. 즉, 군벌화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에서 뽑힌 최고 평의회 의원들은 각 지방 유지들과 유착하며 숫자를 부풀리거나 부패를 눈감아주는 등, 각 지방별 근무태만과 부패가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슈트라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도입하여 각 지방의 부정부패와 비효율을 일소하고 군대를 제자리로 돌려놓고자 했다. 프랑스와 러시아에서의 파시즘 정권 대두는 이러한 우려에 따른 숙청을 더 강화시켰다.
이 시기 개혁파의 많은 인사들이 권력에서 밀려났다. 대테러의 핵심은 공개 재판 형식으로 이루어진 뉘른베르크 재판(1936-1938)이었다. 오토 브라운, 오토 벨스, 하인리히 뮐러, 쿠르트 슈마허 등 많은 개혁파 지도자들이 "반혁명 음모" "프랑스 파쇼 정권과의 내통" "룩셈부르크 암살 시도"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처형되거나 핀란드에 있는 강제형무소로 보내졌다. 재판은 대부분 조작된 증거와 강압적 자백을 통해 진행되었고, 피고들은 대부분 처형되거나 굴라그로 보내졌다. 경찰국장 에른스트 룀이 주도했으나 룀 역시 장검의 밤을 통해 처형되었다. 물론 개혁파만 숙청된 것은 아니었고 헝가리의 지도자 벨러 쿤 등 평판이 좋지 못했던 좌파 측 인사들도 숙청되었다.
나의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나의 명예는 빼앗을 수 없다! 오토 벨스, 최후 진술에서[2] |
1938년 룀의 숙청 이후, 상대적 온건파였던 하인리히 힘러가 경찰국장 겸 내무차관으로 지명되면서 대테러는 잦아들었다. 힘러는 전임자에 비해 관용적이었고 차별과 불공정에 반대했다. 대테러에 대해서는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우선 부정적 평가로, 정치와는 관련 없는 작가, 예술가, 지식인, 일반 노동자 및 농민들까지 반혁명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대규모 체포와 처형이 이어졌다는 점이 있다. 대부분의 혐의는 조작된 것이었고, 수십만의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특히 군사지도부 중 상당수가 숙청당한 것은 초기 프랑스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반면, 부정부패와 파벌화로 흐르고 있던 라트 연방의 기강을 잡고 국가를 보다 더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추동시켰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오늘날 라트 연방 교육부는 기본적으로 대테러를 오류라고 보고 있으나 그 순기능도 간과하지 않으며, 공 4 과 6 정도로 평가한다. 대테러에 연관되었던 이들은 거의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권되었다.
1940년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초강대국으로 올라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진행을 다룬 영상 |
1930년대 대공황은 유럽 각국에서 파시즘의 광풍을 불러일으켰다. 1934년 프랑스에서 프랑스 파시즘당의 샤를 모라스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비슷한 시기 러시아 제1공화국도 파시즘의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경제적 타격을 입은 이들은 추축국을 결성해 사회주의 국가인 라트 연방을 포위하였으며, 이는 라트 연방의 안보적 위기로 다가왔다. 당면한 외교안보적 위기는 루르 지방에서 비롯되었다. 라인-루르 지방은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비무장 지대로 선포된 곳이었다. 이 점을 노린 모라스 정권은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라인 지역을 강제로 점령해 자원을 수탈하고자 했는데, 독일계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프랑스 군인들은 라트 연방 국민들을 분노케 하였다. 또 폴란드와 라트 연방 간의 무역분쟁(라트 연방-폴란드 무역 전쟁)도 위기를 고조시켰다.
한편 동부에서는 러시아 제1공화국과의 분쟁이 대두되었다.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난 유대인 포그롬은 라트 연방 내에서 3번째로 큰 민족집단이었던 유대인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독립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야욕은 동유럽 전체를 공포로 밀어넣었다. 당시 러시아의 지도자는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였다. 케렌스키는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로, 처음에는 사회민주주의자였으나 이후 반공주의를 위해 반유대주의 및 군부 세력과 손을 잡고 파시즘으로 타락한 인사였다.
케렌스키 정권은 1938년 벨라루스와 러시아의 통일성을 강조하며 벨라루스와의 재통일을 목적으로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을 무단 침공했다. 이를 오브예디네니예(Объединение)라고 부른다. 뒤이은 1939년에는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우크라이나 남부 지역을 무력 병합하였다. 라트 연방 측에서는 두 완충 국가의 소멸을 곧 전쟁 위험이라 받아들였다. 그러나 영국 등 여타 유럽 국가들은 이에 대한 명확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도리어 프랑스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확장 시도에 동조하며 라트 연방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1939년 9월 1일, 러시아-프랑스 연합군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이에 라트 연방이 러시아 측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폴란드-라트 연방 연합군은 한달간 러시아군에 대치했으나, 끝내 폴란드가 항복하면서 러시아군이 라트 연방 영내에 진입하게 되었다. 또, 루르 지방을 중심으로 프랑스군이 공세하면서 쾰른 등 주요 도시가 프랑스군의 손에 넘어갔다. 이탈리아군이 독일과 동맹을 맺어 반항하였으나 프랑스군의 산악사단에게 공격이 막힌 후 역공당해 6주만에 로마가 함락, 항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라트 연방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게다가 영국에서 대프랑스 동맹론자 윈스턴 처칠이 낙마하고 평화주의자 핼리팩스 경이 집권하면서 프랑스의 상황은 불리해졌다. 핼리팩스 경은 전쟁에서 최대한 피하고 양측을 지원하며 관망하자는 입장이었으나, 1940년 10월 영국의 민간함이 러시아군의 어뢰에 포격당해 5,000명이 죽는 리즈 호 참사가 터지면서 전통적인 반러 감정이 폭발했다. 그 결과, 영국은 라트 연방과 동맹을 맺고 제한적으로 전쟁에 참전했다. 단, 영국군은 물자 지원만을 하였지 전세가 결정적으로 독일에 유리해진 1943년까지는 군사 지원을 보내지 않았다.
1940년 6월 러시아군이 베를린 앞 50km까지 진격하며 위기에 처했으나, 발터 모델 장군의 회심의 반격을 통해 라련군이 반격에 성공했고, 그대로 동프로이센까지 러시아군을 밀어내며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게다가 1941년 12월에는 미국까지 진주만 공격으로 연합국으로 참전하며 영국, 라련, 이탈리아, 미국, 중국의 동맹이 성사되었다. 1942년 2월, 라련 붉은 군대는 프랑스를 독일 영내에서 몰아내고 부르고뉴 지역을 점령하며 프랑스를 압박했다. 이어 1943년 1월, 라련은 마침내 프랑스 파리를 점령했다. 샤를 모라스가 퇴진하고, 장 프랑수아 드라로크가 알제에서 신정부를 수립하며 맞서 싸웠지만, 이미 전세는 기운 후였다. 1943년 미군의 횃불 작전으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가 해방되며 7월 프랑스는 항복했다.
1944년 4월, 라련은 이어 동부전선에서도 페트로그라드를 해방시켰다. 12월, 모스크바에 입성하며 사실상 승기를 잡았다. 케렌스키를 비롯한 파시즘 정부의 요인들은 예카테린부르크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항전했으나 그 예카테린부르크마저도 1945년 5월 함락되며 러시아는 항복선언을 하였다. 이어 9월 일본마저 항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은 라트 연방의 승리로 끝났다.
1950년대: 전후 호황기를 맞이하다
1949년,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사망하면서 라련은 큰 권력 공백을 맞이했다. 이후 파울 요제프 괴벨스 서기장, 쿠르트 슈마허 정치국원, 카를 레너 조직국장, 헤르만 괴링 공군 원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게슈타포 수장 등이 권력 투쟁을 벌였다. 부르군트의 목장에서 복귀한 내무장관 하인리히 힘러, 전쟁영웅 에리히 만슈타인도 전투에 참여했다. 처음에는 2차 대전의 공군 에이스였던 괴링이 유력한 후보였으나, 괴벨스 중심의 "반괴링 연합"의 연합에 밀려 성폭행 및 반사회주의 선전선동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어 핀란드 강제 형무소로 유배되었으며 2년 후 사망했다. 쿠르트 슈마허와 카를 레너가 전쟁 도중 얻은 병으로 얼마 안가 사망하면서[3], 괴벨스는 자연스럽게 최고 지도자로 떠올랐다. 괴벨스는 얼마 안가 당의 의장으로 영전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했고, 1952년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숙청하면서 안정적인 1인자로 자리매김했다.
괴벨스의 정책은 "탈 슈트라서주의"였다. 괴벨스는 슈트라서의 신화를 이용했지만, 슈트라서에 비해 훨씬 유화적인 통치를 펼쳤다.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을 중단하고, 검열을 완화했으며, 대테러를 공식적으로 종결하고 핀란드 강제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범 2만명을 석방했다. 이를 통해 라련은 점차 슈트라서의 억압적 사회 분위기에서 벗어나 개방된 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한편 괴벨스는 슈트라서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킨 마르크스-룩셈부르크주의를 정립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전후 경제 복구가 관건이었다. 괴벨스는 대외적으로 미텔 오이로파 정책을 통해 우크라이나, 폴란드, 벨라루스 등의 중부유럽 국가를 자국으로 편입시켰다. 수천만의 새로운 노동인구가 생겨나자, 괴벨스는 이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중부유럽 전체의 번영을 이루어내고자 했다.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농업 및 공업 기반과 안그래도 튼실하였던 체코의 산업을 바탕으로 라련은 1950년대 연간 10%에 달하는 빠른 성장을 기록했다. 1952년, 괴벨스 의장은 공식적으로 전후 경제 복구의 완성을 선언했다.
경제적 재도약이 완료되자, 냉전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라련은 그리스 내전에서 공산군을 지원해, 그리스의 공산화를 이끌어냈다. 라련과 미국은 처음에는 거의 대등하게 맞섰으나, 미국이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내비친데 반해 라련은 공격적인 대외 혁명 수출 정책을 지향했다. 따라서 라련이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을 제치고 주된 축으로 자리잡았다. 1956년 만주-몽골 위기로 인한 중미결렬로 중국이 제2세계의 대열에서 이탈하면서, 라련의 지위는 더 강고해졌고, 1년 후인 1957년에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 "베글라이터"를 쏘아올려 베글라이터 쇼크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개입주의자 W. 애버럴 해리먼이 1956년 대선에서 당선된 후, 공산화된 쿠바를 침공하는 피그만 침공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면서 점차 대외적 지위가 약해졌다. 이에 반해 라련은 1950년대 경제적 호황을 누렸고, 약 1억명에 달하는 막대한 사회주의 중산층을 만들어내는데도 성공했다.
1960년대: 과도기와 문화대혁명
1960년대 라트 연방은 점차 관료주의와 수정주의에 편향되어 활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연간 7%가 넘던 GDP 성장률은 1960년대 들어 5%대로 떨어졌고, 급기야 1963년에는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을 하기에 이른다. 1964년 괴벨스 의장은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을 해임하고 알렉세이 코시긴 재무장관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 코시긴은 1964년부터 1968년까지 코시긴 개혁이라는 경제 개혁을 추진했다. 활력을 잃은 경제를 소생시키고, 관료주의와 보신주의를 타파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지방의 비협조적 태도와 여러 현실적 여건으로 인해 코시긴 개혁은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 결국, 사회적 불만은 가중되었다.
또 194~50년대의 베이비부머들이 사회로 진출하며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직업의 질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났고, 특히 교육에 있어 점차 한명의 교수가 수백명의 학생을 대하는 기계식 대형 교육이 늘어났다. 더구나 과거 파시즘 정권에 복무했던 여러 인사들이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 과거의 혁명 영웅들의 자녀들이 고위직을 독식하는 행태에 대한 불만, 20년 가까이 집권한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 대한 피로감 등이 겹치게 되었다.
그러던 1967년, 다니엘 브릴 사건이 터졌다. 1967년 10월 프랑크푸르트 괴테 대학교에서 한 대학생이 만취 상태로 운전하여 동료 학생을 치고 달아나는 뺑소니 사건이 일어났다. 경비원에 의해 붙잡힌 해당 학생은 "감히 나를 기소해라! 우리 아빠가 다니엘 브릴이라고!"(Wie kannst du es wagen, mich strafrechtlich zu verfolgen! Mein Vater ist Daniel Brill!)라고 소리쳤다. 다니엘 브릴은 헤센 나사우 SRR의 경찰 부국장인 것으로 드러났다. 당에서는 이를 공론화하지 않으려 했지만 학보에 사건이 실리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시위까지 일어나며 반발이 거세졌다. 결국 다니엘 브릴 부국장이 TV에 출연해 인민들에게 사과했으나 이것으로 라련의 고질적 문제였던 "혈통주의"에 대한 반감은 폭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와중에 반정부 시위에 참석했던 대학생 베노 오네초르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4] 학생들은 분노하여 궐기했고, 비슷한 시기 일어난 프랑스의 대학생 사회운동에 영향을 받아 1968년 5월부터 전국적으로 당의 보수적 통치와 혈통주의, 관료주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이를 문화대혁명이라고 한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이를 긍정평가하는 측은 라트 연방의 정치 시스템에 대대적인 개혁을 몰고왔으며, 보수적 사회 분위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평가한다. 반면 부정평가하는 측은 수많은 학자와 성직자들이 탄압받았으며, 과거의 유산들을 성급하게 부정한 극좌파적 운동이라고 비판한다. 오늘날에도 문화대혁명의 평가는 라련 내에서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1968년 당시에는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왔다. 1949년 이래 19년간 집권한 괴벨스의 퇴진을 불러왔으며, 개혁파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집권했다. 또,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의 구조가 개편되었고 이때부터 비로서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정치 구조가 정착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집권한 후 여러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국가 주도의 대규모 중산층 육성 사업을 실시하는 한편 당의 구조를 개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에르하르트는 쏟아져나오는 사회 각개층의 요구를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면서 인기가 하락하게 되었다.
1970년대: 프람의 집권, 데탕트의 시대
1972년 당대회에서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집권하는데 성공하나, 독일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뮌헨 올림픽 참사가 일어나며 상황이 바뀌었다. 백계 러시아 운동의 단원들이 러시아의 해방을 주장하며 라트 연방 선수단을 인질로 잡아 그중 9명을 살해하는 참사가 일어난 것. 결국 에르하르트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5] 이후 치러진 긴급 서기장 투표에서 헤르베르트 프람이 정족수 표결을 얻어 집권하는데 성공했다. 프람은 1960년대 말 라련의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사생아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40~50년대 반파쇼 투쟁을 벌였으며 1960년대 후반 라트 연방의 좌파적 파벌을 이끈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헤르베르트 프람은 여러 좌파적인 인사를 기용하여 라트 연방 체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했다.
먼저, 그는 정치범에 대한 탄압을 거의 중단했다. 슈타지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내무부가 직접적으로 슈타지를 감독, 관리하게 되면서 195~60년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슈타지는 그 위세가 축소되었다. 또 붉은 군대의 고위 군장교에 대한 숙청을 통해 군을 견제하였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군축을 시도했다. 종교의 자유가 폭넓게 허가되었으며, 오랫동안 탄압받아온 유대인들을 위한 여러 법안이 통과되어 현재 유대인 ASRR이 설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헤르베르트 프람의 개혁 방향성은 인민대중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였다. 대중이 직접 참여하는 반우파투쟁과 반관료투쟁으로 당을 압박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당내 기반이 부족하고 대중 지지 기반이 충분했던 프람의 전략적인 계산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이에 따라 그는 당원 뿐 아니라 일반 대중이 당대회에 참여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고 당대회 대의원에 무작위 대중을 선발하는 것도 고려했다. 나아가 서기장 직선제를 논의하기도 했으나, 당 내 반발에 부딪혀 실패했다.[6] 한편으로는 과거사 청산도 있었다. 그는 그레고어 슈트라서 시기 일어난 대테러에 대해 반성하였으며, 아돌프 히틀러, 쿤 벨러 등을 비롯한 대테러 피해자들을 대거 복권했다. 그는 1972년 "고참 사회민주당원"을 선정했다.
대외적으로는 데탕트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힘이 아닌 말을 통한 공산화를 선호했고, 스스로 이를 서방정책이라고 불렀다. 서방정책은 이전과 달리 쿠데타나 혁명을 통한 급진적 변혁보다는 경제적 원조를 통한 제3세계 및 서방권의 점진적 공산화를 유도하는 정책이었다. 실제로 영국에서 20년만에 영국공산당이 원내에 재진입했고, 아일랜드에서는 공산당이 집권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과의 평화를 추구해 1972년 처음으로 라련-미국 정상회담을 열었다(닉슨-프람 회담). 또, 20년만에 동구권 지도자로서는 처음으로 죽의 장막을 넘어가 장제스 중국 총통과 회담을 가졌다(프람-장 회담). 이러한 파격적인 행보로 인해 오늘날에도 최고지도자의 예상치 못한 대외 행보를 "프람이 중국에 가다 (Frahm geht nach China; 프람 게흐트 나흐 히나)"라고 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급진적 행보로 인해 당 내에서 그의 평가는 상당히 엇갈렸다. 보수파의 대장 격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바이에른 SRR 서기장은 "유아 같은 극좌 사생아 프람으로 인해 국가가 8년간 멈춰있다"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설상가상으로 프람이 가장 신뢰하던 보좌관 귄터 기욤이 사실 영국 MI6의 요원인 것으로 드러났다. 결정적으로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인해 유가가 오르자 프람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프람은 더이상 집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1980년 3선을 포기했다.
1980년대: 호네커가 냉전을 사회주의의 승리로 이끌다
1980년 당대회에서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헬무트 슈미트, 헬무트 콜, 프란츠 프라니츠키 등 여러 후보가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에리히 호네커가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집권했다. 호네커는 프람과 달리 이전의 보수파를 대표하던 정치가로, 엄격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내정과 외정에 있어 모두 강경한 보수 정책을 펼쳤다.
내정에서는 다시 슈타지의 권한을 키웠고, 반체제 인사를 향한 도감청을 활성화했다. 잠시 폐쇄되었던 핀 카렐리아 SRR의 강제수용소도 복구했다. 프람 시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로 체포되어 유죄를 선고받은 인물이 겨우 72명에 불과했지만[7] 1980년부터 1984년 사이의 정치범은 무려 3,000명이 넘었다. 다당제, 서기장 직선제 등 정치 개혁 의제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라트 연방 국민들은 호네커의 정책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1970년대 말 정치적,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국민들이 보수적 정책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제2차 냉전을 주도했다. 흔히 1950~60년대를 제1차 냉전, 1980년대를 제2차 냉전이라고 부른다. 호네커는 릴레함메르의 참사 등으로 실추된 슈타지의 위신을 되살리기 위해 국제적인 첩보망을 부활시켰고, 미국과의 군비 경쟁을 시작했다. 비록 전임자의 정책을 이어받은 것이긴 하지만 미국-과테말라 전쟁, 미국-그레나다 전쟁 등에서 남미 사회주의자들을 지원해 남아메리카 혁명을 이끌어냈다. 그의 호전적인 대외 외교는 "악의 축" 연설로 극에 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다시 갖는 등 의외의 유화파적인 면모도 있었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 문제에도 불구하고 라트 연방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다. 1980년대, 계획적 사회주의 경제를 통하여 라트 연방은 최대 호황기를 맞이했다. 반면 미국은 오일쇼크의 타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점차 국력이 쇠락했으며, 닉슨 대통령의 사망과 레이건의 집권, 미국-과테말라 전쟁에서의 패전 등으로 혼란기를 맞이했다. 그 결과, 미국과 라련의 국력은 점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이 탄핵되자, 집권한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부시 개혁이라는 이름 하의 집산주의 개혁을 추구하며 라련과의 화합과 사회주의화를 주도했다. 1988년 호네커와 부시는 회담을 갖고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1년 후, 서구권 혁명이 일어나며 냉전은 공산주의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또 남아메리카 연쇄혁명으로 남미가 라련의 우방이 되기도 하였다.
이로서 라련은 1980년대 말 미국을 제치고 유일한 세계 최강대국으로 남게 되었으며, 세계의 사회주의화와 진보를 이끌어가는 축으로서 기능하였다. 라련의 이러한 독주를 팍스 게르마니카라고 부른다.
1990년대: 개혁과 개방의 탈냉전기
1990년대 라련은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1988년 에리히 호네커의 퇴임 후, 보이트케 야루첼스키가 집권했다. 첫 폴란드인 지도자인 야루첼스키는 기본적으로 보수파에 속했지만, 개혁파 성향에도 가까웠고 전임자에 비해 유화적인 통치를 펼쳤다. 정치범에 대한 형량이 줄어들었고 슈타지가 개혁되었으며 대외 개입 역시 부드러운 방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야루젤스키 본인의 인기가 그렇게 높지 않았던 탓에, 1992년에는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이후 처음으로 개혁파인 니콜라스 네메트가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을 전공한 니콜라스 네메트는 "신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하며 체제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이 일련의 개혁을 네메트 개혁이라고 부른다. 우선 경제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를 중시하며 국유화의 비중을 낮추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관료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대 라트 합중국 등으로 대표되는 행정구역 개편, 다당제 및 서기장 직선제 도입 등의 개혁안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인민들은 개혁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고, 네메트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으로 네메트 서기장은 매파적 대외정책을 유지해 매파적 개혁주의의 시초가 되기도 한다.
외교에 있어서 라트 연방은 "공산주의의 벽을 옮기는" 서진 정책을 추구했다. 가장 대표적으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있다. 유고슬라비아는 공산주의 국가였으나 오랫도록 라트 연방과 반목했다. 1991년, 유고 연방이 붕괴되자 라련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라련의 개입에 대한 반발로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신연방조약을 통해 신유고연방을 결성하면서 라련의 유고 문제 개입은 반쪽짜리 성공으로 끝났다. 나아가, 유대인 ASRR의 러시아계-유대계 갈등, 중동의 정치적 불안정 등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면서 번영 속에서 모순이 싹트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의 현대사
2000년대 이후, 라련의 패권은 다시 한번 도전받았다. 2001년에는 극좌 성향 러시아 해방조직인 러시아 해방 기구가 일으킨 바르샤바 생화학 테러로 3,000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또, 라련과 반목하던 사담 후세인을 축출하기 위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으나, 정작 이라크에서 패전하며 2005년 군대를 철수하여 국제적 위신에 타격을 입기도 했다. 2006년에는 라련에 대항하는 지중해의 유일한 국가인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가 독자적으로 핵개발에 성공해, 이탈리아와 라련을 위협하였다.
2000년대에는 인도가 새로운 대륙의 축으로 부상했다. 인도는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으나, 인디라 간디 이래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계획개발경제로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또, 1990년대 IT 혁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기술적으로 선도적인 국가로도 도약했다. 인도의 1인당 GDP는 1990년대 초 까지만 하더라도 500 탈러 대에 불과했으나, 2010년 2,000 탈러를 돌파한데 이어 2020년에는 1만 탈러의 고지를 돌파했다. 2014년, 인도는 인도네시아와 페르시아 등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인도는 이라크, 리비아, 방글라데시, 아프리카 빈국 등 제3세계 비동맹 국가와 연합했다. 이로서, 세계는 신냉전의 시대에 진입하게 된다.
한편 라련은 2000년대부터 2008년까지 그레고어 기지,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 인기 없는 지도자가 집권하다가, 2008년 강경파인 앙겔라 메르켈이 서기장으로 집권하며 "메르켈 독트린"을 선포했다. 메르켈 독트린은 이전까지 제3세계 비동맹 국가 및 인도에 유화적이었던 전임 지도자와 달리, 제3세계의 반동적 흐름을 격퇴하고 정상적인 공산주의를 이식하겠다는 새로운 매파적 외교 정책으로의 회귀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미국발 경제 위기로 인해 잠깐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으나, 사회주의 경제의 특성상 빠르게 극복하는데 성공했고, 2010년대에는 인도에 맞서 라련-인도 무역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2020년, 12년만에 메르켈 서기장이 퇴임하면서 자라 바겐크네히트가 새로운 서기장으로 선출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후대에 컬러로 복원한 사진이다.
- ↑ 벨스는 처형되지는 않았지만 핀란드 형무소로 보내졌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어 수감 2년만인 1939년 사망했다.
- ↑ 암살설도 있지만, 후대 의학자들이 엄밀히 검증한 결과 독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 ↑ 후일 밝혀지길 오네초르크를 쏜 경찰은 사실 미국 CIA의 공작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측에서 독일의 정치적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대학생을 쏜 것이다.
- ↑ 다만, 이것이 핑계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에르하르트는 1970년대 초반 건강이 좋지 않았고, 헤르베르트 프람만은 막자는 당의 여론에 따라 억지로 재선했지만 스스로 권력의욕이 없어 테러를 핑계로 재집권하자마자 사임했다는 것이다.
- ↑ 그의 인기가 워낙 좋았던 탓에, 서기장 직선제가 이때 통과되었다면, 프람은 임기 제한만 없었어도 죽을때까지 영구집권할 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평가이다.
- ↑ 이마저도 대부분이 백계 러시아 운동의 단원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