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Lebensraum (독일어)
조선어로는 생존권(生存圈), 생활권(生活圈)으로도 번역되는 라트 연방의 194-50년대 대외 정책. 프롤레타리아트 국제주의 및 민족해방주의 이념에 따른 정책으로, 라트 연방이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심 국가로서 러시아와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 하에서 억압받는 민족을 해방시키고 자국의 사회주의 대오에 참여시켜야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생활권이라는 슬로건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역사
대게르만주의
프리드리히 라첼은 1901년에 지리학적 서식지를 인간과 사회에 영향을 주는 한 요인으로 묘사하기 위해 인문지리학 용어로서의 레벤스라움을 만들었다. 라첼은 인간과 사회가 기본적으로 지리적 상황에 영향을 받고 한 지역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사회는 자연히 국가 영역을 다른 영역으로 확장시키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이러한 개념은 독일의 대러시아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사용되었으며, 헤르만 하우스호페 등의 학자들은 독일의 인구과잉을 해결하기 위한 게르만 민족의 생활권 개념을 주창하였다.
혁명과 대 게르만주의의 폐기
1919년 1월 사회주의 혁명으로 대게르만주의는 "구 체제의 실패한 산물"로 간주되어 청산의 대상이 되었고, 독일의 극단적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인들은 혁명 과정에서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1] 이로서 레벤스라움 정책 역시 공식적으로 폐기되었고,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독일은 일부 동프로이센 지역과 엘자스-로트링겐 지역을 포기하였다.
오토 바우어의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1922년-1939년 전간기 시기 라트 연방의 영역을 표시한 지도. |
오토 바우어, 픽토어 아들러, 카를 레너, 루돌프 힐퍼딩 등으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Austro Marxist)들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다민족 국가의 틀을 유지한 채, 그들의 언어와 경제적 권역을 보장하는 자치의 형태로 민족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로자 룩셈부르크 등 민족주의 개념에 반대한 사상가들도 있었지만,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초기 민족주의 논쟁의 과정에 있어 논의를 주도하는 이들이었다. 이에 따라 신생 공화국이었던 라트 연방도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의 민족자치 개념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오토 바우어는 신생 라트 연방에 가입하는 국가가 "언어와 문화, 생활 권역 및 경제 권역의 일치"에 따라 민족자치를 보장받아야한다고 주장하였고, 이에따라 1922년 라트 연방이 참여했을 때에는 혁명의 진원지인 독일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핀란드가 추가적으로 라트 연방에 가입한 상태였다. 공통점은 범 게르만 혹은 범 투란 민족주의에 속해있었다는 점으로, 또다른 자발적 사회주의 국가였던 이탈리아는 라트 연방 가입을 거부했다.
슈트라서의 신(新)레벤스라움
1934년 연방의 실권자로 올라선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러시아와 프랑스, 그리고 여타 제국주의 하에서 압제에 놓여있는 민족을 해방시키는 것이 주요한 목표여야한다고 주장하였다. 20세기 초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제국주의가 독점자본의 수출을 통해 이윤율 저하 경향을 회피하는 체제임을 지적하며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이어받아 1930년대의 라트 연방 주류파는 민족해방이 곧 혁명이라고 보았다.
또한,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개념과 합치해, 라트 연방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중심으로 각 민족을 자국으로 편입해 자치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피억압 민족의 자주를 보장하고 그들의 경제적 수준을 끌어올리며 모순을 해결할 의무가 있었다. 이러한 개념이 합쳐져 독립을 염원하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을 해방시켜야한다는 것으로서 레벤스라움의 개념은 부활할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과 실현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라트 연방은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발트 3국, 캅카스 3국 등 동방으로 크게 점령지를 넓혔다. 라트 연방은 점령지에 인민위원회를 설치하고, 주민 투표를 통하여 완전한 독립, 라트연방 하에서의 자치, 원 국가로의 재귀속 3가지를 물었다. 러시아, 프랑스 북부,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가 자치안을 지지하였고, 이에 따라 1945년부터 1952년까지 동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라트 연방의 자치 영토로서 편입되었다. 미국 등 연합국은 부정투표를 주장했지만 현재까지 부정의 증거가 나타난 것은 없다.
현황
영국 해체 이후 라트 연방의 영역을 표시한 지도. |
평가
라트 연방에 비판적인 측에서는 범게르만주의와 범투란주의의 연장선상이라 평가절하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1930년대를 전후하여 레벤스라움의 개념이 범게르만주의와 단절되어있다고 평가한다.
관련 어록
계급 의식을 지닌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수적인 증가는 변혁을 거부하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무더기들이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캅카스, 엘자스-로트링겐, 플랑드르 등 유럽 각지에서 완전한 적대적 생산 관계를 구축하는 것에 대한 유일한 효과적 방어이다. 70년 전에도 그랬듯,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운명은 슬라브와 프랑스,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항해 어머니 사회주의 조국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유산을 보존하고 늘려나가는 것이어야 한다. 하인리히 힘러 군수장관, 1943년 "프롤레타리아트 계급 혁명에 있어서 최종적 해결책" 연설 中 |
관련 문서
- ↑ 헤르만 하우스호페는 스위스로 망명해 그곳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