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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52대 총리 리처드 밀허스 닉슨 Richard Milhous Nix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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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3년 1월 9일 |
캘리포니아주 캘리포니아 요바린다 | |
사망 | 1994년 4월 22일 (향년 81세) |
뉴욕주 뉴욕 | |
재임 기간 | 제52대 총리 |
1965년 5월 27일 ~ 1972년 8월 9일 | |
서명 | 파일:리처드 닉슨 서명.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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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가장 널리 알려진 닉슨의 사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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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제52대 총리.
상세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넬슨 록펠러 내각 하에서 내무 장관과 국무 장관 직을 역임했다. 개인기를 바탕으로 1960년 총선에서 총리 후보로 나섰다가 패배했지만, 5년 뒤의 총선에서 승리해 1972년까지 총 7년간 미국의 총리로 재임하였다.
재임 기간 도중에는 중국과의 데탕트, 환경보호청 설립, 보편적 의료보험법 추진[2] 등의 업적을 낳았으며 대중적인 인기 역시 높았으나 1972년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의 여파로 총리직을 자진 사퇴하여 불명예스럽게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생애
청년기
1913년, 캘리포니아의 한 서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해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았지만, 돈이 없어서 입학하지 못했고, 대신 자신의 집 근처에 있던 대학교인 휘티어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에는 태평양 전선에서 비전투 병력으로 근무하였다. 솔로몬 제도에서 실제 전선에 나가지는 않는 보직으로 4년간 복무했고, 이때 동료 군인들과의 내기 포커에서 딴 돈으로 1947년 미국 서민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물론 단순 포커로만 당선된 것은 아니었고, 그는 캘리포니아 내에서 성실한 변호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보수 정당인 보수당에서로 열심히 활동했기에 공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1951년 미국 총선에서 그는 브로드웨이의 스타 배우였던 헬렌 더글러스와 맞붙었다. 그녀는 거물 정치인으로 자유당의 첫 여성 부당수를 맡을 정도로 인지도가 높았기 때문에 닉슨은 낙선 위기에 처했지만, 마침 닥친 미국 내의 반공 열풍을 타고 더글러스 후보를 공산당으로 몰아붙여 수백표차로 간신히 재선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네거티브 전략으로 인해 닉슨에게는 "비열한 닉슨"이라는 별명이 붙었지만 더글러스를 상대로 거둔 접전승은 닉슨이 거물 정치인으로 올라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록펠러 내각의 장관으로서
1956년, 그가 모시던 넬슨 록펠러가 총선에서 승리해 총리로 취임하자 그는 내무장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43세로 내각 내에서 가장 젊은 각료였다고 한다.
정작 내무장관으로 임명될때는 야당으로부터 불법 정치 자금을 수수한 혐의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보수당 내에서도 닉슨의 낙마 여론이 높아졌지만, 닉슨은 이 위기를 TV 연설로 무마하는 정면 돌파로 답했다. 닉슨은 TV 광고에 출연해, 자신이 18,000 달러의 정치 자금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적인 용도로 받은 돈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강아지 체커스만을 자기를 위하여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는 화제를 바꾸어 자신의 어린 아이들에게 강아지가 얼마나 귀엽냐며, 불법적으로 받은 것은 맞지만 큰 부당이득을 얻은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억지로 국가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닉슨의 불법 정치 자금 수수에 대한 여론이 순식간에 뒤집혔을 뿐더러, 닉슨에게는 가정적인 이미지까지 생겼다. 이른바 체커스 연설이라고 불리는 이 연설은 현재까지도 자신에게 처한 불리한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언급되며, 현재까지도 널리 명연설로서 인정받고 있다.
닉슨은 내무장관으로 3년간 일한 뒤, 1959년 농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록펠러가 실각할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때는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과의 부엌 논쟁을 통하여, 미국 중산층의 유복함을 소련의 궁핍한 중산층과 비교하면서 서기장에게 가르쳐주는 모습을 보이면서 스푸트니크 쇼크로 소련에게 뒤쳐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미국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1960년 미국 총선
닉슨은 1959년 전당 대회에서 보수당의 신임 당수, 즉 총리 후보로 선출되었다. 넬슨 록펠러가 재선할 수 있었지만, 스푸트니크 쇼크를 비롯한 여러가지 악재로 인하여 인기가 높지 않았기에 비교적 인기가 높은 닉슨으로 선수를 교체한 것이었다. 보수당의 이러한 전략은 처음에는 잘 먹히는듯 보였고 실제로 보수당의 지지율은 선거 운동 초반기 13%p차이로 자유당을 제치고 1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자유당의 당수 존 F. 케네디는 젊은 이미지를 내세워 보수당을 바짝 추격하였다. 그렇게 선거를 3주일 앞두고 대망의 TV 토론회가 열리는데, 닉슨은 케네디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보수당의 지지율 역시 폭락하였다. 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닉슨의 모습과 달리, 당당하고 말도 유창하게 하는데다가 잘생기기까지한 케네디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것이다. 정작 케네디와 닉슨의 모습이 비추어지지 않았던 라디오 중계를 들은 사람들에게서는 닉슨이 훨씬 이성적으로 답변한데에 비해 케네디는 감성과 무논리에 호소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즉 닉슨이 자신의 이미지 관리에 철저하지 못해 지지율이 밀린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뒤이은 TV 광고에서도 중독성 있는 후크송으로 무장한 케네디의 광고와 달리, 닉슨은 지루하고 밋밋한 광고를 내보내 홍보에서 처참하게 실패하였다.
다만 단지 그것만으로 닉슨의 패배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닉슨은 이른바 전국 의석 확보 전략을 세우고, 전국의 모든 주에서 최소 30% 이상의 의석을 확보한다는 목표로 미국 전역을 유세하였다. 그러나 접전지와 우세지, 열세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돌아다닌 이러한 전략은 매우 비효율적이었으며 닉슨의 피로를 불러일으켰다. 반대로 케네디는 미국 서부 및 중부의 접전 지역을 방문하는 동시에, 아일랜드계 미국인에게 집결을 호소하는 연설로 민주당의 집토끼와 중도층을 모두 붙잡는데 성공하였다.
아무튼 이러한 선거 과정 끝에 닉슨이 이끌던 보수당은 단 12석차이로 자유당에 뒤졌다. 심지어 몇몇 지역에서는 부정선거 주장도 제기되었다. 총리 지명 투표에서는 사회당 의원들이 케네디의 매카시즘 동조 논란을 의식하여 투표에 전부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닉슨이 총리에 지명되는데 실패하면서 닉슨은 그야말로 선거에서 완패하게 된다.
총리로 향하는 길
총선에서 패배한 이후, 닉슨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뉴욕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조용히 지냈다. 그러던 1963년 케네디 총리가 암살당하고, 린든 B. 존슨이 의회를 해산해 조기 총선이 열리자 닉슨은 정계에 복귀하였다. 이때 보수당이 내세운 총리 후보는 온건파에 속했던 닉슨과는 정 반대의 파벌에 속하는 강성파 골드워터였다. 골드워터는 선거 초반부터 존슨에게 지지율이 크게 밀리고 있었던데다가, 베트남 선제 핵공격 등의 주장으로 중도층에게서 기피되는 인물이었다. 결정적으로 자유당에서 골드워터가 총리로 지명되면 전세계적 핵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내용의 네거티브 광고인 "데이지 걸" 광고를 내보내면서, 보수당은 자유당에게 445석 대 112석이라는 충격적인 대참패를 당했다. 닉슨 자신도 불과 122표차로 재선에 성공했던 참담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닉슨이 보수당의 당권을 쉽사리 장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닉슨은 살아남은 온건파 중도보수의 거두로서 강성파에게 총선 참패의 원인을 들어 강성파 의원들을 대거 쫓아내고 다시 당수직에 복귀했다. 또한 1964년 린든 B. 존슨 총리가 위대한 사회 정책의 일환으로서 흑백 분리 반대 및 인종 화합 법안을 대거 통과시키자, 이에 실망한 보수파 자유당 의원들을 포섭하였다. 린슨 B. 존슨 총리의 정신나간 달러 찍어내기 정책은 미국 내에서조차 비판받고 있었다. 이에 대한 후폭풍이 1965년 들어 이곳 저곳에서 터지기 시작하자, 닉슨은 그를 경제 방임의 이유를 들어 불신임을 주도했고, 불신임은 불과 3표차이로 통과되었다.
자유당은 이를 "의회 쿠데타"로 정의내리고 민권법에 대한 보수파들의 반발로 모는 역공을 펼쳤다. 자유당의 총리 후보로 나선 휴버트 험프리 부총리는 린든 B. 존슨 총리의 복권을 주장하며 흑인과 진보주의자들의 표를 흡수해 일시적으로 지지율에서 앞서나갔다. 그러나 닉슨은 "침묵하는 다수"라는 도덕주의적인 슬로건을 꺼내들었고, 북부와 남부를 어우르는 중도파-보수파들의 표심을 보수당 쪽으로 끌어들였다. 결정적으로 휴버트 험프리는 닉슨에 대해 네거티브 선전으로 일관하였고 닉슨은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자신에게 불리한 TV 토론을 거부하였다. 결국 선거 당일에는 여론조사가 뒤집혀져, 보수당이 자유당을 상대로 23석 차이로 의석에서 앞서 닉슨이 총리로 지명되게 된다. 5년이나 뒤로 미뤄진 닉슨의 꿈이었다.
총리 재임 당시
후대의 극도로 부정적인 평가와 달리, 닉슨은 총리로 재임하면서 비교적 중도적이고 더러는 진보적이기까지한 정책들을 여럿 추진하였다. 특히 재임 기간 도중에는 환경과 관련된 법안들을 많이 통과시켜 최초의 환경주의자 총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해양생물 보호법을 통과시켰고, 환경보호청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야생 동물을 마음대로 포획할 수 없게하는 법도 만들었다. 대기정화 특별법, 전국 환경정책 특별법 역시 닉슨 내각 시절 통과된 법안들이다.
사회적으로는 성별을 근거로 한 교육 차별 금지를 추진하였고, 남부 주에서 여전히 횡횡하던 인종차별적인 교육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투표 연령을 18세로 낮춰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를 독려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가정에 기초 수당을 지급하는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는 현대에 들어서 기본소득제의 원형으로서 여겨지고 있다. 또한 미국의 불합리한 의료 체계를 수선하고자 의료 보험법 개정안 카드를 꺼내들기도 했으나 이는 보수당 내에서의 반발로 인하여 후대 자유당 내각에서 통과되었다. 그만큼 닉슨이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면과는 반대로 닉슨은 재임 기간 내내 권위적인 태도로 시민들을 대했다. 비록 베트남 전쟁이 시작된 것은 LBJ 내각때인 1963년이었지만 닉슨은 베트남 전쟁을 방조하고 더 키웠다는 비판을 받았다. 베트남 전쟁은 초반기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기자들에 의해 그 참혹한 실체가 드러나자 1967년을 기점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샌프란시스코의 대학가를 중심으로 꽃의 여름이라고 불리는 대규모 히피 운동과 반전 시위가 일어나자, 닉슨은 군 병력을 동원해 학생들을 무력 진압하는 참극을 일으켰다. 결국 1967~68년동안의 대학가 반전 시위에서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닉슨의 도덕주의 정치 역시 큰 의심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퀘벡 독립 운동인 "10월 위기" 당시 야당을 견제하기 위해 적절한 대응을 취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등 일관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서 지지율이 약간 떨어지기도 했다.
황실과의 관계 역시 최악이었는데, 에드워드 2세 황제는 서민 출신이면서 권위적이고 오만한 그를 매우 하찮게 여겼으며, 베트남 전쟁도 개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사사건건 닉슨과 충돌했다. 1968년 경에는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자신의 시종들에게 오늘은 총리가 나의 백성들을 어떻게 괴롭혔는가?라고 질문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에드워드 2세는 사적인 자리에서 닉슨 특유의 어눌한 어투를 흉내내며 놀리는 등 대놓고 총리와 척을 지는 모습을 보였다. 1970년 10월 위기 당시에는 트뤼도 퀘벡주지사의 계엄령 발포 요청을 총리의 동의도 얻지 않고 통과시켜, 닉슨 총리가 공개적으로 황제가 입헌군주로서 지켜야할 선을 넘었다고 비판하는 등 총리와 황실의 신경전은 닉슨이 사임할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1969년 총선에서 오히려 4년 전에 비해 더욱 큰 표차로 승리했다. 그의 안정적인 경제 경영과, 중산층에 기대는 침묵하는 다수 이론이 맞아 떨어진 것이다. 자유당이 에드먼드 머스키, 휴버트 험프리, 조지 맥거번 등 다양한 거물 인사들의 계파 싸움으로 분열되어있던 점 역시 닉슨의 재선에 큰 도움을 주었다.
베트남 전쟁은 지속되었지만, 닉슨은 여론을 의식해 철수를 결정했고 이로서 닉슨에게 남아있는 걸림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였다. 더 나아가 닉슨은 중국과의 데탕트 정책의 일환으로 핑퐁 외교를 선보였다. 중국과 미국의 친선 관계는 매카시즘적인 반공주의에 찌들어있던 보수 내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과거 매카시즘에 동조한 적이 있었던 닉슨의 이미지 역시 중도적인 실용주의자로 세탁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72년 당시까지만해도 닉슨의 지지율은 70%대를 넘나들었고 20년간 총리를 하는게 아니냐는 말도 나올정도로 높은 인기를 얻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1969년 총선 기간 당시 임페리얼 캐피톨에 위치한 워터게이트 호텔에서 5명의 강도가 자유당의 선거대책본부가 차려진 방을 침입하는 범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에는 일반적인 강도 사건으로 여겨졌지만, 갑자기 대형 로펌의 변호사가 나서서 이들을 변호하고, 내각 정보청의 명령으로 수사가 중단되는 등의 수상한 정황이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들에게 포착되었다.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들은 이 사건이 닉슨 총리가 배후에 있는 사건이 아닌지 파고들었지만, 선거 운동이 워낙 과열되어있던지라 포스트의 기사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워싱턴 포스트는 지속적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을 조사했고, 1971년 연초 총리가 자유당의 선거 사무실을 도청해 총선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고 하였다는 증거를 포착해내었다. 닉슨 총리는 이 의혹을 전면 부정함과 동시에 어떠한 수사라도 받겠다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하지만 과거 총리 비서실과 보수당의 선거 사무실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던 알렉산더 버터필드가 총리 집무실에는 야당과 여당의 모든 대화가 녹음되는 비밀 도청 장치가 있고, 닉슨 총리가 선거 전략 도청을 명령하는 육성도 녹음되어있다라는 충격적인 증언을 발표하면서 상황은 닉슨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제국 검찰청은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특별 검사를 파견하였다. 닉슨은 검찰청의 상위 조직인 법무부를 통솔하는 총리의 권한으로 법무장관이었던 엘리엇 리처드슨에게 아치볼드 콕스 특별 검사를 해임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엘리엇 장관은 이 명령을 거부하고 법무장관직과 자신의 의원직을 사퇴하는 소신있는 행보를 보였다. 닉슨은 엘리엇 장관의 대행을 맡은 월리엄 러클하우스 법무 부장관에게 해임을 명령했으며, 그 역시 거부하였고 결국 로버트 헤론 보크 법무 제1차관이 아치볼드 특검을 해임하게 되었다. 하룻밤만에 대통령의 억지로 특별 검사, 법무장관, 법무 부장관이 모두 공석이 되어버린 토요일 밤의 대학살 사건으로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동요했으며 중도층은 물론 온건 보수층마저 닉슨에 대한 전방위적인 수사를 실시해야한다는 의견으로 여론이 반전되었다.
리처드 닉슨 총리는 험악해진 여론을 달래고자 논란을 해명하기 위한 공개 성명문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 유명한 저는 사기꾼이 아닙니다!(I'm not a crook!)라는 발언이 나왔고 오히려 이 발언으로 모든 미국인들은 닉슨이 사기꾼이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닉슨은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특검을 실시하는 것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럴거면 왜 특검을 해임했냐는 비웃음이 난무했다.
해가 지난 1972년, 상황이 닉슨에게 매우 불리해지자, 닉슨은 최후의 발버둥으로 자신의 도청 명령이 기록된 테이프의 공개를 막아달라는 것을 대법원에 넘겼다. 그러나 대법관 9명중 8명[3]이 만장일치로 아무리 총리라고 해도 그렇게는 안된다!라는 판결을 내려 결국 테이프가 공개되었다. 도청을 명령한 내용의 테이프가 일부 공개되자, 보수당 내에서도 불신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닉슨은 사퇴 압박을 받았다.
결국 닉슨은 총리직을 사퇴하였다. 불신임 투표가 예정된지 5일 전의 일이었다. 불신임으로 조기 총선이 치뤄져 보수당이 대참패하는 것을 막고자하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사면을 받기 위함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사퇴를 결정한 날 닉슨이 에드워드 2세를 접견했는데, 에드워드 2세는 닉슨을 두고 황제마저 속인 총리라며 길길이 노했다고 한다. 야사이긴 하지만, 닉슨과 황실의 사이가 나빴던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총리 퇴임 이후
일단 총선에서는 보수당이 자유당을 상대로 압승을 거뒀기에, 자유당은 재선거를 치루자고 제안하는 대신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차기 총선이 치뤄질 동안 임시로 총리로 재임하며 1973년 임기 만료와 동시에 총선을 치루자고 하였다. 보수당이 이를 받아들였고, 키신저는 총리에 취임하였다.
키신저는 총리의 권한으로 닉슨이 저지른 모든 범죄에 대한 혐의를 사면하였다. 하지만 이는 닉슨과 보수당이 내키는 바가 있다는 바로 해석될 수 빆에 없었고 결국 키신저는 1973년의 총선에서 참패해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닉슨 본인은 총리직을 사임한 이후,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헬기를 타고 돌아갔는데 이때 나온 사진이 그 유명한 "V" 사진이다. 퇴임한 이후 그는 조용히 살면서 책을 여러권 냈는데,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과를 차치한다면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1994년, 그는 뇌졸중으로 숨을 거뒀다. 알려진 유언은 도와줘(Help). 그는 자신보다 먼저 떠난 아내와, 예전에 연설로 유명해졌던 애완견 체커스 옆에 나란히 묻혔다.
존 F. 케네디와의 비교
닉슨은 과거 돈이 없어서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는데, 존 F. 케네디는 공부를 못했는데도 아버지가 하버드 총장과 친구였다는 이유로 아버지 빽을 통해 하버드에 입학한 과거가 있어 케네디를 매우 경멸, 혐오했다. 게다가 자신과 달리 엄청난 부자 가문 출신에다가 젊고, 말도 잘하면서 잘생기기까지 한 케네디에게 큰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열등감은 닉슨이 정치 초년기와 달리 정치적인 무리수를 반복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정작 사적으로는 닉슨과 케네디가 나쁜 사이가 아니었다고 한다. 닉슨과 케네디는 같은 1947년 총선에서 초선 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 해 열린 초선 의원의 친목 모임에서 닉슨은 케네디와 1대 1 토론을 할 기회도 얻었다. 심지어 닉슨의 바로 옆 의원 사무실 방이 케네디의 방이라 둘은 종종 점심도 같이 먹었다고 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으로 케네디와 닉슨은 1960년 총선에서 맞붙게 되었고, 이후 닉슨과 케네디의 관계는 겉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서민 계층의 자녀로 자라난 닉슨은 보수주의자였던 반면, 특권층의 자녀로 태어난 케네디는 소위 말하는 "강남 좌파"의 면모를 보여줬다. 이렇듯 삶의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두 사람이었지만 정작 두명 모두 총리의 임기를 명예롭지 못한 방법으로 끝마쳤다는 점은 미국 현대사의 비극이자 하나의 아이러니이다.
이러한 닉슨의 "인간적인" 면모를 반영한 것이 올리버 스톤의 영화 "닉슨"이다. 영화 내에서 닉슨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좌익 운동권 대학생이 숨지자 꼴 좋다고 큰소리치지만, 정작 뒤에서는 자신의 형이 대학생의 나이에 죽었다며 혼자 훌쩍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압권으로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 사임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게 되었을때 총리 집무실에 걸린 케네디의 초상화를 붙잡고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 있다. 그의 임기는 케네디에 대한 열등감과 패배 의식으로 가득 차있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을정도로 닉슨과 케네디의 관계는 독특하다.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940 - 1972 | 정계 입문 | |
무소속 | 1972 - 1994 | 정계 은퇴 사망 |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947 | 1947년 미국 총선 | 캘리포니아 제7구 | 305,231 (57.1%) | 당선 (1위) | 초선 | |
1951 | 1951년 미국 총선 | 257,926 (48.2%) | 재선 | |||
1953 | 1953년 미국 총선 | 334,926 (60.4%) | 3선 | |||
1956 | 1956년 미국 총선 | 413,671 (66.2%) | 4선 | |||
1960 | 1960년 미국 총선 | 364,954 (59.7%) | 5선 | |||
1963 | 1963년 미국 총선 | 캘리포니아 제3구 | 291,356 (42.1%) | 6선 | ||
1965 | 1965년 미국 총선 | 319,924 (51.5%) | 7선 | |||
1969 | 1969년 미국 총선 | 380,065 (58.3%) | 8선 |
여담
- 닉슨은 생전에 언론을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에 즉석 질문을 받는 기자 회견을 거의 개최하지 않았다.
- 당은 다르지만 28대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을 대단히 존경해서 대통령이 되고 난 후 윌슨이 사용한 책상을 백악관으로 가져왔는데 이 책상에 앉아 있는 것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항상 닉슨의 팔꿈치에는 책상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외국을 방문하는 동안 너무 낡은 책상이라서 그랬는지 백악관 직원이 마호가니로 새롭게 꾸몄는데 돌아오자마자 오히려 그 직원을 갈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