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로 (당신들의 조선)

벨지엄 솔피 박영환 얏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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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 에야차! 에야차!
로동당기발 따라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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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현 로
Michael Moohyun Roh
본명 로무현(盧武鉉)
출생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군 진영읍 본산리
(現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봉하로)
사망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
미국 애리조나주 드라군 산맥 오울 록
국적 제주 (당신들의 조선) 대한민국 (1946~1950)
조선 (당신들의 조선) 조선 (1950~1988)
미국 미국 (1988~2009)
직업 변호사, 평론가, 민주운동가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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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광주 노씨[1]
부모 아버지 로판석, 어머니 리순례
형제자매 형 로영현, 로건평
누나 로영옥
이복누나 노명자
이부누나 김선밀
배우자 권량숙
자녀 슬하 1남 1녀
학력 진영대창소학교 (졸업)
진영중학교 (졸업)
부산개성고급중학교 (졸업)
종교 무종교
신체 168cm, 68kg, O형
소속 정당
약력
수상 노벨평화상 (2000)

개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조선의 변호사, 정치평론가, 민주운동가.

생애

유년 시절

1946년 미군정 치하 경상남도 김해시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로판석(盧判石)은 왜정시대에 타이어 제조업을 하였으나 사기로 막대한 돈을 잃어 몰락하였으며 이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리순례(李順禮)는 로판석을 대신해 가정 살림을 꾸렸다고 한다.

1953년 진영대창소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시작하였다. 소학교를 다닐 적엔 학교 소년단 위원장을 맡았다고 하며 졸업한 이후엔 1958년엔 진영중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이후엔 그의 맏형 로영현의 권유로 부산개성고급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어려운 경제적 사정으로 인해 제대로 공부를 하지 못한 채 졸업했다고 한다. 물론 그 당시엔 고급중학교를 졸업한 사람도 고학력자 취급을 받던 시대였다. 그러나 당시에 변호사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만이 변호사가 될 수 있었기에[2] 그도 변호사가 되기 위한 대학 입학 본고사를 준비해야만 했다.

그렇게 본고사를 준비하던 중 그 당시의 결혼 적령기를 훨씬 넘어버려 1973년에 권량숙(權良淑)과 결혼했으며 아들 로건호(盧建昊)도 가지게 되었다. 권량숙의 부친인 권오석은 시각장애인이라는 리스크를 짊어진 채로 조선로동당 창원군당의 부위원장을 하던 인물로 그 덕에 로무현도 대학 입학을 거치지 않고 조선변호사회에 가입하여 변호사가 될 수 있었다. 물론 대학 입학 본고사 준비하던 머리는 남아있었는지 그의 법률 지식은 대학을 졸업한 다른 변호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고 한다. 1976년엔 조선로동당에 입학하며 본격적인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다.

변호사 시절

당시 조선의 모든 변호사들은 국가 소속의 국선변호사로 국가가 배정해 준 범죄인들을 변호해주는 업무만을 해야만 했다. 이에 로무현도 부산에서 활동하며 국가에서 배정해 준 범죄인들을 변호하게 됐는데 이 중에서 특히 로무현은 세무·회계 업무와 부산의 정치사상범 변호 업무를 주로 맡았다고 한다. 로무현이 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엔 박헌영의 권력이 극에 달했던 시기로 그 당시 박헌영에게 비판적이었던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박헌영과 남로당파의 정치 공작으로 인한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이들의 범죄를 변호하여 이들의 형량을 낮춰달라 호소하는 것은 곧 박헌영과 남로당파의 유일영도체계에 반대한다는 것으로 직결됐으며 이 때문에 당시 변호사들은 정치사상범의 변호를 꺼려했으며 변호를 한다 하더라도 피고인에게 형벌을 합리화하는 일밖에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변호사로서의 의무를 다 하지 못했단 것이다. 하지만 로무현은 정치사상범 변호에 그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나서서 변호했으며 피고인들을 향한 고문 사실을 폭로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성적인 변호 덕에 그가 맡았던 정치사상범 일부는 완전무죄 판결을 받기까지 하였으며 이는 소위 높으신 분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는 장인인 권오석의 창원군당 부위원장 이력 덕분에 정치사상범 변호 초기엔 이러한 일들이 대부분 묵인되었고 아무리 심한 경우라 하더라도 지역 변호사위원장에게 잠깐 질책당하고 말 정도였지만 외가의 지위을 믿고 더욱 열성적으로 변호한 로무현은 결국 높으신 분들의 눈 밖에 완전히 나버리게 되었다. 결국 1985년 조선변호사회 중앙위원회의 압력을 받은 경상남도변호사위원회에 소환되어 매서운 사상총화를 받게 되었으며 변호사직을 일시적으로 정지당하게 되었다.[3]

그러나 로무현은 이 사건을 계기로 반정부에 눈을 뜨게 되어 지하 언론이었던 《부산일보》[4]에 반정부 논펑을 싣게 되며 조선 민주화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정치사상범 변호 문제로 인해 사상총화를 받은 몸인 만큼 당분간 그에게는 일반 경범죄자 변호 업무만이 내려오게 되었지만 그는 이러한 변호 활동과 함께 반정부활동을 병행하였으며 그의 이전 정치사상범 변호 이력과 부산일보에 실린 논평의 그 높은 수준 덕분에 그는 지하세계에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로무현은 지하 언론에 논평을 실을 때 가명 대신 그의 본명을 쓰는 패기를 보여줬으며 이러한 행위로 인해 결국 1987년 중순 그의 반정부활동은 완벽히 들통나게 되었다. 결국 1987년 11월 그는 조선변호사회에서 영구제명을 당하게 되었으며 변호사 자격도 회수당하게 되었다.

그러는 한편 그의 주변 변호사로부터 '당에서 보낸 감시자가 너에게 붙었다'는 말을 듣게 된 로무현은 더 이상 조선 내에서 뭘 하기엔 본인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판단, 그의 가족들도 뒤로 한 채 1988년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나 일본에서도 조총련의 감시망에 들어오게 되어 그는 다시 한 번 미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그는 미국 국적을 취득하고 마이클 로(Michael Roh)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이로부터 평생을 미국에서 지내게 된다.

미국으로의 망명

노벨평화상 수상

노벨평화상을 수상받는 마이클 로

2000년 10월 13일, 노르웨이에 위치한 노벨 위원회(Nobel Committee)는 마이클 로를 '조선 및 동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한 비폭력적 투쟁 전개'를 사유로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할 것을 발표했으며 동년 12월 10일엔 마이클 로가 직접 시상식에 참석하여 노벨상을 수여받았다. 이는 조선반도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선 두 번째로 수여받은 것이며[5] 조선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이들 중에선 사실상 최초이다.[6]

추락사

2009년 5월 23일, 마이클 로는 그와 함께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함께 애리조나주 코치스 카운티의 마드레안 스카이 아일랜드(Madrean Sky Islands) 드라군 산맥(Dragoon Mountains)에 위치한 명물인 오울 록(Owl Rock)을 등반하기로 했다. 이전부터 대담함이 남들과 달리 돋보이던 그였기에 그는 상당히 다이나믹한 루트였던 측면 루트로 오르기를 택했다. 그렇게 오울 록을 등반하던 도중 그를 지탱하던 밧줄이 갑자기 끊어져 600피트 상공에서 추락하게 되었다.

깜짝 놀란 지인들이 곧바로 911을 호출하였으나 드라군 산맥의 험준한 지형과 가장 가까운 병원이 30km나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결국 그는 구급차가 도달하기 전 그 곳에서 사망하게 되었다. 향년 62세.

영결식은 5월 29일 시행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조선 정부의 출국 불허 조치로 인해 전원 참석하지 못했으며 결국 그의 영결식은 조선을 떠난 몇몇 정치적 망명객들과 미국 정치인들, 재미조선인들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영결식 도중 재미동포전국연합회 소속 인원 몇 명이 그에게 분향을 하려고 하자 지난 2008년 미국 하원의원 선거 당시 애리조나주 제6구[7] 민주당 후보였던 레베카 슈나이더(Rebecca Schneider)가 그들에게 "어디서 분향을 해!(How dare you commemorate him!)" 라고 외치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암살?

파장

국내외의 반응

평가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여담

어록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76 - 1987 입당
1987 - 2004 제명
2004 - 2009 입당
사망

저서

  • 《여보, 나 좀 도와줘 (Honey, Help me)》
  • 《진보의 미래 (Future of Prog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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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광주군계 매죽와공파 31세 ○현(鉉) 항렬.
  2. 현재는 따로 마련된 고시를 통해 변호사가 되는 루트가 일반적이지만 그 당시엔 변호사 자격 심사를 통한 중앙위원회의 직접적 허가가 있어야만 가입할 수 있었으며 그 당시 심사위원들은 법률 관련 학과를 나오지 않은 후보들을 일언지하에 떨어트렸기에 그 당시 변호사가 되기 위해선 법률과 졸업은 거의 필수 조건이었다.
  3. 이것도 로무현 외가의 지위로 인해 상당히 감면된 처벌이었다. 일반적인 변호사였다면 진작에 변호사직을 파면당했을 것이었으며 심한 경우엔 그도 정치사상범으로 몰려 재판을 받았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4. 1946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민국 치하 부산에서 발간됐던 지역 신문인 부산일보와는 다른 신문이다.
  5. 조선반도에서 태어난 이들 중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한 이는 크라운 에테르를 발견한 공으로 198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찰스 피더슨(Charles Pedersen)으로 그는 1904년 대한제국 동래부, 현 부산시에서 태어났다.
  6. 그러나 그가 노벨상을 수상할 당시 그는 미국인이었기에 몇몇 이들은 그가 '미국인' 자격으로 노벨상을 수상했다고 간주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한 논쟁은 현재까지도 갑론을박을 이루고 있다. 일단 현재는 그가 노벨상을 받은 최초의 '조선인'이라는 의견이 우세를 점하고 있다.
  7. 마이클 로가 서거한 마드레안 스카이 아일랜드가 위치한 코치스 카운티가 소속된 선거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