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당신들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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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헤 에야차! 에야차!
로동당기발 따라 나가자!
에헤 에야차! 에야차!
로동당기발 따라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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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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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가부주석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박헌영
朴憲永 | Pak Hon Yong
출생 1900년 5월 28일[1]
충청도 대흥군 거변면 신양동 빗돌마을
(現 충청남도 박헌영군 신양리 이정로 379)
사망 1995년 7월 8일 (향년 95세)
서울시 중구역 련건동 서울시 제1인민병원
재임기간 제4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58년 9월 11일 ~ 1962년 9월 12일
제5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62년 9월 13일 ~ 1966년 9월 7일
제6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66년 9월 8일 ~ 1970년 9월 9일
제7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1970년 9월 10일 ~ 1972년 12월 27일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1972년 12월 28일 ~ 1982년 12월 29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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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영해 박씨[2]
부모 아버지 박현주
어머니 이학규
적모 탐진 최씨
서모
형제자매 이복형 박지영
이복누이 박신기, 박간난
배우자 주세죽[이혼]
정순년[이혼]
윤레나
자녀 슬하 3남 2녀
학력 대흥공립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국제레닌학교 (졸업)
종교 무종교 (무신론)
신장 161cm
소속 정당
소속 파벌 남로당파
대의원 선수 9
대의원 기수 1, 2, 3, 4, 5, 6, 7, 8, 9
덕영(德永)
이정(而丁), 이춘(而春)
군사 경력
복무 조선인민군
1950년 ~ 1995년
최종 계급 대원수 (조선인민군)
주요 보직 총정치국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참전 조선전쟁

개요

조선의 초대 국가주석.

약력

  • 1921.3. 고려공산청년회 상해지회 비서
  • 1921.8.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중앙집행위원
  • 1922.3.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4.3.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
  • 1924.4. 동아일보 지방부 기자
  • 1924.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
  • 1924.8. 한양청년연맹 집행위원
  • 1924.9.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 1925.4.17. 조선공산당 창당 발기인
  • 1925.4.18.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 1925.4.18.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9.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
  • 1931.3. 「콤무니스트」 편집위원
  • 1940.2. 「코뮤니스트」 편집책임자
  • 1945.9.3.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 1945.11.5.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명예의장
  • 1946.2.15. 민주주의민족족 공동의장단 의장
  • 1946.11.23. 남조선로동당 부위원장
  • 1947.1. 조선적십자사 이사
  • 1948.9.9. ~ 1951.9.12.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초선 / 남조선 / 남조선로동당)
  • 1948.9.9. ~ 1956.8.30.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김일성 내각)
  • 1950.10.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 1950.11.1. 수도재건위원회 부위원장
  • 1951.9.13. ~ 1954.9.8.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재선 / 조선로동당)
  • 1953.7.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1954.9.9. ~ 1958.9.10. 제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3선)
  • 1956.8.30. ~ 1973.9.1.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56.8.30.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 1958.9.11. ~ 1962.9.12. 제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4선)
  • 1958.9.11. ~ 1962.9.12. 제4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59.6.17. ~ 1978.9.2.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장
  • 1962.9.13. ~ 1966.9.7. 제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선)
  • 1962.9.13. ~ 1966.9.7. 제5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66.9.8. ~ 1970.9.9. 제6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6선)
  • 1966.9.8. ~ 1970.9.9. 제6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0.9.10. ~ 1972.12.27. 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7선)
  • 1970.9.10. ~ 1972.12.27. 제7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2.28. ~ 1982.12.29. 초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
  • 1972.12.28. ~ 1977.12.28. 제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8선)
  • 1973.9.1. ~ 1983.9.3.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총비서
  • 1978.9.2. ~ 1983.9.3.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 1977.12.29. ~ 1982.12.29. 제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9선)
  • 1983.9.3. 조선로동당 중앙고문위원회 위원장

생애

유년 시절

1900년 8월 28일 충청도 대흥군의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박현주(朴鉉柱)는 쌀을 팔던 미곡업자였으며 어머니인 이학규(李學圭)는 작은 주막을 운영했었다. 그의 집은 상당히 부유했으며[4] 그의 어머니는 광산 근처에서 남편이 마련해 준 주막을 운영하여 유년 시절의 그는 먹고 사는데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의 생모인 이학규는 박현주의 첩이었기에 그녀의 자식이었던 박헌영도 서자라는 꼬리표가 붙어 유년 시절의 그는 주변에서 무시와 천대, 핍박을 받으면서 자라왔다.

그의 어머니는 박헌영을 지방 서당으로 보내 한학을 배우게 했다. 당시 박헌영은 기억력이 상당히 좋아 3~4세의 나이에도 글을 쓸 줄 알았다고 한다. 이후 교육제도 개편으로 대흥보통학교 2학년으로 편입되었다. 그 곳에서도 그는 반 24명 중에서 7등을 할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서자라는 이유와 더불어 작고 왜소했던 신체적 이유로 '땅딸보'라고 불리며 놀림과 따돌림을 당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홀로 독서를 하거나 어머니가 운영하던 주막 생채 안방에서 뒹굴거리거나, 동네 개울가에서 소와 함께 놀았었다고 한다.

1915년 대흥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우수한 성적을 바탕으로 경성으로 상경해 자신의 동창 넷과 함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상과반으로 들어가 3학년 155명 중 32등으로 졸업한다. 당시의 그는 키도 체격도 평범했으며 희고 수수한 두루마기 한복을 입고 다녔었는데, 그 흰 한복이 당시 까무잡잡한 박헌영의 얼굴과 대조를 이루어 별명이 '기왓장'이었다고 한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의 그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었다. 당시 중위권 정도였던 그의 성적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어 성적 만큼은 상위권이었었으며 선교사 양성을 목적으로 YMCA에서 진행한 무료 영어 과외에도 꾸준히 참석하여[5] 영문으로 된 소설책을 읽을 정도로 영어능력을 갈고 닦았었다고 한다. 당시 아르바이트까지 병행하며 유학 자금을 모으던 그였으나 결국 자금 문제로 미국 유학은 포기하게 된다.

독립운동가

정치, 시사에 관심이 많았었던 그는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감격하여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엔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파리 강화회의에서 조선 문제를 청원하기 위해 파견된 김규식 일행이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했다는 소식에 크게 분개하였으며 이후 3.1 운동에도 참여하지만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걸려 헌병대에게 끌려가 퇴학 위기까지 맞이하게 된다. 다행히 퇴학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3.1 운동을 계기로 그는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와 독립운동 활동에 몸을 담기 시작한다.

경성고등보통학교를 15기로 졸업한 그는[6] 다시 한 번 미국 유학을 꿈꾸게 된다. 낮에는 막노동판, 공장에 다니거나 잡지사에서 근무하며 유학 자금을 벌었으며 밤에는 YMCA에서 영어공부를 하였고 매주 일요일에는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영어성경 공부를 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열심히였던 그였지만 다시 한 번 서자라는 꼬리표가 그의 발목을 붙잡아 두 차례의 미국 유학 시도는 좌절되고야 만다.

1920년 9월엔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일본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이 시기 박헌영은 당시 재일 조선인 여성 유학생들이 조선의 여성들을 계몽하기 위해 창간한한 여자시론(女子時論)이란 잡지의 기자로도 일했었으나 그는 당시 독립운동으로 인해 경찰에게 쫓기는 처지였던지라 대입시험마저도 치룰 수 없던 몸이었기에 결국 동년 11월에 중국 상하이로 다시 한 번 넘어가게 된다. 상하이로 넘어간 그는 그 곳에서 김설야, 임원근과 같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우를 다져갔다. 상하이에서 그는 고려공산청년회 상해지부 비서를 거쳐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여 '가장 위대한 영도자'라는 칭호까지 얻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야만 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으며 이렇게 해방된 조선에 소비에트를 세워 최종적으로는 소련의 가맹국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총장을 지내던 김구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921년 고려공산당 사회주의연구소의 직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상하이로 유학 온 주세죽과 그 곳에서 결혼하였다. 이후 그는 동년 8월 베이징에서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1922년 3월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로 선출되었다. 동년 1월엔 여운형, 김규식, 이동휘, 김단야 등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도 한다. 모스크바에서 사상을 더욱이 공고히 한 그는 코민테른의 조선공산당 조직을 지시받고 국내로의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중국 안동현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혀 조선으로 압송되어 1년 10개월 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된다. 1924년 1월 출소 이후엔 동년 2월에 개최된 신흥청년동맹 결성식에 참석하였으며 기존에 상하이에서 만난 주세죽과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땐 그 하위조직으로 편입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재선출되었다.

4월엔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서의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허헌의 추천으로 입사한 그는 지방부 기사로 활동하였으나 1년 후 그는 조선총독부의 압박으로 해고당하게 된다. 이후 그는 조선일보에 입사하였으며 같이 입사한 김단야, 임원근과 어울리며 '화요3인방'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된다. 당시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였지만, 당시 유광렬 조선일보 사회부장은 그를 선정적인 기사도 쓰지 못하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수줍음이 너무 많이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였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그는 말재주도 좋지 못했고 검은 피부에 면도도 하질 않아 '털보'라고 불리기도 하였으며 옷도 허름하게 입고 다니고 동료 기자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았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동료였던 김단야, 임원근도 비슷했다고 한다. 이후 박헌영은 '노국(露國, 러시아)과의 정치적 관계'라는 제목의 논설문[7]을 문제 삼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에 휘말려 1925년 10월 15일 당시 동료였던 김단야, 임원근을 비롯한 16명의 진보적인 기자들과 함께 조선일보에서 해고당하게 된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으로 인해 아내인 주세죽과 함께 신의주에서 경찰에 연행된다. 다행히 주세죽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지만, 박헌영은 신의주에서 경성으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는데 이 시기 박헌영은 일제에게 끔찍한 고문들을 당한다.

일제 경찰은 연행된 사람으로부터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냉수나 혹은 고추가루를 탄 뜨거운 물을 입과 코에 들이붓거나 손가락을 묶어 천장에 매달고 가죽채찍으로 때리거나 긴 의자에 무릎을 꿇어앉힌 다음 막대기로 관절을 때리거나 한다. 7~8명의 경찰들이 큰 방에서 벌이는 축구공놀이라는 고문도 있다. 이들 중 한 명이 먼저 '희생양'을 주먹으로 후려치면 다른 경찰이 이를 받아 다시 또 그를 주먹으로 갈겨댄다. 이 고문은 가련한 '희생양'이 피범벅이 되어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다.
박헌영의 회고

이후 그는 6.10 만세운동의 배후로 몰려 다시 한 번 고문을 받게 된다.

1927년 9월 13일 박헌영은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는 재판에서 '공산주의의 목적은 해방의 정의와 실현'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며 동료였던 박순병이 고문으로 순국했다는 소식을 듣자 박순병을 살려내라며 재판관에게 달려드는 등의 난동을 부리다 끌려나갔다. 9월 20일 비공개로 진행된 공판에서도 그는 재판관에게 안경을 던지며 박순병을 데리고 오라며 소리쳤으며 이로 인해 공판은 10분도 채 안되어 중단되게 된다. 11시 30분 다시 한 번 진행된 공판에서도 박헌영은 여전히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간수들이 그를 포박하고 신경안정제를 투여한 이후에서야 공판을 지속할 수 있었다. 결국 9월 22일 진행된 제5회 공판에서 박헌영은 배제된 채로 진행되었다.

끊임없는 고문과 동료들의 죽음 등으로 인해 이 시기 박헌영의 정신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고 한다. 이 시기 박헌영은 벽을 보고 대화를 시도하거나 식음을 전폐한 채 혼잣말을 중얼거리거나 사람의 얼굴을 보자 공포의 질린 얼굴을 하다 얼마 안 가 히죽대기 시작하거나 인분을 벽에 바르거나 먹기도 하고 수도 없이 자살을 시도하는 등 정신적으로 온전치 못한 모습을 보여 박헌영은 결국 1927년 11월 15일 병보석으로 출소한다. 병보석으로 출소한 이후에도 그는 주세죽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며 요양을 위해 고향에 내려간 후에는 아버지와 이복 형인 박지영에게 욕설을 퍼붓는 등의 정신이상적인 행보를 계속 보였다. 그를 진찰한 정신과 의사 김탁원은 그가 회복하기까진 오랜 기간이 걸릴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하였으며 그의 동창이자 친구이기도 했던 시인인 심훈은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일제에게 크게 분노하여 조선일보에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기재하였다.

그는 고향에서 아내와 어머니가 가져다주는 죽으로 생명을 연장했으며 조선총독부의 감시 아래에서 의사의 왕진을 받았다. 이후 그는 요양을 위해 함경남도로 내려왔으나 주세죽의 고향인 함흥에서 아내와 갑자기 사라져 블라디보스토크로 비밀리에 도주하였다. 이후 모스크바로 떠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에서 주세죽은 그녀와 그의 첫 자식인 박 비비안나(본명: 박영)를 낳게 된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 박헌영·주세죽 부부는 김단야와 고명자의 환영을 받으며 모스크바에 정착하게 된다. 이 시기 박헌영은 소련공산당에 가입하고, 국제레닌학교에 입학하여 사상적 전망을 정리하고 확대하였으며[8] 주세죽은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하며 박영을 길렀다. 국제레닌학교에서 박헌영은 후일 베트남의 지도자가 되는 호찌민과의 인연을 기르기도 했다.

국제레닌학교 재학 당시 박헌영[9], 1929년

모스크바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그는 조선공산당의 해산 이후 조선 내 사회주의 운동을 지도하던 최고기관인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 중 하나로 선출되는 등 그는 언제나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전선의 최전방에 서 있었다. 1929년 11월 3일에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벌어지자 일제는 박헌영을 이 운동의 배후로 지목, 체포령을 내렸으며 이로 인해 박헌영은 1931년까지 귀국을 뒤로 미루게 된다. 3월에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을 지휘하라는 지시를 하달받고 박영을 모스크바 근처에 위치한 이바노바시에 있는 스타소바 고아원에 맡긴 채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10] 이 시기 박헌영은 김형선을 통해 국내로의 접촉을 시도했으며 잡지 「콤무니스트」를 국내로 밀반입시켰다.[11]

1932년 4월 박헌영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소식을 듣자 이를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행위'라고 하며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후 동년 7월엔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홍커우 공원 의거를 다시 한 번 더 다루었는데,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던 것이다.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인해 일제의 감시가 더욱 삼엄해지자 박헌영은 '이두수'라는 가명으로 활동을 이어갔으나 결국 1933년 7월 5일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당하게 된다. 당시 그를 체포한 일본 영사관은 '김단야로 추정되는 인물이 7월 5일 아침 7시부터 8시 30분 사이에 공동조계의 북경로와 강서로 교차로 부근에서 누군가와 접선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에 일본 경찰은 공동조계 경찰의 협력을 얻어 문제의 장소 부근에 잠복했다. 아침 7시 45분 교차로 북쪽 귀퉁이에서 서성거리는 의심스런 사내가 잠복 경찰의 눈에 띄었다'고 이를 기록하였다. 이후 박헌영은 경성으로 압송되었으며 6년형을 선고받았으나 가석방으로 5년만 형을 지낸 채 1939년 9월에 출소한다.[12]

1937년 초에는 김단야, 주세죽과 함께 모스크바에 주재하던 조선계 공산주의자인 이성태로부터 모함을 받게 되었다. 그는 화요회 출신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상신서'를 작성하여 이를 코민테른으로 보냈다. 상신서에는 박헌영이 친일파의 자손이며 그의 아버지와 큰형은 일진회에 소속된 인물이고 다른 형은 아편에 중독된 일제의 일정이라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그를 옹호하던 조선계 공산주의자들의 변호로 모함에서 벗어나게 된다.

출소 이후엔 이관술이 이끌던 경성콤그룹에 합류한다.[13] 경성 트로이카에서 활동하던 이관술, 이순금, 김삼룡이 1939년 1월에 결성한 경성콤그룹은 그들이 속해 있던 이재유 그룹, 권영태 그룹, 이주하 그룹 등 수 개로 분열된 콤그룹을 한꺼번에 통합한 국내파 사회주의, 공산주의 독립운동가의 최후의 보루와도 같은 단체였다.[14] 영입 이후 박헌영은 1940년 2월부터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에 올라섬과 동시에 기관지였던 「코뮤니스트」의 편집책임을 맡았으며 직접 편집을 지도하였다. 이 기간에 박헌영은 동지 정태식의 5촌 조카인 정순년과 부부의 연을 맺었으며 1941년 3월엔 둘 사이에 아들 박병삼이 태어난다. 이후 박헌영이 피신을 간 동안 둘은 헤어지게 되고 정순년은 이순금, 정태식의 보호를 받던 도중 그녀의 친정아버지에게 강제로 끌려간다.

1941년 경성콤그룹의 조직이 발각되어 총독부로부터 검거령이 내려지게 된다. 이로 인해 경성콤그룹의 주요 인물인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체포되었다. 박헌영은 조선총독부의 검거를 피해 대구를 거쳐 광주로 피신했다. 그 곳에서 박헌영은 '김성삼'이라는 가명의 벽돌 공장 노동자로 은신하여 경성의 소련 영사관과 비밀 교신을 주고 받았다.

해방정국 시기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조선은 독립을 맞이하게 된다. 일제의 항복과 조선의 독립 소식을 듣게 된 박헌영은 곧바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목탄차를 얻어 타 대구로 출발했으며 그 곳에서 막 출소한 김삼룡과 합류하고 경성으로 도착했다. 박헌영은 이 당시를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을 맞이했다'고 회고했다. 서울로 상경한 이후 박헌영은 1945년 8월 19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조직함과 동시에 8월 20일 초안을 작성 및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 제출, 9월 20일 수정 및 보충을 마쳐 1945년 9월 25일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제목의 논설문, 일명 '8월 테제'를 발표한다. 이 8월 테제는 후일 조선의 주요 통치 이념이 되는 박헌영주의의 주요 핵심 사상을 담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박헌영이 조직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이하 재건파는 기존의 경성콤그룹 뿐만이 아니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의 지시로 조직된 각종 공산주의 그룹 등 대부분의 계파를 흡수하였다. 한편 이영으로 대표되는 서울파와 리승엽으로 대표되는 화요파, 최익한 등으로 대표되는 ML파는 박헌영이 재건파를 조직하기 직전인 8월 16일 서울 장안빌딩에서 독자적으로 장안파 조선공산당을 조직하였으나 9월 8일 개최된 열성자대회에서 대부분의 좌익 계파들이 박헌영의 재건파를 지지하면서 장안파는 그 조직이 완전히 와해되어 결국 재건파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렇게 설립된 재건파와 박헌영은 중도좌파 노선을 타고 있던 여운형과 협력하여 8월 20일부로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후 박헌영은 1945년 9월 3일 공식적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해 책임비서직에 오르게 되는데 이렇게 건준에 합류하게 된 조선공산당은 차츰차츰 건준의 조직을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재건파의 건준 접수 시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 하나가 존재한다. 박헌영은 건준 합류 이후 여운형에게 찾아가 '건준의 간부들 속에 민족주의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경화할 위험이 있으니 개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에 여운형은 '이 문제는 혼자 결심할 일이 못되니 토론해야 한다'고 대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공산당의 건준 접수 시도는 김병로 등을 끌어들인 안재홍 계열의 맹렬한 반발과 견제로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

박헌영과 여운형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오늘날 민주주의 조선을 건설함에 있어 구태여 빛깔을 문제삼을 필요가 어디 있느냐. 모두가 합력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면 그만이 아니겠느냐... 조선인민공화국이라면 적색으로 아는 사람은 소학교 1학년과 같은 사람이라 할 것이다. 갈라지면 넘어지고 뭉치면 일어선다. 한민당·국민당·건국준비위원회 등이 손을 잡고 국민 총력을 집결해야 하며 이것을 인민 대중은 원하고 있다. 그리고 사대주의 배외사상은 절대로 배격해야 한다.
여운형, 우익을 비롯한 각 계파의 협조를 호소하며

9월 6일엔 곧 진주하게 될 미군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각 지방의 건준 지부를 인민위원회로 전환하고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건국을 선포한다. 이러한 건국 선포에 박헌영이 여운형과의 합의 없이 독단으로 선포했다는 설이 퍼져있기도 했으나 내각 인준 자체는 여운형과 박헌영이 합의하여 나온 산물이었으며 건국 선포 자체는 박헌영이 독단적으로 벌인 행위는 맞으나 이에 여운형은 큰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한편 조선인공 건국 이후 건준은 더욱 좌경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좌경화에 반발한 이승만은 그들이 추대한 주석직에 취임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다른 우익 인사들도 이러한 건국 선포를 비판했다. 심지어 몇몇 좌익 계열 인사들도 이승만, 김구, 김성수 같은 인물이 내각에 인선된 것에 대해 이를 우편향 정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들어선 미군정은 이러한 조선인민공화국, 인민위원회를 비롯한 조선인의 자치 활동을 금지하며 이러한 조직의 정당으로의 전환을 요구하였다. 이에 박헌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합작을 모색하나 임정의 미온적 태도로 이러한 합작은 무산된다. 당시 임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조직, 직책을 유지하는 대신 이후 신설될 2~3개의 부서를 좌익 계열이 맡을 것을 제안했다. 이후 박헌영은 12월 12일 서울신문에 '망명정부에 대하여'라는 논평을 발표하여 임정을 '망국정부' 임정 인사를 '망국인사'라고 칭하는 등의 비판적 모습을 드러내며 결국 양측간 합작은 무산된다.

이렇게 조선인공이 해산된 이후 박헌영은 반(反)종교 강의를 다니면서 기독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들에 대한 견해를 여실 없이 드러냄과 동시에 좌익 정당,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각종 좌익 계열 단체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한편 박헌영을 비롯한 재건파는 10월 귀국한 이승만과 접촉하기 시작했는데 귀국 직후 이승만은 "본인은 공산당과 공산주의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후일 정책을 수립할 때 공산주의의 여러 점을 채용하겠다"고 라디오로 발언할 만큼 공산당과 그 이념에 대해 긍정적의 사견을 표하기도 했으며 이승만이 이끌던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조선공산당을 비롯한 재건파가 합류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은 친일파 처리 문제를 놓고 대립하여 결국 박헌영과 이승만 간의 합작도 박헌영과 재건파의 독촉 탈주로 인해 깨지게 되었다.

박헌영은 초기엔 형식적으로나마 우익 계열과 친하게 지내려고 시도는 하였다. 1945년 9월 7일 송진우 등이 조직한 국민대회준비위원회 결성식에 찾아가 축사를 해줬으며 9월 16일 국민대회준비위원회의 회원들이 연합하여 만든 정당인 한국민주당의 창당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 미군정과도 우호적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박헌영은 10월 27일 군정장관 존 하지과의 회담에서 '친일파와 민족반역자들을 배제한 상태에서 진보적인 민주주의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조선공산당의 정치노선이 미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고 주장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후일 신탁통치 반대 운동으로 인해 형식적으로나마 협력하려던 그런 모습도 결국엔 없어지게 되었다.

한편 박헌영은 9월 19일 청진을 통해 귀국한 김일성과 10월 10일 개성에서 비밀 회담을 나눴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해당 회담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치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리게 되었는데 이북을 주 거점으로 삼고 있던 김일성은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주장하였으나 스탈린주의의 일국일당 원칙을 고수하길 원했던 박헌영은 북조선분국의 설치를 반대하였다. 그러나 결국엔 박헌영이 한 발 뒤로 물러서 북조선분국의 설치에 합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북조선분국은 후일 현 조선의 집권 정당이 되는 조선로동당의 조직적 전신이 된다.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신탁통치 사안과 관련하여 잘못된 정보를 보도하는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발발한다.[15] 이 오보는 후일 조선반도에 첨예하게 대립할 좌우간의 갈등을 고조시켰지만 오보 직후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 반대 성명을 냄과 동시에 이관술은 존 하지와 대담하여 신탁통치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밝혔으며 박헌영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信託統治反對國民總動員委員會)를 조직하여 해당 단체의 중앙위원이 되는 등 이들은 초기에 신탁통치에 대한 반대 의사를 강력하게 밝혔다. 이러한 움직임은 우익에서도 똑같이 벌어졌으며 오히려 좌익이 더 과격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1946년 1월 3일 박헌영은 갑자기 신탁통치 반대(이하 반탁)에서 신탁통치 찬성(이하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이러한 입장 선회에 대해선 박헌영이 1월 2일 소련 서울 영사관 부영사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샤브신(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Шабшин)으로부터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 때문으로 추정하고 있다.[16] 1월 5일 박헌영은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본인의 찬탁 입장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다만 박헌영은 해당 기자회견에서 "소비에트 조선이 언제 될지 모르지만, 가령 된다 해도 소비에트 조선은 언제나 독립국이오"라고 발언하여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의 음해를 단번에 일축한다.

박헌영은 찬탁 입장을 밝혔지만 이러한 신탁통치 문제를 우익 진영과 합리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박헌영은 1946년 1월 8일 조선인민당, 한국국민당, 한국민주당 3당과 함께 '4당코뮈니케'를 발표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한민당 보수파의 반대로 하루만에 무산된다.

조선의 2인자 박헌영

허가이와의 불편한 공존

조선의 최고권력자

사망


박헌영의 서거를 알리는 KCTV의 방송

장의위원회 구성

평가

위대한 수령 박헌영동지께서는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시고 항일혁명투쟁을 조직령도하시여 영광스러운 혁명전통을 마련하시고 조국광복의 력사적위업을 이룩하시였으며 정치, 경제, 문화, 군사분야에서 자주독립국가건설의 튼튼한 토대를 닦은데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전문 中

박헌영은 국내외에서 진영과 국가 별로 매우 극명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일례로 조선에서는 헌법 전문에 그의 행적과 사상을 계승한다는 조항이 삽입될 만큼 극찬 일색이지만 해외에서는 베트남의 호찌민처럼 명과 암이 굉장히 명확한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조선에서의 박헌영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평생을 바쳐가며 독립운동한 독립투사이자 현대 조선의 기초적인 경·중공업의 기반을 다져 조선을 현재와 같은 위치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며 이념에 휘둘리지 않는 실리 외교를 통해 조선이 이끌어낼 수 있는 최대한의 이익을 이끌어낸 용명한 정치인, 개인적으로도 청렴하고 소박한 면모를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위인 중의 위인, 명실상부 조선의 국부로 평가받고 있다.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듯 박헌영은 조선의 건국을 주도하고, 생전 공산주의 국가들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던 스탈린을 칭했던 경칭인 수령(守令)으로 불리는 유일한 인물이다.[17] 박헌영이 아닌 강성산, 홍성남과 같은 전임 국가주석들과 현임 국가주석인 최룡해는 령도자(領導者)라는, 수령보다 격이 낮은 표현으로 본인들을 칭하였다. 이는 마치 중국인들에게 위대한 영수(伟大領袖)로 불리는 마오쩌둥, 베트남인들에게 호 할아버지(Bác Hồ)라고 불리는 호찌민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수령이라는 칭호에 더욱 사족을 붙인 위대한 수령, 유교가 크게 영향력을 끼치던 리조시대와 왜정시대를 겪은 노인들에겐 성군이라는 표현까지 쓰이기도 한다.

한편으론 박헌영은 본인이 김일성의 통치가 점점 일인독재 개인숭배로 이어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다른 비(非)만주파 계파들과 협력해 8월 종파사건을 일으켜 김일성을 실각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972년 그와 함께 김일성 실각에 기여한 소련파, 연안파 등을 숙청시켜 본인의 권력을 공고화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며 이로 인해 약 20여년 간 각 계파 간의 견제와 비판으로 돌아가던 비교적 민주주의적이었던 과두정 체제가 종식, 현재와 같이 소련, 중국을 비롯한 여타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권력의 국가주석직이 탄생하게 되었다.[18]

이와 더불어 개신교인을 비롯한 수많은 종교인들과 조선사회민주당과 같은 야당을 강제로 탄압하기도 하였고 조선전쟁 당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재임하면서 김일성과 함께 대한민국을 향한 남침을 계획한 전범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내 남로당 조직과 빨치산의 궐기를 호소하며 그들의 전쟁 범죄를 묵인하였으며 주석직에서 퇴임하기 직전까지도 제주 정복 야욕을 버리지 못해 제2차 거제 상륙작전, 진도 포격전을 비롯한 각종 국지전을 일으키고 지속적으로 제주에 공작원을 내려보내 인근 해안가의 제주인을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게 하였다.

긍정적 평가

부정적 평가

성격

사상

박헌영주의

일명 우리식 사회주의. 조선 현지상황에 맞춰 기존의 사회주의 이념을 개조시킨 박헌영식 사회주의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여담

  • 주막을 경영하던 모친에게서 영향을 받아 요리를 굉장히 잘했다고 하며 뛰어난 미식가이기도 했다고 한다. 요리에 특히 자부심이 있었는지 자주 조리실에 찾아가 본인의 식사를 조리하는 주방장들에게 자주 조언훈수을 하곤 했다고 한다. 여기에 더불어 술과 담배와 같이 건강을 해치는 것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식습관이 그의 장수에 크나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 집무실에서도 틈틈히 독서할 정도로 독서를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공산주의 관련 서적은 물론 역사 서적과 문학 서적 등 두루두루 읽었다고. 주석이 된 이후에는 세계 각국의 도서를 수집하였는데 그 중에는 심지어 제주에서 발간된 도서도 있었다고 하며 4.3 사건제주 계엄령을 다룬 단편 소설인 《순이 삼촌》을 집필한 현기영 작가가 방조하여 그의 고향을 찾았을 당시 그는 현기영의 소설을 재밌게 읽었다고 소감을 밝히며 그와 책 내용을 두고 토론까지 벌였다고 한다.
  • 다중 언어를 구사하였다. 조선어는 기본이었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영어 공부에 열중했던 덕에 영어도 수준급으로 구사했다. 이 외에도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다만 이 중에서 러시아어는 초급 수준으로 나머지와는 다르게 그렇게 잘하지는 못했는데 오히려 박헌영은 러시아어보다 더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었던 일본어를 싫어했다고 한다. 리조 말기에 태어나 서당을 다녔던 사람인 만큼 한문도 잘 썼다.

가족 관계

  • 조부 박홍원 (1839 ~ ?) / 조모 전주 이씨 (1838 ~ ?)
    • 백부 박현정 (1858 ~ 1933)
      • 사촌형 박건영 (1890 ~ 1955)
        • 조카 박병일 (? ~ 1950?)
    • 아버지 박현주 (1867 ~ 1934)
    • 적모 탐진 최씨 (1872 ~ 1912)
      • 이복형 박지영 (1891? ~ 1946?) / 妻 장기례 (1891 ~ ?)
        • 조카 박병석 (1922? ~ ?) / 妻 이경용 (? ~ ?)
      • 이복누이 박신기 (1905 ~ ?)
  • 진외증조부 이일석 (? ~ ?)
    • 생모 이학규 (1867 ~ 1943)
      • 본인 박헌영 (1900 ~ 1995)
      • 본처 주세죽 (1901 ~ 1953)
        • 장녀 박연 (1928 ~ 2013) / 妻 빅토르 마르코프 (? ~ 2003)
      • 이처 정순년 (1922 ~ 2004)
      • 삼처 윤레나 (192? ~ 2007)
        • 차녀 박 나타샤 (? ~ ?) / 妻 장성택 (1946 ~ )
        • 차남 박 세르게이 (1952 ~ ?)
    • 서모 (? ~ ?)
      • 이복누이 박간난 (1912 ~ 1913)
    • 숙부 박현세 (1872 ~ 1919)
      • 사촌동생 박자영 (1916 ~ 1950)
    • 고모 (? ~ ?) / 妻 신석종 (? ~ ?)

어록

이민위천(以民爲天), 이신작칙(以身作則)
사람을 하늘처럼 여긴다, 자기 몸으로써 원칙을 삼는다
우리 당은 말하는 당이 아니라 일하는 당이며 투쟁하는 당이다. 당을 위해 조국이 있는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하여 당이 있는것이다.
조선로동당 제6차대회 개회사에서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인민경제와 사회가 바탕이 된, '자주독립된 조선의 창건' 그것이 본인의 소망의 전부다.
1963년 제2차 7개년 계획을 지도하며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1966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내부 회의에서
토지가 인민이라면, 당이란 비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종자는 조선인민의 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의 실현이 될 것이다.
1971년 신년사에서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조선로동당 제8차대회 개회사에서[19]
혁명전사가 되시오, 자랑스런 혁명전사 말이오!
1986년 박헌영종합대학 건학 40주년 기념사에서[20]

각종 매체에서

영화

  • 2010년작 영화 <이정>에선 1920년대부터 1945년까지 박헌영의 독립운동가 시절 일대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배우 ○○○이 박헌영 역을 맡았다.

소설

게임

방송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고려공산당 로고타입.png
1921 정계 입문
1921 - 1925 해산
1925 - 1928 입당
1928 - 1929 해산
1929 - 1934 입당
1934 - 1939 체포 후 일시 정계 은퇴
1939 - 1941 창당
1941 - 1945 해산
1945 창당
1945 건준 참여를 위한 탈당
1945 입당
1945 - 1946 해산
남조선로동당 로고타입.png
1946 - 1949 입당
1949 - 1995 합당
정계 은퇴
사망

저서

둘러보기

박헌영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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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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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수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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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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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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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제4-7대 제8-11대 제12·13대
김두봉 박헌영 김영주 리만섭
제14·15대 제16·17대 제18대
김영남 김진표 박형준
최고인민회의 의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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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역대 조선 외무부장 (당신들의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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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보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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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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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위원장 겸 제2비서)
5위 6위 7위
김영주
(조직지도부장)
박창옥
(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최창익
(부수상 겸 재정상)
8위 9위 10위
최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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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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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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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애
(부위원장)
←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제2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 (제3기) →

책임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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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김재봉 강달룡 김철수 안광현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김준연 김세연 차금봉 박헌영
조선로동당 지도자

선정 조선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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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N년 조선의 신문 로동신문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조선인'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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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 세종 리순신 리승기 강성산
6위 7위 8위 9위 10위
안중근 류경수 장영실 리극로 변월룡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공산주의
[ 이념 전반 ]
[ 이념 전반 ]
분파 마르크스-레닌주의
현실사회주의 · 카스트로주의 · 호자주의 · 호찌민 사상 · 박헌영주의 · 마오주의(마르크스-레닌-마오주의)

볼셰비키-레닌주의
파블로주의 · 신트로츠키주의(클리프주의) · 제3의 진영 · 포사다스주의

자유지상주의적 공산주의
룩셈부르크주의 · 좌파공산주의 · 사회적 아나키즘 · 자율주의

그 외: 서구 마르크스주의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 국민공산주의 · 기독교 공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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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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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된 국가

파리 코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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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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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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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잠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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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
·

에티오피아
·

베냉
·

콩고
·

소말리아
조선
관련 문서

  1. 음력 5월 1일.
  2. 태사공파 예산문중 56세손 ◯영(永) 항렬.
  3. 이혼
  4. 당시에는 귀한 신문물이었던 자전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5. 첫 강의 당시엔 50여명이 참여했었으나 마지막엔 박헌영 혼자 남아 수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
  6. 3.1 운동으로 당시 뒤숭숭했던 사회 분위기로 인해 졸업사진도 못 찍은 채로 졸업했다고 한다. 교장이 학생 개개인을 따로 불러 독립운동 참여를 꾸짖고 졸업장을 수여하는 방식으로 졸업했다고.
  7. 사회주의 계열의 신일용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기재했던 논설문으로 소비에트의 도움을 받아 조선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이었다.
  8. 이 시기에 박헌영은 '인민의 고무래' 라는 뜻의 이정(而丁)을 호 겸 가명으로 삼기 시작했다.
  9. 맨 앞 줄 가운데가 박헌영이다. 사진을 기준으로 왼쪽이 김단야, 오른쪽이 양명. 호찌민은 뒷줄 맨 오른쪽에 서 있다.
  10. 이 때문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거의 없던 박 비비안나는 자신을 여태동안 고아라고 생각하며 자랐었다고 한다.
  11. 「콤무니스트」는 1933년 7월호까지 발간되었으며 이후 일제에게 발각당해 발간이 중지된다.
  12. 이 기간 동안 그의 아버지인 박현주는 사망하였으며 아내였던 주세죽은 김단야와 재혼하게 된다.
  13. 박헌영 영입 당시 이관술은 그에게 이현상을 보내 박헌영에게 항일투쟁 의사가 여전히 존재하는지 꾸준히 시험했다고 한다.
  14. 이들은 이후 박헌영과의 연락 두절과 독립운동가들의 대거 구속이라는 열약한 환경에 처하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 자유와독립그룹, 조선건국동맹 등과 함께 무장투쟁을 지속하면서 광복 직전까지에도 항일투쟁을 계속한다.
  15. 해당 기사에서는 소련이 신탁통치, 미국이 즉각독립을 주장했다고 나와있으나 실제로는 소련이 즉각독립, 미국이 신탁통치를 주장했다.
  16. 샤브신의 아내인 파냐 이사코브나 샤브시나(Фаня Исааковна Шабшина)는 그 당시의 박헌영이 ' 찬탁 명령을 못마땅해했다'라고 증언했다.
  17. 다만 김일성이 1950년대에 본인을 향한 우상숭배를 진행할 무렵 잠시 본인을 수령이라 칭한 적이 있긴 하다.
  18. 정확히 말하면 그 권력의 대부분은 중앙인민위원회의 이름으로 행사되지만 조선 국가주석은 중앙인민위원회의 수위를 당연직으로 맡기 때문에 이는 사실상 말장난에 불과하다.
  19. 이후 그의 뜻은 후임인 강성산신사고정책을 통해 이뤄지게 된다.
  20. 해당 기념사 일부가 녹화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