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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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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인민공화국 滿洲人民共和国 | Мaнжү Йркэжн Гүнгxэү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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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인터나쇼날 (당가) 인민혁명가 (국가) | ||
수도 | 하르빈 (1945~1947)[4] 장춘 (1947~1950)[5] 묵던 (1950~1993)[6] | ||
총 인구 | 약 61,000,000명(1990) | ||
정치 체제 | 사회주의, 인민민주주의, 공화제 (과두정), 민주집중제, 일당제, 중앙집권제, 국가무신론 | ||
집권정당 | |||
최고주권기구 | 통국인민평의회 통국인민평의회 상임간부평의회 | ||
역대 주석 [국가원수] |
초대 고숭덕(高崇德) 2대 마점산(马占山) 3대 장학사(长学思) 4대 주덕해(朱德海) 5대 부작의(傅作义) 6대 풍중운(冯仲云) 7대 량경춘(狼庆春) | ||
주요 국무상·의상 [정부수반] |
고숭덕(高崇德) 풍중운(冯仲云) 위승민(魏拯民) 최용건(崔庸健) 김일(金一) 진운(陈云) 팽진(彭真) 협공서(叶贡书) | ||
주요 서기장 [공산당 지도자] |
고숭덕(高崇德) 리홍광(李红光) 주보중(周保中) 왕금상(汪金祥) 장문천(张闻天) 리입상 (李立三) 김책(金策) 백학림(白鹤林) | ||
주요 군사위원장 [군통수권자] |
고숭덕(高崇德) 우천방(于天放) 주보중(周保中) 조상지(赵尚志) 리조린(李兆麟) 오란부(乌兰夫) 요요상(廖耀湘) 허형식(许亨植) 남해봉(南春凤) | ||
국어 | 만주어[11][12][13] | ||
문자 | 키릴문자[14][15], 한문[16] | ||
경제 체제 | 초기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토지국유제, 집산주의 후기 사회주의적 국가자본주의 | ||
총 GDP | - | ||
1인당 GDP | - | ||
통화 | Ҵ | ||
이중가격통화[17] | ¥ | ||
국제연합 가입 | 1945년 10월 24일[18] |
만주공산당 중앙당사의 로비 그림[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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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만주 인민 공화국은 만주 민주 공화국의 전신으로, 1945년 4월 15일에 건국되어 1993년 11월 15일에 멸망한 일당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중화민국때 봉천군벌출신과 지식인이 모여 만든 만주임시정부가 만주사변으로 해산된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과 중국공산당의 후원으로 설립된 항일조직이자 사회주의혁명조직인 만주공산당이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일본제국이 패망 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만주를 점령 후 만주 군정청이 설치되었고, 모택동은 중국에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은 그를 신뢰하지 않고 신용을 사고있던 고숭덕과 만주공산당을 위시로 해 민간으로 이양받아 건국된게 만주 인민 공화국 이다.
초대 주석은 고숭덕으로 21년동안 죽기전까지 집권한 독재국가였으며, 이후 혁명원로들이 주석을 지내다가 량경춘 (니어후루 아이싱가)의 민국개혁파의 집권으로 인해 정권쿠데타로 민국천명이 이루어진 후 건국회의로 그 주권이 넘어가게 되었고, 1993년 11월 15일, 만주 민주 공화국이 건국되며 국헌(헌법)은 완전히 효력을 상실하여 멸망하게 되었다.
정치체제는 고숭덕의 사망 이후 집단지도체제로 국면이 전환되었으며, 쟁쟁한 혁명원로들을 분산시키기 위한 주석, 서기장, 국무상, 군사위원장직이 분산된 탓에 권력의 집중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에[20] 정치에 잡음이 많은 국가이기도 했다. 주된 정계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이들로, 중국에서 일어난 문화대혁명 시기 지식인들의 피난처가 되기도 하였으며, 중화민국의 잔재를 파괴하지않고 흡수해 다양한 지식계층이 존재하는 국가였다. 건국 초기 중국과는 서로 지도부가 교류할만큼 사이가 돈독하였으나, 마오쩌둥의 독재와 문화대혁명의 바람이 불자 중국만큼이나 돈독한 관계였던 몽골인민공화국을 통해 피난민들을 수용하였고, 이로 인해 유혈국경분쟁이 일어났을 정도로 사이가 악화되었고, 소련의 중재로 중단과 개시가 반복되었다.
한국전쟁시기, 부인·진단·제노대학의 망명을 수용하고 사회주의 실현 방향에 대한 노선차이, 중국에서의 망명을 수용하는 등 마찰로 인해 한반도 침공에 협조하지 않았고, 전쟁 초반엔 공산권연합으로 평양 가까이 진격하였으나,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만주 수복의지를 들어내는 편지가 전달된 사실을 첩보로 확인받자, 철군과 보급로를 끊고선, 평양 점령 직전에서 패퇴하자 중국은 예정하던 대만침공을 불가할 상황에 처했고, 마지막으로 서해상륙을 하였으나 실패하자 3자영수회의[21]를 통해 대만침공까지 진군을 무르기로 하였고, 평양점령 후 휴전의사를 전달하였고 그새 중국이 대만을 점령에 성공하였으나, 평양에선 결국 패퇴하였고 그렇게 무야무야 전쟁은 종전되었다.
주로 정계의 우두머리급은 정치원로라 할만한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 조선족 한족 만주족이 대부분이었고 최고에 오른 사람들은 주로 조선족과 한족이었다. 다만 절대다수의 만주족이 있었고 대부분의 지방조직은 만주족이 자리를 맡고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여러민족이 공산당을 통해서 공존하는 기묘한 공생관계가 존재했다. 민족주의를 철저히 배격한 정책의 성공사례라고 평가받기도 하다.
정치나 사회문화는 중국과 유사하지만 중화민국, 소련의 형태가 융합되었고 봉건적인 요소들을 용인하는 등, 지식인에 대한 유화정책이 기조로 자리잡고 있었다.[22] 이외, 인민복이나 양복보단 중산복이 주로 선호되었고[23] 이는 만주 민주 공화국의 남춘봉 때까지 이어지는 정치계의 전통이 되었다.
각주
- ↑ "Йркэжн"(이르건)은 사람, 인민, 민주주의란 뜻을 지니고 있다. 본질적으론 사람을 의미한다.
- ↑ 아편퇴치운동과 같이 조직된 운동으로, 전국적으로 식인풍습, 노예, 매음굴 등 각종 반사회적이거나 봉건잔재에 해당하는 것들을 몰아내는 운동이었다. 정치적 목적보다는 혼란한 사회를 이용한 범죄자들을 몰아내는데 일조했고, 이때 잡힌 유명한 산적이 바로 니탕개. 인육을 공급하던 산적으로 사형 후 효시되었다.
- ↑ 아편을 퇴치한다는 명목 하에 반체제인사색출과 범죄자 색출을 목적으로 한 사업이었다.
- ↑ 하르빈은 소군정만주때 사령부가 있는 곳이었고, 소련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다.
- ↑ 천도를 처음엔 묵던으로 하려 하였으나, 묵던의 재건때까지 잠시 머무르기로 하였다. 장춘은 과거 만주국시절 신경(新京)이라 불렸기 때문에 국무위원회만 천도하였고 국헌을 개정하진 않았다.
- ↑ 장춘에서 천도 후 멸망할때까지 수도로 쓰였다.
- ↑ 만주민주공화국의 국가원수 겸 통국인민의회 상임간부평의회 의상
- ↑ 통국인민평의회의 의상 겸 만주민주공화국의 정부수반. 통국인민평의회 의상이 사실상 국무상까지도 겸직하였다, 아닌 경우도 존재하며 볼드처리는 겸직한 인물.
- ↑ 만주공산당의 지도자
- ↑ 만주민주공화국의 군대인 만주인민군의 군통수권자
- ↑ 행정공용어
- ↑ 공식석상에선 만주어가 의무였으며, 일상에선 각자의 언어를 사용하는것이 허용되었다.
- ↑ 초기엔 여전히 관화도 공식석상에서 사용되었으나, 만주어와 혼용되었고 결국엔 한문은 쓰되, 관화는 퇴출되었다.
- ↑ 만주문자는 건국 초부터 퇴출되었으며, 이후 한문으로 전사해 적다가 니어후루 아이싱가의 만주어 개혁으로 만주키릴문자가 제정되었고 이를 공식문자로 채택하였다.
- ↑ 초기엔 "滿洲人民共和国"과 같이 한문이 있으면 그 아래에 만주어 주음부호가 있었다.
- ↑ 현재까지 전방위적으로 쓰이고 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의 간체자를 채택하였으나 독자적인 문자, 정자체를 혼용한다.
- ↑ 외국인에게 적용하던 이중가격을 위해 만들어진 통화, 만주폐와 1:1 이었으나 시기마다 달랐다. 내국인은 사용하지 않았으며 만주 아이신과는 1:1로 교횐되었다.
- ↑ 중국 동시가입
- ↑ 몽골인을 뒤로 사회주의 국가의 어버이로 여겨지는 레닌이 수건을 만주족에게 건네줌으로써 만주 인민 공화국의 정체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수건은 전통적으로 권위와 지조를 상징하며, 민족자결주의에 의한 민족을 부정하지 않고 용인하는 정책을 상징하는것을 보여준다.
- ↑ 국군쯤 되는 군사위원장직은 따로 있지만 국무상은 내무군(공안)을, 서기장은 공산당원을 사실상 군대처럼 몰고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정규군의 견제가 가능했다. 물론 정상적인 체제도 아니었고 폭력적인 정치투쟁도 만연하였다.
-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의 중재하에 중국·만주·소련의 영수급, 각각 풍중운, 주은래. 게오르기 말렌코프가 모여 중국의 만주에 대한 요구를 포기함과 대만과 한국에 대한 향방을 결정한 회의.
- ↑ 이는 고숭덕이 지식인계층을 포섭하여 자신의 독재를 강고히 할 토대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 ↑ 중화민국에 대한 문화적 수용은 관습적으로 용인되어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중앙당 로비엔 주석과 손문의 초상화가 같이 걸려있을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