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열국시대
북서부에는 한족이 넘어와 라란국(羅丹國)을 건국하였는데 기원후 1세기 이전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라란국은 동쪽의 무단(武丹)[1]을 속주로 편입하고 무강족과 충돌하였으며 주로 남쪽의 앙골족과 교류하였다.
한편 이보다 앞선 기원전 1세기에 김안평이 지금의 능강특별자치시 월영산 일대에 반월국(半月國)을 건국하고 그 주변을 정복하여 7개 성을 쌓았다. 반월국은 조월국(朝月國)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반월국의 북쪽에 있는 미라오국의 멸칭으로 불렀다가 미라오국에서 신격화의 의미로 조월국으로 개명하자 그것을 부정하고 반월국의 별칭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직후 미라오국으로 국명을 환원하였다.
기원전 50년대경, 모신나강의 아들인 세마지[2]가 세씨로 개명하고 지금의 안강시 반월동 일대에 세라국(世羅國)을 건국하였다.
삼국시대
남고구려(문성국), 라란국, 세라국을 중심으로 한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남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위치하던 고구려가 멸망하고 유민들의 일부가 라란국으로 이주하여 정착하며 살다가[3] 라란국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해나갔고 란주 동성을 공격하여 라란국 강왕을 죽이고 이를 발판 삼아서 남고구려를 건국하였다. 남고구려는 무단을 복속하고 무강과 전쟁하는 한편 라란국과는 교류를 하고 라란국 사신단과 같이 중국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다가 가끔씩 전쟁을 하기도 하였는데 남고구려가 라란국의 란주 동성을 함락하고 왕성을 공격하다가 철군한적도 있었다. 이렇게 전쟁과 교류를 반복하면서 지내오다가 결국 라란국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또한 문성국이 반월국을 멸망시키고 반월국의 문화를 수용하기도 했다.[4]
세라국은 7세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라란국, 무강 등과의 전쟁으로 많은 영토를 확장하였다.[5] 그러나 9세기 후반 문성국의 침공으로 멸망하였으며 부흥운동에 실패한 이후 왕실까지 문성국의 도성인 평주성으로 통채로 이주하였다.
900년대 초반에 옛 영토의 일부를 확보하고 재건에 성공하였다가 문성국과의 전투끝에 지금의 영토의 동부만이 남게 되었다. 왕실을 재건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국가가 존속하게 되었으며 간선제를 도입하여 국가원수이자 중대성의 우두머리인 중대사를 정부에서 간선제로 선출했다.[6][7]
중세
전기 문성국시대
이 시대는 라란국의 말왕이 문성국 양명왕에게 항복한 시점부터 애명여왕의 부군(夫君)인 란경휘가 반란으로 라란국을 재건하여 후라란국이 성립된 시점까지를 이르는 시대이다.
라란국이 멸망한 직후 양명왕대부터 경선왕대까지 라란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란경휘가 애명여왕을 옹립하고 이후 후라란국을 건국하여 문성국은 잠시 역사에서 사라진다.
후라란국시대
애명여왕의 부군(夫君)인 란경휘가 반란으로 라란국을 재건하여 후라란국이 성립된 시점부터 후라란국이 멸망하고 문성국이 재건된 시점까지를 이르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동강국이 후라란국과 전쟁을 했는데 이를 노려 후라란국을 멸망시키고 문성국을 재건하였다.
세라국은 후라란국 멸망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이 공적으로 지금의 영토의 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할양받았다.[8]
후기 문성국시대
근세
중세 문주국시대
문주왕이 즉위한 시기부터 성종이 즉위하기 직전의 시대를 제1왕국으로 분류한다.
근대
근대 문주국시대
성종이 집권한 시기부터 일제강점기 직전까지의 시대로 제2왕국으로 분류한다.
현대
일제강점기
미군정 ~ 현대문주국시대
각주
- ↑ 한반도 도래인과 무강족의 혼혈인이 대다수인 무강의 한 일파
- ↑ 본래 이름은 불명이나 부친인 모신나강이 모신씨였으므로 세마지 역시 모신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서에 모신나강이 신씨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근거로 복성인 모신씨를 신씨로 단성 표기한 것의 다른 표기라는 주장도 나온다. 다만 이름을 신나강으로 인식하여 성씨를 모씨로 기록한 사례도 보인다.
- ↑ 대략 그 수가 약 30만 명으로 추측된다. 이는 고려로 망명한 약 20만 명의 발해 유민들보다 많은 숫자이다.
- ↑ 반월국의 영산이었던 월영산이 문주국의 영산이 된 것과 문주국의 별칭이 월성(月城)인 것이 반월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 이 당시 라란국의 일부 지역은 호족들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중앙의 지원이 없어서 문성국과 세라국에게 점령당했다. 남고구려의 건국도 이 사태가 계속되자 라란국 강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갔다가 철군하여 란주 동성 성문 앞에서 전사하였던 것을 시작으로 세력이 확장되어 건국되었다.
- ↑ 현존하는 공화국 중에서 가장 오래된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외국으로 취급했더라도 문성국(문주국)의 역대 태왕이 즉위 직후 자신 스스로를 세라국의 국왕으로 책봉했다는 점에서 공화국이 아니라 입헌군주국으로 봐야 된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현재는 국무령제 공화국이다.
- ↑ 다만 중대사가 문주국 태왕의 신하가 아니었던 제1공화국 시절에는 대통령 중심제 하에 대통령이 중대사를 임명했지만 현재는 중대사가 문주국 태왕의 신하이므로 직선제로 선출된 국무령이 임명한다.
- ↑ 300명의 군대를 파병했으므로 유의미한 공적을 세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후라란국이 통제하지 못한 지역도 있고 그 중에는 문성국 뿐만 아니라 극소수지만 세라국을 지지한 지역도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