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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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on der Sozialistischen Räterepublik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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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Kulturrevolution
기간
1968년 3월 ~ 9월 (~ 1980년)
장소
유럽 사회주의 국가 전역
원인
복합적 (원인 문단 참조)
대립 세력
구 사회주의 세력
라트 연방 정부
붉은 군대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프랑스 정부
극좌 대학생
3월 25일 운동
사회민주당 좌파
주요 인물
파울 요제프 괴벨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쿠르트 게오르크 키징거
알렉세이 코시긴
헤르베르트 프람
다니엘 콘벤디트
루디 두치케
피해
경찰 3명 사망
경찰 37명 부상
학생 6명 사망
학생 및 민간인 140명 부상
총 5,000명 이상 연행
결과
진압 측의 단기적인 성공
시위대 측의 정치적인 성공
영향
라트 연방 및 공산권의 정치, 문화, 사회 개혁

개요

불멸할 투쟁에 영원한 영광을!
(Ewiger Ruhm dem unsterblichen Kampf!)
시위대의 구호[1]

1968년부터 1980년까지 라트 연방과 유럽 각지에서 전개된 사회운동을 의미한다. 1919년 독일 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중 시위였으며 현대 라트 연방과 사회주의 진영에 지대한 역할을 미쳤다. 이에 대한 평가는 현재도 엇갈릴정도로 첨예한 정치적 논쟁의 영역에 있다.

배경

전후의 경제 부흥과 그 부작용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전 유럽이 폐허가 되었지만,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특성상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피해를 빠른 속도로 복구할 수 있었다. 그 결과 1950년대 유럽은 전쟁 이전보다도 더욱 풍요로운 경제 생활을 누리게 되었으며 약 3억명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의 중산층이 생겨났다. 그러나 경제적 안정으로 인하여 사회 분위기는 빠르게 경직되었으며, 파울 요제프 괴벨스 의장의 통치 하에 라트 연방은 큰 위기도, 큰 발전도 겪지 않는 정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한편 경제 부흥에 따라 출산율이 늘어나면서 상당한 규모의 신세대가 등장했다. 이들을 베이비부머라고 한다. 베이비 부머들은 양차대전과 혁명을 겪지 않은 첫번째 세대로 이전 세대에 비해 더 진보적인 경향을 띄었다. 베이비 부머가 1960년대 사회에 진입하며 여성문제, 환경문제 등 여러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으나 사회민주당은 이에 부응할 수 없었고, 이전보다 늘어난 인구수를 감당하지 못한 작업장의 질적 저하도 심화되면서 사회 불만이 고조되었다.

대학 내 투쟁

베이비 부머가 증가하면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대학교육이었다. 1918년까지만 하더라도 10%대에 불과했던 고등교육 이수 비율은 1964년 기준으로 라트 연방에서 99.8%, 프랑스에서 93.5%에 달해 사실상 인구 모두가 고등교육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 진학율도 5%대에서 30%대로 증가했다. 고등교육 인구가 늘어나면서 신세대들은 자연스럽게 당에 이끌리는 객체가 아닌 새로운 혁명을 주도하는 사회주의적 주체로서 자신을 정체화했고 이는 보수적 사회 분위기와 충돌했다.

특히 대학의 경우 늘어난 학생 수를 감당할 수 없어 대학 교육의 질적 저하 문제가 뚜렷하게 등장했고, 이는 교수가 학생을 면담하는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대형 강의실이 확충되고 기계식, 암기식 시험이 질 높은 교육을 대체하는 식의 양상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불만으로 학생들은 대학과 고등교육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갈등이 고조되었다.

혈통주의에 대한 반감

1919년 1월 혁명에 참여한 고참 사회민주당원의 아들 딸들이 인맥을 통해 좋은 자리를 획득하는 경우가 늘어났고, 특히 대학교와 작업장의 질적 하락 문제와 연관되어 극소수 고위직 자녀들에 대한 사회적 반감이 심화되었다. 이는 당의 주요 관료들을 숙청해야한다는 청년층의 요구로 나타났다.

과거사 청산 부진

제2차 세계대전과 뒤이은 유럽 혁명의 여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은 기존 지배계급의 반발을 우려하여 부농과 민족 부르주아, 종교 등의 반동 세력에 대한 투쟁을 충분히 벌이지 못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교황청을 인정했으며, 그리스 혁명정권 역시 정교회 신자들의 요구에 따라 아토스 산의 소유권을 국유화하는 선에서 그들의 종교적 활동을 자유롭게 허가했다.

또한, 과거 파쇼 정권에서 복무했던 이들이 그대로 군이나 당에서 복무하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투철한 파쇼들은 공직에서 배제되었으나, 관료집단은 연속성을 띄고 있었다. 가령 프랑스 대학생들의 자체적인 조사 결과 프랑스의 경우 과거 파쇼 정권에서 복무했던 관료의 43%가 여전히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단

시위를 벌이고 있는 프랑스의 대학생들

1968년 3월 5일 파리 낭테르 대학교에서 일련의 학생들이 체포된 것이 문화대혁명이 발단이라고 여겨진다. 낭테르 대학교는 파리 근교에 신설된 대학교로 소르본 대학교 시스템의 일원이었는데, 폭증하는 학생 수를 감당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또한, 교육의 질도 문제가 되었다. 당시 중흥하고 있던 프랑스의 과학 기술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공계 수업을 많이 개설했으나 문리 수업을 거의 개설하지 않은 것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학생들은 기숙사 환경의 개선과 학교 교육 문제 시정을 요구하며 총장실을 점거했다. 그러나 총장은 경찰을 불러 이들을 강제 해산시켰고, 주도자 3명은 연행되었는데 이것이 대학생들을 크게 자극했다.

3월 25일 낭테르 대학교의 철학과 재학생이었던 다니엘 콘벤디트(Daniel Cohn-Bendit)는 일시 구금된 학생들의 즉각적 석방과 학교 생활 여건 개선을 목표로 한 조직 "3월 25일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낭테르 대학교 측에서는 3월 25일 모임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고 이들을 "극좌적 편향"이라고 간주했다.

이렇듯 사건이 고조되는 와중에 한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진압용 물대포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반항하는 시위가 파리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라트 연방에도 이러한 소식이 전해져 루디 두치케를 중심으로 하여 대학 생활 여건 개선과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집단적 시위가 발흥했다.

양상

반관료투쟁

반관료투쟁(Kampf der Antibürokratie)은 각국의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에 잔재해있는 관료주의를 청산해야한다는 일련의 정치적 투쟁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의 표적이 된 것은 사회민주당의 보수파였다. 그중에서도 파울 요제프 괴벨스 의장과 알렉세이 코시긴 서기장이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되었는데, 대학생들은 곳곳에 세워진 괴벨스의 동상을 끌어내 무참히 부숴버리기도 했다. 코시긴은 코시긴 개혁의 실패로 이미 신임을 잃은 상황이었다.

노동조합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국가 1노동조합의 원칙에 따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조가 공산당 산하로 통일되었는데, 이것이 관료주의와 보수주의를 촉발했기 때문이었다.

반대로 헤르베르트 프람 등 사회민주당에서 과거사 청산에 적극적이었던 일부는 지지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이들은 오늘날 사회민주당의 좌파적인 경향으로 이어지게 된다.

반우파투쟁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 개재된 반우파투쟁 슬로건

반우파투쟁(Kampf der Anti-Rechts)은 자국에 산재해있는 여러 우파적 요소에 대해 투쟁해야한다는 문화적 투쟁을 의미한다.

반우파투쟁의 주요한 내용은 문화혁명과 반기독교 투쟁이다. 우선 문화혁명은 문화에 유입되어있는 우파적인 요소를 배제한다는 것으로, 크게 보아 구시대적 요소에 대한 타파와 새로운 시대의 요소에 대한 지지로 나눌 수 있다. 시위에 찬동한 학생들은 특별히 "반동적"이라고 여겨지는 미국의 영화를 수입하는 것을 금지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유서깊은 일부 그림을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2], 레프 톨스토이[3], 요한 볼프강 폰 괴테[4] 등이 특히 청산의 대상이 되었으며 베를린의 카를마르크스 대학교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책들이 무단으로 반출되어 불태워지는 사건도 일어났다.

반대로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영화와 예술, 문학 등을 찬양하였는데, 이들은 후대 누벨바그 운동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반기독교 투쟁은 당시 유럽 사회에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기독교에 대한 타파를 내세웠다. 집중적인 표적이 된 것은 가톨릭교회였다. 특히 가톨릭의 교세가 강했던 이탈리아와 폴란드에서는 극좌 대학생들이 대도시의 성당을 파괴하고 사제들을 모욕하는 일이 잦았다. 후일 교황이 되는 카롤 유제프 보이티와도 극좌 대학생들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그리스에서는 정교회의 본산 중 하나인 아토스 산이 대학생과 폭도들에 의해 일부 파괴되었고, 비잔틴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몇몇 유물이 반출되었는데 아직도 일부는 되찾지 못했다고 한다.

반응과 결말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을 필두로 한 공산당 정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파울 요제프 괴벨스를 비롯한 주요한 공산당 지도자들이 이 시위로 인해 퇴진했다. 시위가 격화된 5월에는 프랑스에서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시위대가 치안을 장악해, 공산당이 통제력을 잃기도 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자신들의 힘을 과대평가했으며 실제로는 이러한 극좌적 경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 드러났다. 1968년 5월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8월 전당대회 개최와 자신의 퇴진 소식을 전했지만, 슈타지의 비밀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의 73%가 괴벨스의 퇴진이 잘못된 결정이라 답했으며, 그중 87%는 시위대의 과격성과 극좌편향을 지적했다.

괴벨스 퇴진에 반대하는 친정권 시위대의 집회

또한 베를린 혁명광장에서 시민 70만명이 괴벨스 퇴진 반대와 극좌편향 반대를 주장하는 시위를 전개했는데, 이는 학생 시위대의 규모를 훨씬 추월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조사연구소의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학생들에게 공격을 받은 것에 충격을 받고 심장 마비로 사망한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대중의 여론을 크게 악화시켰다. 아도르노는 존경받는 사회주의 학자로, 그의 사망은 시위가 "극좌 편향"이라는 여론을 증폭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민주당에 대한 개혁 요구가 높은 것은 사실이었고,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선출된 최고 라트 의원들은 거의 대부분이 좌파나 개혁파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국민들은 극좌 편향도 거부했지만, 괴벨스 개인을 제외한 사회민주당 보수파에도 큰 지지를 보내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비밀 여론조사에서 괴벨스 지지층의 53%가 당 개혁에 동조하고 있었고 반대파는 37%에 그쳤다.

이에 따라 제21차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중앙당 대회에서는 괴벨스 퇴진과 개혁파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집권, 당 구조 개혁 등의 조치가 이루어졌다.

영향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오래 지속되었으며, 1972년 23차 대회에서 좌파의 지지를 받은 헤르베르트 프람이 승리하며 정치적으로 이들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프람 정권은 시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 여성 부처 신설, 오락용 약물 합법화 등의 조치를 추구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1980년까지 이어졌지만, 연이은 오일쇼크와 외교적 실책의 결과 강경 보수파인 에리히 호네커가 집권하면서, 문화대혁명의 여파는 빠르게 잦아들었다.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의 존속 기간을 아무리 길게 잡는 학자도 1980년에는 문화대혁명이 종결되었다고 평가한다.

평가

긍정적 평가

문화대혁명을 긍정평가하는 측에서는 "수동적으로 변해가던 사회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대중의 자발성이라는 룩셈부르크주의의 불멸할 가치를 되살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라트 연방 사회민주당 측에서는 기본적으로 문혁의 일부 급진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이지만, 그 의의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종합적 긍정 평가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2018년 문화대혁명 50주년을 맞은 ZDF의 여론조사에서, 라트 연방 시민 47%는 긍정적 영향이 부정적 영향보다 크다고 응답했고, 부정적 영향이 크다고 응답한 시민은 15%에 불과했다.[5]

폭력적인 면이 강조되는 부분이 크지만, 여성 인권과 환경 운동에 있어 문혁이 미친 영향은 평가절하될 수 없다. 때문에 인권운동사 측면에서 문혁이 고평가받는 면이 있다.

부정적 평가

부정 평가도 만만치 않다, 우선, 과거 급속한 경제 개발과 성장으로 얻은 성과를 완전히 무시한다는 논란이 컸다. 이에 대해 보수파의 거두였던 게오르크 키징거 국무상은 "극좌파가 현세대를 갉아먹을 뿐 아니라 구세대까지 갉아먹는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많은 문화재가 파괴되었고, 장기적으로 입은 문화적 손실이 엄청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특히 유서 깊은 아토스 산은 극좌 대학생들에게 철저히 유린당해 파괴되었는데, 이례적으로 그리스 공산당 지도부가 아토스 산을 방문해 만행을 사과했을 정도였다.

정치적 사보타주와 테러도 자주 일어났다. 그나마 공산당 차원에서 고위 공직자를 보호하긴 했으나 공장 관리자, 말단 지역 공무원, 성직자 등은 아무 이유 없이 극좌 대학생들에게 자아비판을 강요당했다.

여담


  1. 프람주의자들의 고전적인 슬로건이기도 하다.
  2. 그의 반사회주의적 성향이 논란이 되었다.
  3. 그의 과도한 기독교 지지 성향이 문제시되었다.
  4. 반혁명주의가 반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5. 양쪽 모두 있어 재단할 수 없다는 입장은 25%, 응답 거부자는 13%였다.